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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5

       직접 겪어 본 내가 말하는데, 누군가와 기억과 감정이 섞인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상대가 좀 좋은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어떨지 몰라도, 내가 겪어야 할 기억과 감정은 절대 행복한 삶을 살던 사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억압되고, 감금되고,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삶을 살았던 예사라의 생각은 의외로 단순했다.

        

       외로움과 행복함과 증오.

        

       이렇게 단순한 세 개의 감정.

        

       그 중 두 개의 감정은 단 한 사람에게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적막한 저택에 예사라를 가두어두고, 정확히 정해진 날짜에만 방문하여 적선하듯 사랑을 베풀고 가는 ‘어머님’.

        

       ……최나경이었다.

        

       기억도 마찬가지로, 파악하겠다고 나섰던 것이 바보같이 생각될 만큼 단순했다.

        

       저택과 학교. 사라의 기억 속 장소는 이 둘 뿐이었다.

        

       가끔 저택 안의 정원을 거닐기는 했다. 수업 시간에 멋대로 나가 공원에 앉아있기도 했고, 가끔은 한가람 팀장이 말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예사라는 이미 어린 시절에 마음을 닫아버렸다.

        

       관심사는 오로지 최나경 하나뿐이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별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예사라가 원하던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예사라가 어째서 본편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궁금했었다.

        

       이제 보면 이유는 단순했다.

        

       정말로, 손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최나경의 진심이야 아직 나도 파악하지 못했지만, 예사라는 결국 최나경도 자기 돈을 노리는 어른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예사라의 눈으로 보는 최나경의 얼굴에선 빛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예사라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면, 오히려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쪽 세계는 아주 미묘한 부분에서 내가 살던 세계와는 달랐다.

        

       단순히 서울의 풍경이 내가 알던 서울의 풍경과 달랐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률이나 회사의 이름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대부분은 실생활에서 미묘하게 도움이 될 듯 되지 않는 수준의 것이었지만, 종종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주는 능력도 있었다.

        

       이를테면, 게임 속의 주인공이던 유하늘은, 잘못된 선택을 본능적으로 깨닫는 능력이 있었다. 게임오버를 막기 위한 게임 속의 장치이긴 했지만, 그게 만약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능력이라면 남들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예사라의 능력.

        

       특정한 사람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광경을 보는, 사실 육감이라기보다는 거의 초능력에 가까웠던 능력.

        

       예사라의 기억과 동화된 지금에서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능력은, 일종의 본능이다.

        

       ‘자신의 삶을 바꾸어 줄 사람’을 찾는 능력.

        

       사라, 수아, 소희의 얼굴에서 빛이 나던 이유는, 그저 내가 그 셋의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세 사람이, 지금까지 예사라를 대하던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예사라를 대했기 때문이다.

        

       수아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예사라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하늘이는, 자기 말을 듣지 못한 예사라를 끝까지 불러서 말을 붙였다.

        

       소희는, 예사라가 자신과 차이 난다는 사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얼굴이 빛나는 사람들은, 모두 특별한 사람이기에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빛나 보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예사라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을 아무도 만나본 적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법을 몰랐던 예사라는—

        

       아마, 그 신호를 ‘다른 방법으로’ 잡으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자신과 상호작용하던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저 먼 곳, 어디론가 도망쳐서,

        

       즐거움도, 행복함도,

        

       외로움도, 슬픔도.

        

       삶의 모든 복잡한 것을 벗어 던져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예사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을까.

        

       눈을 떠보니 보인 것은, 아침이면 언제나 보던 천장이었다.

        

       천장의 등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

        

       무슨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분명히, 나는 수면제를 한 움큼 삼켰다. 만약 그 약이 가짜가 아니라면, 나는 지금 일어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대로 영영 눈을 감고 있었어야 했는데.

        

       ……게다가, 내가 입고 있는 교복은 내가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교복이었다. 어쩌면 내가 진학할 때 입어야 했을 교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고등학교에 갈 일도 없었다. 죽었어야 하니까.

        

       계획대로라면 분명히 그렇게 돼야 했었으니까.

        

       “사라!”

        

       “으헿.”

        

       옆에서 누가 갑자기 큰소리를 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분명 메이드뿐이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로 메이드가 있긴 했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 큰 키.

        

       아무래도 조금 위압감이 있는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분명히 메이드 복이었다. 이상하게 셔츠 세 번째 단추까지 풀어서, 척 봐도 아주 여성스러운 그 부분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복장이었다. 솔직히, 메이드 복이 매번 보던 그 디자인이 아니었다면 무슨 분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며 양손으로 나의 오른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예쁜 얼굴이어서 그랬을까.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을……

        

       몰랐, 다……?

        

       아니, 기억 속의 저 깊은 곳에서는, 이 사람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기억이 아니었다.

        

       뭐랄까.

