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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6

       “요, 요나? 어디 갔어?!”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다 말고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는 베니.

       

       그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쉿! 은신 중.”

       

       “흐읍!”

       

       이런 상황에도 귀가 간지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몸을 움찔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베니.

       

       다만, 눈앞의 상대에게서 빈틈을 보인다는 안 된다는 생각 정도는 있는 걸까.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간지러움에 몸을 떠는 것만큼은 막아냈다.

       

       그 모습이 마치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애써 내리누르는 것처럼도 보이는데…나만 그리 생각한 건 아닌지 모르가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이런. 네 손으로 죽여놓고 나를 탓하는 게냐? 힘으로 공간을 찢고 나온 주제에 그 어린 것이 무사하기를 바라였고? 우습구나. 그러게 내 경고하지 않았나. 네년은 마법사가 아니라고.”

       

       음침하게 웃어댄 모르가나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나무를 깎고 황금으로 장식한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스태프. 끄트머리에 달린 투명한 보석은 다각도로 컷팅되어 화려한 광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스태프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으나, 이제 보니 스태프만 화려한 게 아니었다.

       

       몸에 걸친 로브는 하얀 바탕에 금색 수실을 놓은 전통적이지만 화려한 마법사 로브였다.

       

       다만 뭔지 몰라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재질과,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희미하지만 빼곡히 들어찬 마법진을 보아 이 또한 평범한 물건은 아닌 듯하다.

       

       일전에 리디아에게 들은 적 있었지. 마탑에서 파는 물건은 비싸기도 비싸지만, 돈으로도 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그리고 그게 진짜라고 했던가.

       

       즉, 시중에 풀린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아티팩트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리디아의 비키니 아머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방어 인챈트가 걸려있겠지.

       

       함부로 확신은 할 수 없지만, 판 대륙에서 저 나이 먹고, 저만한 지위에 오른 여자가 처녀일 확률은 낮겠지.

       

       일단 유니콘 단검을 꽂아 넣기만 하면 치명상을 줄 수 있으리라. 그래. 꽂아 넣을 수만 있으면. 높은 확률로 막히겠지만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어떻게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없을까 고민하는 사이. 베니가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뒈지면 너도 마법사가 아니게 되겠지! 샤도우! 저 빌어먹을 년을 먹어 치워!”

       

       -크허엉!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건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몸을 던지는 샤도우.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모르가나의 로브가 빛나며 주변에 반투명한 역장을 형성해 낸다.

       

       이에 막힌 샤도우가 철푸덕 소리를 내며 유리구슬에 부딪힌 진흙처럼 구체 모양으로 허공에 넓게 퍼진다.

       

       쉴 새 없이 들려오는 까드득 거리는 소리. 몸체 전반을 가득 채울 정도로 늘어난 날카로운 이빨이 모르가나의 실드를 깎아 먹는 소리이리라.

       

       다만, 내가 아는 평범한 이빨 소리가 아니다. 용골이 뒤틀리는 듯한 불길한 굉음이었지.

       

       소음과 샤도우의 몸으로 모르가나의 눈과 귀를 막은 베니가 다급히 속삭였다.

       

       “도망쳐!”

       

       “…네?”

       

       “요나 네가 끼어들 싸움이 아니야! 진짜로 잘못 휘말리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당장 여기서 도망쳐!”

       

       “베니를 두고 어떻게 도망쳐요. 분명 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방해야! 어디 있는지도 모를 요나를 신경 쓰느라 전력을 다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나는 리디아에게 네 안전을 부탁받았거든?”

       

       모르가나 쪽을 노려보며 그리 말하는 베니. 다만 꾹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이거 그건가.

       

       위험하니까 도망치랬더니, 죽어도 안 가서 결국 같이 위험해지는 히로인.

       

       내가 이런 입장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던 터라 순간 멈칫한 사이. 대답이 없는 것을 무어라 생각한 건지 베니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냥 가라는 게 아니야. 가서 엘리 언니를 불러와. 요나 네가 길은 잘 찾잖아?”

       

       “하지만 베니. 방금 전에 큰 마법을 연달아 쓰며 많이 지쳤잖아요. 괜찮은 거예요?”

       

       “당연하지.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마녀 모자를 푹 눌러쓴 베니. 그 사이로 삐져나온 보라색 머리카락이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 위로 떨어져 내린다.

       

       하트 모양이 그려진 눈동자만이 그림자 속에서 서늘하게 반짝였다.

       

       “이겨.”

       

       그 한마디가 주문이 되어 베니의 몸을 휘감는다. 황금색 광채를 뒤집어쓴 베니는 마치 이 공간의 중심인 것처럼 강한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었는데….

       

       왜일까. 광오할 터인 선언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불길함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였다.

