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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6

     

    휴고의 측정기를 손에 들고 나니 살짝 문제가 있었다.

     

    “시약지를 피부에 접촉시켜야 하는 방식이었지 아마.”

     

    권터의 팔다리가 울룩불룩대며 점점 거대해진다.

     

    4미터 정도까지 커져, 이제는 사람이라기보다 스톤 골렘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

     

    말을 잃고 괴성을 내지르는 모습이 맹수가 아닐까 생각됐다.

     

    저 손에 잡히면 내 머리통을 호두까기에 넣은 땅콩처럼 으스러트리겠어.

     

    이건 가까이 가면 죽겠는데.

     

    “그거, 갖다 대기만 하면 됩니까?”

     

    든든하게도 타냐가 권터를 방어하는 와중에도 틈을 타 물어왔다.

     

    “30초는 접촉시켜야 해.”

     

    “맡겨주시죠.”

     

    타냐가 내게서 측정기를 받아들고는 권터의 어깨 위로 높이 점프했다.

     

    ―카드드득!

     

    착지와 동시에 검으로 그의 몸체를 긁어내며 균형을 무너뜨린다.

     

    마치 춤을 추는 듯 몸놀림이 유려하다.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권터를 이리저리 피하며 근접전을 펼치는 타냐는, 사냥 중인 치타와도 같았다.

     

    “■■■!”

     

    타냐의 검이 궤적을 그릴 때마다 권터가 충격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검이라 절삭력이 없긴 해도 타냐의 예리한 검기가 담겼으니 뼛속까지 시리겠지.

     

    콰드득, 권터의 등 뒤에 올라탄 타냐가 검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그러기를 몇 초, 그녀의 신호에 맞춰 다른 기사들이 교대해 권터를 상대한다.

     

    권터의 등에서 높게 뛴 타냐가 거리를 벌리며 내 옆에 착지했다.

     

    카가각, 허리를 숙여 한 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감속한다. 장화가 돌멩이를 튕겨낸다.

     

    고양이 같네.

     

    “가져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타냐가 내게 측정기를 돌려줬다.

     

    “벌써? 측정기 쓰는 거 못 봤는데.”

     

    “눈이 느리시군요.”

     

    타냐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다시 전투로 돌아갔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

     

    “어디 보자.”

     

    주술의 잔여물을 빨아들인 측정기의 시약지는 검게 물들어 있었다.

     

    촘촘히 박힌 여러 종류의 보석이 반짝이며 색을 만들어냈다.

     

    “빨강에 녹색. 이건…”

     

    휴고의 설명서를 빠르게 훑는다.

     

    “[광폭화]의 주술. 생명력 흡수, 전환 계열. 등급은 상급.”

     

    마족이 자주 쓰던 스킬이었다.

    마왕군은 전황이 불리해지면 광폭화를 발동해서 부하들을 폭주시킨 일이 종종 있었다.

     

    전염되는 주술이라 위험하다.

     

    ‘권터의 힘은 생명력, 즉 수명을 원료로 하고 있어.’

     

    광폭화에 걸리면 짧은 시간 힘을 얻는 대가로 곧 목숨을 잃는다. 사악한 마족에게 그 정도는 평범한 일이었다.

     

    “여기까지 알았으면 충분해. 우선.”

     

    나는 한창 전투 중인 타냐와 기사를 향해 외쳤다.

     

    “권터의 저주는 전염된다! 전원, 그의 피부를 직접 만지지 마!”

     

    기사들의 힘찬 대답을 확인하고 제거 프로세스로 들어간다.

     

    짤그락.

     

    아뮬렛을 손에 들어 마나를 불어넣는다.

     

    스킬창에 [주문 : 저주 조종]이 활성화됐다.

     

    따로 주문을 시전할 필요도 없이, 아뮬렛이 내 의도를 읽어 절로 진을 구성했다.

     

    “역시 전설급 아티팩트야. 조예가 전혀 없는 주문을 쓸 수 있게 해 주다니.”

     

    팟, 손을 뻗어 주문의 대상을 잡는다.

     

    물론 노리는 것은 권터다.

     

    “저주 조종.”

     

    ―화악!

     

    내 손에서 여러 갈래로 발사된 마나가 선을 이으며 권터에게 직격했다.

     

    마나로 주문을 다룰 때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시모어가 가르쳐줬던 사용법을 생각하며 주먹을 쥔다.

     

    ―콰악!

     

    날뛰는 말을 제압하듯, 내 손에 쥐어진 마나의 밧줄이 고삐가 되어 권터를 구속했다.

