수백 년을 묵은 영혼.
영혼이 이승에 머무는 이유는 미련과 한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이승에 머문다는 것은 그 한이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는 것.
거기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 미련은 더욱더 강해진다.
강하기에 버틴 것이고, 버텼기에 강한 것이다.
“….”
“취익?”
지금의 경우엔 조금 더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했다.
오랜세월을 기다리느라 지쳐 버린 영혼.
이미 낡아버려 넋을 잃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존재만 하는 것이란 소리다.
그런데도 영혼의 존재감이 굉장했다.
“이거 무슨 불이야?”
저 푸른색의 불.
저것이 영혼의 상태를 회복시켜 주고 있었다.
불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태우는 것이 아닌 영혼을 달래주고 치유해 주는 것.
“취익! 신성한 불꽃이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위대한 선조들이 머무는 불꽃이다.”
역시나 오크들에게 전해지는 것도 나에게 보이는 것과 비슷했다.
“취익! 지금도 샤먼의 선조가 불꽃에 머무른다!”
“맞아.”
“냄새가 난다.”
샤먼의 선조.
저번에 로메넬이 말한 적이 있었다.
오백년쯤 전에 특별한 오크들이 있었다고.
“오백년까지는 아닌 거 같고… 그 뒤에 죽은 건가?”
“최후의 샤먼, 사백년전에 죽었다.”
“음?”
“지금은 내가 마지막으로 남은 샤먼의 후예다.”
샤먼의 대가 끊긴 것.
그렇다면 저 영혼을 깨워야 일이 풀린다는 소리다.
저 불을 피우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것인 것 같았으니까.
저 영혼의 뒤로 제대로 된 샤먼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건, 철저하게 대를 끊어 놓았다는 뜻.
그리고 그건 아마.
“네크로맨서 짓이지?”
“그렇다. 내 형제들도 모두 그들에게 죽거나, 잡혀갔다.”
“잡혀갔다고?”
“얼마 전에 마지막 형제들이 모두 죽었다.”
스윽 –
고개를 돌리니 나를 안내했던 오크의 영혼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놈도 죽고 나서야 나를 만났었으니, 같은 처지였으리라.
“왜 잡혀갔는데?”
“….샤먼의 힘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힘.”
머릿속을 스치는 게 하나 있었다.
산에서 보았던 낡은 책.
오크샤먼들만이 읽을 수 있다는 글자.
“책에 적혀있는 거 맞지?”
“취,취익!! 역시 인간샤먼, 그것도 위대한 영혼이 알려주었나?”
“하여튼 무당이 뭘 맞추면 다 신기한 능력으로 맞추는 줄 알아요.”
점집에 찾아와서 ‘점보러 왔슈?’ 하고 물어보면 다들 놀란다.
미리 알고 있던 것인데도 바보같이 착각을 하는 것이다.
이런 걸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걸 읽어야 해서 다끌려간 거야? 네크로맨서들은 그걸로 뭘 하는데?”
“취익, 나도 모른다.”
“….?”
“난 잡혀간 적이 없다. 강하기 때문이다.”
이놈도 거의 죽기직전에 나를 만나지 않았었나?
실제로 옆에 형제라는 놈이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테고 말이다.
“살아남은 오크. 강한 오크다.”
“….”
“이곳에 있는 오크. 전부 강하다.”
저 논리 대로라면 강한 게 맞다.
무려 바다를 땟목으로 횡단하는데 성공한 오크들이니까.
약한 놈은 도착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종족이 다 죽겠는데?”
굴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 흉악한 얼굴이 불쌍해 보일 정도로.
“지금의 오크는 힘이없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취익…”
“그래서 여기에 숨어있는 거야? 아니면 저 영혼때문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나?”
그럼 그걸 누구한테 물어보겠는가.
자리를 잡은 당사자에게 물어봐야지.
“직접 나에게 방향을 알려주지 않았나?”
“….?”
“그 방향을 따라 쭉 걸어왔다.”
굴락의 사정을 들어 보니 정말로 구구절절했다.
시도 때도 없이 덮치는 몬스터들.
그리고 따라붙는 네크로맨서의 추격.
그 속에서 살아남은 샤먼의 후예는 굴락이 유일한 모양이었다.
“취익! 많은 오크가 죽었다.”
나름대로 오크들을 모아 부족을 만든 모양이지만 역부족이었던 것 같았다.
하기야 오크들이 네크로맨서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오크들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을때까지.”
굴락의 말이 끝나자 이곳저곳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취익… 죽음의 예언.”
“…취익.”
지난번에 만났던 오크에게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 때문에 내 방울을 무서워하기도 했었지.
“약한 오크, 죽음의 냄새가 날 때마다 알려 줬다. 내가 도움을 받았을 때처럼.”
“잘했네.”
제법 무당과 가까운 행동이지 않은가.
다가올 흉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니까.
“하지만 모두 죽었다.”
“….?”
“취익! 오크가 아직 힘이 없기 때문이다.”
어쩐지 오크가 과하게 죽음의 예언이라는 걸 두려워한다 했다.
이놈들의 처지에서는 사형선고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굴락이 말하는 족족 죽어 나갔을 테니.
“그렇게 오크들에게서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나를 쫓아온다.”
“고생했네.”
못 보던 사이에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있었을 줄이야.
이놈들 몬스터 답게 기구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인간샤먼, 알려 준 방향대로 오니 최후의 샤먼과 만날 수 있었다.”
척 –
당당하게 가리키는 푸른색의 불길.
자랑을 하는 듯 어깨가 올라와 있었다.
“그때 보여 준것을 따라 하며 불을 피워내는 것에 성공했다.”
“날 따라 해?”