       

       “…알겠어요. 금방 다녀올 테니 꼭 버티고 계세요.”

       

       알았으니 빨리 가라는 듯, 대답 대신 손을 휘적이는 베니.

       

       어찌됐건 위험한 건 사실이니 일단 거리를 벌렸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된 걸까. 뒤에서 요란한 폭음과 진동이 느껴진다.

       

       특이하게도 중간중간에 본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괴성과 충격. 재생과 일시 정지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에 그제야 모르가나의 전공을 떠올렸다.

       

       공간 마법이 모종의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하리라.

       

       일부러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베니의 말대로 오로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에 집중하기 위하여.

       

       그렇게 점점 등 뒤에서 들여오는 전투의 여파도, 베니의 욕지거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어?”

       

       문득.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던 불안함이 불길처럼 번지며 전신으로 뻗어 나간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 머릿속이 그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어느새 한가지 형태를 이루었다.

       

       “큭!”

       

       짤막한 두통과 함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미지.

       

       투명한 검에 베인 것처럼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조각조각 베이는 나.

       

       사지를 절단당했음에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베니와, 그런 그녀를 향해 구슬프게 울부짖는 샤도우.

       

       미쳐 날뛰는 베니를 닮은 샤도우인지, 샤도우를 닮은 베니인지 모를 괴물.

       

       젊어진 모르가나가 자신의 피부를 보며 환희하다가, 살갗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그 위로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돋아나는 장면.

       

       심장이 비어있는 베니의 시체 앞에서 입술을 짓씹고 있는 나와 엘리.

       

       그 외에도 온갖 끔찍한 장면이 뇌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실제 흐른 시간은 기껏해야 몇 초. 하지만 체감상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던 환각이 드디어 끝나고 흙으로 둘러싸인 통로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진 머리. 잔뜩 지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이 하나둘 기억에서 사라지며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한다.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자 남는 것은 끔찍한 것을 보았다는 감상뿐, 자세한 기억은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내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이게 무슨….”

       

       혼란스러운 마음에 벽에 한 손을 짚으며 머리를 감쌌다. 잔불처럼 밑바닥에 눌어붙은 불안감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무언가 일어났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그리고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후우.”

       

       깊게 심호흡하며 잠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있으면 베니가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있어도 끼어들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뭔지는 몰라도 좆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에라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라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불안감과 기시감이 갑자기 왜 지금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것도 무슨 마법인가? 세뇌어플…아니, 정신 계열 마법 같은 걸로 목격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그런 건가?

       

       답답함은 분노로 치환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손은 괜시리 주머니를 뒤져본다.

       

       당연한 말이지만 잡히는 것은 없다. 간단한 간식거리, 샤도우가 선물로 준 매끈한 돌, 그리고 언제든 장전할 수 있게 꺼내둔 석궁 화살 정도.

       

       아공간 반지를 얻은 이후로 중요한 건 전부 아공간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공간까지 뒤적이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몰캉.

       

       “……어어?”

       

       손에 잡히는 부드러운 감각. 마치 사람의 살을 만지는 듯한 말랑함의 정체는 하나뿐이다.

       

       풀돌 여신상.

       

       헌데,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조금 이상하다. 평소처럼 이쪽을 끌어안듯 살짝 팔을 벌린 자세가 아니다.

       

       뭔가 싶어 꺼내 보자, 기도하듯 양손을 가슴께 앞에서 모으고 있는 여신상.

       

       뭐지. 간절한 기도 메타로 가챠라도 돌리라는 것인가.

       

       하지만 지금껏 캔 마석은 전부 샤도우에게 있다.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건 비상금으로 신발 밑창에 넣어둔 1실버 뿐. 

       

       혹시나 싶어 단챠를 돌려보았다.

       

       띠링!

       

       [1성: 잘 말린 마력초]

       

       “아잇!”

       

       이건 아닌가 보다.

       

       그럼 대체 저 기도는 대체…….

       

       마력초를 우물거리며 고민하던 것도 잠시. 내가 그동안 잘 사용하지 않던 여신상의 기능이 그제야 떠올랐다.

       

       풀돌하며 성물이 된 여신상에 기도를 올리면 미니 성역을 구축할 수 있다.

       

       본래라면 기껏해야 신체 능력과 재생능력을 한층 끌어올리는 게 전부지만……이곳은 미궁이다.

       

       사랑의 여신이 스스로를 희생해 틀어박힌 신들의 무덤이며, 뒤엉킨 시공간에 규칙을 부여해 만든 존재할 리 없는 장소.

       

       그리고 모르가나는 공간 마법을 주력으로 삼는 녀석이다.

       

       “아하?”

       

       여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에휴. 좀 쉽게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투덜거리면서 왔던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불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우린 그걸 계시라고 부르기로 햇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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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6

EP.106





       “요, 요나? 어디 갔어?!”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다 말고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는 베니.