     

    “■■■■!!”

     

    팔과 목이 감겨 움직임이 멈춘 권터가 크게 포효했다.

     

    풍압이 몰아치는 와중, 나는 그를 잠식한 주술을 멈추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여러 단계로 나뉜 메커니즘이야. 마나를 흡수, 변환, 확산하는 과정으로 짜여있네. 저주화한 주술의 위치는 전신 피부.’

     

    내게 붙잡힌 주술이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진다.

     

    ‘원천인 마나 흡수를 끊으면 돼.’

     

    저주에게 직접 명령하듯 밧줄을 당긴다.

     

    쿵, 쿵. 그때마다 권터가 더욱 거칠게 반응하며 발을 굴렀다.

     

    “선생님!”

     

    “조금만 기다려!”

     

    타냐의 긴박한 외침에 대답하며 팔을 틀어낸다.

     

    주술이 먹이를 먹지 못하도록 마력회로와의 연결을 잘라냈다.

     

    ―파아아앙!!

     

    그 반동으로 여태 쌓여가던 권터의 마나가 폭발하며 기사들을 튕겨냈다.

     

    “■■, ■■…!”

     

    권터가 힘을 잃으며 다리를 휘청였다.

     

    그의 피부에서 새어나온 마나가 불타며 옷을 찢고 갑옷을 녹여갔다.

     

    “마나 승화 현상이다. 위험하다, 가까이 가지 마라!”

     

    타냐의 외침에 기사들이 거리를 벌리며 경계태세로 전환했다.

     

    “이제 마무리야.”

     

    우리 안의 맹수를 억지로 끌어내는 기분이다. 저항이 상당히 심하다.

     

    “역시 상급인가…!”

     

    등급이 높다 보니 버티는 힘이 강력했다.

     

    그래도 분리는 순조롭다.

     

    내 마나의 밧줄은 검은 형체만을 구속해 끌어낸다.

     

    이놈만 붙잡으면…

     

    “쿨럭.”

     

    무리해서 마나를 썼기 때문일까, 기침과 함께 피가 살짝 흘러나왔다.

     

    “괜찮아.”

     

    아직 체력 여유는 있다. 버틸 만했다.

     

     

    그런데 그 순간.

     

     

    [No. 101 : 마력폭주 7% → 85%]

     

     

    “뭐야?”

     

    시스템창의 알림에 깜짝 놀랐다.

     

    즉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셀라가 권터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황녀님!”

     

    나는 주문을 거두고 그녀를 따라 뛰었다.

     

     

     

    ***

     

     

     

    아셀라가 보기에 권터를 제압하는 라스는 너무나도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의 몸이 약해져 있단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 초조해진다.

     

    권터를 저렇게 만든 저주인지 주술인지를 뜯어내느라 라스는 온갖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폭풍 때문에 중갑이 벗겨지고 몸에 상처가 나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라스!”

     

    아셀라의 외침을 듣지 못한 채 라스가 밧줄을 끌어당긴다.

     

    그럴 때마다 권터의 몸에서 발생하는 열기도 점점 높아진다.

     

    ‘마나 승화 현상이야.’

     

    마나를 과도하게 압축한 상태에서 시전하던 주문을 갑자기 중단하면 발생한다.

     

    주문의 동력이었어야 할 마나는 갈 곳을 잃고 불타 허공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 열기가 어마어마하기에 가까이 갔다간 몸이 녹아버리고 만다.

     

    ‘잠깐만.’

     

    아셀라가 위험을 눈치챘다.

     

    권터가 가슴팍에 장식한 가넷 브로치.

     

    금장식이 열기에 녹아 망가지고 있었다.

     

    아셀라가 다시금 라스를 돌아봤다. 그는 저 브로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당장 자신을 낫게 해줄 수 있단 사실도 모를 터였다.

     

    그때였다.

     

    “쿨럭!”

     

    라스의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렀다.

     

    그것을 본 아셀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입술을 깨물었다.

     

    저 브로치마저 없으면 험하게 몸을 굴리는 라스는 금방 자멸할 것이 틀림없다.

     

    천리안에서 봤던 것처럼 죽음으로 대가를 맞으리라.

     

    ‘그렇겐 안 돼.’

     

    각오를 굳힌 아셀라는 더 망설이지 않고 권터를 향해 뛰어들었다.

     

    “황녀님!”