난 저 불꽃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제대로 된 것을 보는 것도 오늘 처음.
도대체 날 보고 뭘 어떻게 따라 했길래 저걸 만들어냈다는 말인가?
그리고 한번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절대로 따라 할 수가 없다.
생각보다 복잡한 것이니까.
“취익! 지팡이를 가져다 달라.”
“신성한 의식!”
한쪽을 향해 달려간 오크가 기다란 지팡이를 가지고 왔다.
굴락보다 긴 지팡이.
그 지팡이의 끝에는 두개골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약해진 오크의 머리다. 나와 함께 싸운다!”
“….?”
“크리스, 소문을 듣고 연구했다. 보아라 나의 성장을.”
푸른색의 불 앞에 걸어가서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오크.
“얼씨구?”
그 모습이 제법 그럴싸했다.
저 앞에 있는 불이 촛불이라 치면 용도조차 비슷했다.
신령님들께 촛불로 위치를 알리고 방울을 흔들면서 모시는 것이니까.
심지어 정말로 저 불 속에 오크의 영혼이 자리 잡고 있지 않던가?
굴락이 지팡이를 한번 흔들었다.
“오…?”
해골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 지팡이.
그것보다 영기와 비슷한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뭐랄까, 사람이 아니라서 쌓이는 영기라고 해야 하나?
근원이 조금 다른 기운.
“취익!”
기운들이 움직이며 푸른색의 불꽃으로 쏟아졌다.
화르륵 –
조금 더 크기가 커진 불꽃.
아까보다 더 강한 기세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놈, 분명히 소질이 있다.
영감이 있다는 소리다.
“허…”
나처럼 신령을 통해 공수를 받는 느낌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했다.
제대로 된 영혼만 있으면 도움을 받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순간, 굴락이 다리를 굽혔다 피며 몸을 띄워 올렸다.
내가 굿을 할 때처럼.
“흐음…”
이번에는 불꽃에 변화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저건 애초에 잘못된 방법이니까.
“잠깐만.”
“취익?”
“너 그거 왜 뛰는 거냐?”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저렇게 하는 게 맞기는 하지만….
동작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뛰는 이유는 모르지?”
“…취익, 그렇다.”
참나, 살다 살다 오크한테 굿하는 법을 가르칠 줄이야.
하지만 그렇게 싫은 느낌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만난 나와 비슷한 존재.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냄새를 맡고 죽음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
잡귀나 잡신을 모시는 무당들보다 용한 면이 있었다.
반푼이 치고는 제대로 된 반푼이였다.
“혼자서 해낸게 용하네.”
“…틀렸나?”
간만에 흥이 올랐다.
이런 자리에서 참을 수가 있겠는가.
“알려줄 테니까 잘 들어. 어디 가서 못배우는 거야.”
“알겠다! 집중한다!”
“몸을 띄우며 춤을 추는 건 다양한 이유가 있어.”
굿에 빠지지 않는 것은 풍악과 춤.
이것들은 흥을 돋구기 위함이다.
굿을 하는 무당도, 굿을 보는 망자와 생자도 마찬가지다.
흥이 올라야 신이 난다.
“왜 흥이올라야 신이 나냐면.”
무당과 연예인의 팔자가 비슷한 이유.
남들에게 감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 말고 결정적인 것이 하나가 있다.
달아오른 흥 속에서 빠져드는 무아지경이다.
“신령님의 생각을 받고, 의지를 받아야 하는 거야.”
딸랑 –
“여기에 니 생각이 섞이면 공수가 변질돼. 잘 안 보이기도하고.”
딸랑 –
나를 잊고 그 속으로 빠져든다.
가수들이나 배우들이 완전히 몰입해 무아지경에 이르는 것처럼 말이다.
딸랑 –
어깨를 한번 흔들고.
딸랑 –
몸을 띄워 올린다.
마음과 생각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를 지워간다.
마치, 실제로 들려오는 듯한 장단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니야. 알아서 움직이게 흥에 맡기는 거야.”
그렇게 흥에 취해갈때쯤.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예술인이 이르면 무아지경.
무당이 이르면 접신이라 불리는 것.
말 그대로 신이 났다.
딸랑 –
딸랑 –
흥이 나고 신이나면 보는 사람이 즐겁다.
영혼도 즐겁고, 나도 즐겁다.
원혼들과 같이 놀면서 달래주고 한을 풀어 주는 것.
그게 굿의 본질이다.
딸랑 –
순간, 입이 열리며 공수가 터져 나왔다.
“좋구나!”
몸주신의 시선이 방울을 따라 나에게 오고.
나와 연이 닿은 신들의 눈이 스쳐 지나갔다.
딸랑 –
한바탕의 강신.
적당히 놀고 마음을 가라앉힐때쯤.
몸주신의 여운에 나도 모르게 손이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화르륵 –
팟.
타오르던 푸른 불길이 꺼져 버렸다.
그 안에 있던 샤먼의 영혼 역시도 같이 사라졌다.
“….취,취익….! 위대한 영혼…!”
어느샌가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오크의 영혼들.
굴락은 처음 점괘를 봐줬을때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시, 신성한 불이 꺼졌다!”
스윽 –
굴락을 쳐다 보니 화들짝 눈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영감이 있는 놈이니 눈을 마주치기가 더 힘들 것이다.
“아직 기가 약해서 그래. 당연한 거야. 눈도 못마주치겠지?”
“취익?”
굴락이 내 앞에서 쉽게 촛불을 밝힐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도 기를 못펴고 주눅이 들어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다 봤지?”
“똑똑히 봤다.”
“해 봐.”
“…취익?”
뉴비를 만나서 크리스 신남!
– 주 의 –
혹시나 꿈을 자주 꾸시거나하는 분은 따라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