        

       가끔, 꿈속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무언가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거의 남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흥미로웠다’같은 감정은 남는 경우도 있다.

        

       그 꿈속에서 어렴풋이 만났던 것 같은, 그런 인상이었다.

        

       ……하긴, 나는 중학생 때 이후로 꿈이라는 것도 거의 꿔 본 적도 없긴 하지만.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희미하게라도 기억이 나는지 의아했다.

        

       “사라야, 괜찮아?”

        

       이번에는 왼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또 다른 인상의 아이가 앉아있었다.

        

       양 갈래로 나눠 묶은 머리카락은 그 아이가 활기찬 아이라는 이미지를 느끼게 해 주었지만, 그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오히려 너무나 연약하고 처연해 보였다.

        

       그래도 이 아이는 메이드 복은 아니네. 어째서 이 집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멍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제야, 나는 내 방 안이 내가 알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넓고 비어있던 방에는 침대가 하나 더 생겼다. 그 침대 옆에는 간단하게 옷을 걸어둘 수 있는 옷걸이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가방 몇 개가 줄지어 서 있었다.

        

       “…….”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있었던 건지. 대체 저 아이들은 누구고, 어째서 당당하게 내 방에 들어와 있는지.

        

       “…….”

        

       그러다가,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내 양손을 잡은 두 사람과는 다르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던 그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었다. 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결 좋은 밤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그 아이도, 분명 이미지만으로는 아주 활기찰 것 같았다. 혈색 좋은 피부나, 비쩍 마른 나와는 다르게 적당하게 건강해 보이는 몸, 그리고…… 적당히 발달한 발육상태까지.

        

       평소에 거의 햇빛 한 번 보지 않고 지내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의 소녀였는데도, 이상하게 나를 몹시 두렵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한동안, 방 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지금껏 사람들에게 능동적으로 말을 걸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생각은 많이 했지만, 애초에 말을 걸어도 상대가 대답해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믿지도 않았다. 믿을 이유도 없었고.

        

       그런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나’는, 무슨 이유로 이 세 명의 아이들과 대화를 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친절하게 나의 방으로 초대하면서까지.

        

       ……그래, 어머님과의 만남 때도, 이 아이들은 있었다.

        

       내 뒤를 따라서 둘의 만남을 볼 만큼, 나와 사이가 각별했던 걸까?

        

       “…….”

        

       잠깐 고민했다.

        

       이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제대로 물어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그래, 나의 이성은 그게 옳은 선택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의 판단은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일을 헤쳐 나갈 때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나의 ‘감정’은 고개를 저었다.

        

       왜? 이성이 물었다.

        

       잘 모르겠어. 감정은 그런 대답을 했다.

        

       하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

        

       “…….”

        

       나는 다시 한번 고민했다.

        

       그래, 이 아이들은, 적어도 나를 확실하게 걱정하고 있는 것……같다.

        

       사실 확신은 못 한다. 전부 연기일지도 모르니까. 어머님도, 사실은 나의 돈을 노리고 움직였잖아.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것도 전부 거짓말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이 아이들의 눈물도 거짓일 거라고, 나는 단정했다. 나의 이성이 그렇게 판단하라고 시켰다. 이런 상황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옆에서 눈물을 흘려주고, 한 명은 심지어 겁먹어서 말조차 걸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나의 감정이, 고개를 도리질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거다.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걱정해주고,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나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다.

        

       ……나는 이 상황을, 평생 처음 겪어보았다. 적어도 내 기억에 있는 한에서는.

        

       그랬기에, 내 감정이 이렇게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이 상황을 즐겨보면 안 되겠느냐고.

        

       이성은 드디어 나의 감정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네가 썼던 그 글도 있었지,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 글.

        

       그래.

        

       —남들과 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런 글을 남겼던 것이, 기억에 있었다.

        

       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응, 괜찮아.”

        

       오랜만에 입을 열어,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웃어주지는 못했다. 어머님을 제외한 남들 앞에서는 웃어본 적이 별로 없다. 억지로 꾸며봐야 별로 예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웃어주지도 않았는데도, 내 양쪽에 있는 두 아이는 나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웃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울어주었다. 나를 위해서.

        

       내가 모르는 곳도 아닌, 바로 내 옆에서.

        

       나는 두 사람을 잘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것이 너무나 좋았다.

        

       어째서?

        

       나는 저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머님께서도 저런 표정을 보여준 적이 없다.

        

       지난 3개월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머리 한구석에, 작은 연기가 피어오르듯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알아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가능성을 떠올려 볼 수 있을 정도.

        

       가슴 깊숙한 곳,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정말로, 혹시.

        

       지난 3개월간, 내가 그렇게 바라던 일이 일어난 걸까?

        

       ……그래, 조금만.

        

       상대가 본색을 드러낼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어울려주자.

        

       가끔은 속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머님을 만날 때처럼.

        

       우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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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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