     

    그제야 라스가 자신을 급히 불렀지만 그녀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권터에게 다가가니 뜨거운 열기가 그녀를 태우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이 정도 쯤이야…!’

     

    갈기갈기 찢기고 열기에 눌러붙은 상의 가슴팍, 브로치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아셀라는 손을 뻗어 그것을 쥐어뜯을 기세로 콱 잡아냈다.

     

    ―치이익!

     

    “윽.”

     

    손이 화상을 입어 구워지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화아악!

     

    피부에 스며들어있던 주술이 방향을 바꿔 아셀라를 향해 침범해왔다.

     

    맨손으로 그와 접촉했기 때문에 주술이 전염될 틈을 찾아낸 것이었다.

     

    “아윽…!”

     

    새카만 덩어리가 팔을 타고 올라온다.

     

    기분이 나쁘다.

     

    “황녀님!!”

     

    아셀라는 자신의 허리에 둘러지는 팔의 감촉을 느꼈다.

     

    라스가 그녀의 어깨를 격하게 잡아당겼다.

     

    ―쿵!

     

    두 사람이 한 덩어리로 엮이면서 흙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온갖 고통이 스며드는 와중에도 아셀라는 자신의 손안을 먼저 확인했다.

     

    절대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각오가 보이듯, 브로치를 꽉 쥐고 있다.

     

    ‘안 망가졌어.’

     

    생명력을 뿜어내는 브로치의 효과가 느껴졌다. 아셀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읏….”

     

    그녀는 뇌간을 때리는 통증에 간신히 비명을 참아냈다.

     

    화상을 입은 손끝이 시뻘겋게 벗겨졌다.

     

    그 손의 위쪽, 팔을 타고 주술의 잔해가 기어 올라온다.

     

    자신을 감염시킬 생각이다.

     

    “황녀님, 조금만 참으세요.”

     

    그녀 앞에 무릎 꿇은 라스가 즉시 아뮬렛으로 주문을 시전했다.

     

    아셀라의 팔에 늘러 붙은 주술을 조종해 떼어낸다.

     

    수통을 꺼내 찬물로 그녀의 손을 식히는 것도 동시였다.

     

    “라스.”

     

    “말은 나중에 하세요. 나중에 혼낼 거예요.”

     

    “저건 안 고치게?”

     

    아셀라는 라스의 등 뒤에서 점점 거대해지고 있는 권터를 향해 턱짓했다.

     

    라스가 저주 조종 주문을 멈추고 아셀라에게 달려온 덕분에 다시 주술이 그를 잠식해 폭주하고 있었다.

     

    그를 저지하려 이리저리 뛰는 기사들도 보였다.

     

    “환자가 생기면 늘 바로 달려가면서.”

     

    아셀라가 조금은 서운한 감정을 쏟아냈다.

     

    사실 라스는 내가 아니라 환자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직업정신이 투철했으니까.

     

    “황녀님이 우선이죠. 주술을 제거하고 화상 치료부터 하겠습니다.”

     

    라스의 단호한 대답에 아셀라는 어쩐지 조금 기뻐졌다.

     

    “왜 내가 먼전데?”

     

    이유는 잘 알지만, 아셀라는 그 기쁨을 더 즐기고 싶어서 굳이 한 번 더 질문했다.

     

    라스는 아셀라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즉답했다.

     

    “저는 황녀님의 주치의잖아요.”

     

    손과 함께 심장도 열기에 노출된 게 아닐까. 아셀라는 착각이 들었다.

     

    본능에 행동을 맡기듯, 라스를 향해 브로치를 내밀었다.

     

    “네 거야.”

     

    “제게 주신다고요? 설마 이것 때문에…”

     

    라스가 아셀라의 행동을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브로치를 받았다.

     

    그가 아셀라의 손에 거즈를 감았다.

     

    “다행히 그리 심하진 않아요. 1도 화상입니다. 초동 처치 완료하고 드레싱 끝냈어요. 집중 치료는 잠시 후에 이어가겠습니다.”

     

    “공자, 너는?”

     

    라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완전히 새카매져 폭발하기 직전인 권터를 향해 돌아섰다.

     

    “담당 환자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보죠.”

     

    라스의 주문이 이어진다.

     

    새하얀 마나의 밧줄이 다시 권터를 붙잡고, 주술을 끌어낸다.

     

    마침내 새까만 덩어리가 그의 몸에서 떨어지고.

     

    ―콰아앙!!

     

    권터의 마나가 폭발하며 발생한 빛이 아셀라의 눈을 아플 정도로 찔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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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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