       


       그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쉿! 은신 중.”


       


       “흐읍!”


       


       이런 상황에도 귀가 간지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몸을 움찔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베니.


       


       다만, 눈앞의 상대에게서 빈틈을 보인다는 안 된다는 생각 정도는 있는 걸까.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간지러움에 몸을 떠는 것만큼은 막아냈다.


       


       그 모습이 마치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애써 내리누르는 것처럼도 보이는데…나만 그리 생각한 건 아닌지 모르가나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이런. 네 손으로 죽여놓고 나를 탓하는 게냐? 힘으로 공간을 찢고 나온 주제에 그 어린 것이 무사하기를 바라였고? 우습구나. 그러게 내 경고하지 않았나. 네년은 마법사가 아니라고.”


       


       음침하게 웃어댄 모르가나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나무를 깎고 황금으로 장식한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스태프. 끄트머리에 달린 투명한 보석은 다각도로 컷팅되어 화려한 광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스태프에 순간 시선을 빼앗겼으나, 이제 보니 스태프만 화려한 게 아니었다.


       


       몸에 걸친 로브는 하얀 바탕에 금색 수실을 놓은 전통적이지만 화려한 마법사 로브였다.


       


       다만 뭔지 몰라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재질과,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희미하지만 빼곡히 들어찬 마법진을 보아 이 또한 평범한 물건은 아닌 듯하다.


       


       일전에 리디아에게 들은 적 있었지. 마탑에서 파는 물건은 비싸기도 비싸지만, 돈으로도 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그리고 그게 진짜라고 했던가.


       


       즉, 시중에 풀린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아티팩트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리디아의 비키니 아머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방어 인챈트가 걸려있겠지.


       


       함부로 확신은 할 수 없지만, 판 대륙에서 저 나이 먹고, 저만한 지위에 오른 여자가 처녀일 확률은 낮겠지.


       


       일단 유니콘 단검을 꽂아 넣기만 하면 치명상을 줄 수 있으리라. 그래. 꽂아 넣을 수만 있으면. 높은 확률로 막히겠지만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어떻게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없을까 고민하는 사이. 베니가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뒈지면 너도 마법사가 아니게 되겠지! 샤도우! 저 빌어먹을 년을 먹어 치워!”


       


       -크허엉!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건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몸을 던지는 샤도우.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모르가나의 로브가 빛나며 주변에 반투명한 역장을 형성해 낸다.


       


       이에 막힌 샤도우가 철푸덕 소리를 내며 유리구슬에 부딪힌 진흙처럼 구체 모양으로 허공에 넓게 퍼진다.


       


       쉴 새 없이 들려오는 까드득 거리는 소리. 몸체 전반을 가득 채울 정도로 늘어난 날카로운 이빨이 모르가나의 실드를 깎아 먹는 소리이리라.


       


       다만, 내가 아는 평범한 이빨 소리가 아니다. 용골이 뒤틀리는 듯한 불길한 굉음이었지.


       


       소음과 샤도우의 몸으로 모르가나의 눈과 귀를 막은 베니가 다급히 속삭였다.


       


       “도망쳐!”


       


       “…네?”


       


       “요나 네가 끼어들 싸움이 아니야! 진짜로 잘못 휘말리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당장 여기서 도망쳐!”


       


       “베니를 두고 어떻게 도망쳐요. 분명 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방해야! 어디 있는지도 모를 요나를 신경 쓰느라 전력을 다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나는 리디아에게 네 안전을 부탁받았거든?”


       


       모르가나 쪽을 노려보며 그리 말하는 베니. 다만 꾹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이거 그건가.


       


       위험하니까 도망치랬더니, 죽어도 안 가서 결국 같이 위험해지는 히로인.


       


       내가 이런 입장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던 터라 순간 멈칫한 사이. 대답이 없는 것을 무어라 생각한 건지 베니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냥 가라는 게 아니야. 가서 엘리 언니를 불러와. 요나 네가 길은 잘 찾잖아?”


       


       “하지만 베니. 방금 전에 큰 마법을 연달아 쓰며 많이 지쳤잖아요. 괜찮은 거예요?”


       


       “당연하지.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마녀 모자를 푹 눌러쓴 베니. 그 사이로 삐져나온 보라색 머리카락이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 위로 떨어져 내린다.


       


       하트 모양이 그려진 눈동자만이 그림자 속에서 서늘하게 반짝였다.


       


       “이겨.”


       


       그 한마디가 주문이 되어 베니의 몸을 휘감는다. 황금색 광채를 뒤집어쓴 베니는 마치 이 공간의 중심인 것처럼 강한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었는데….


       


       왜일까. 광오할 터인 선언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불길함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였다.


       


       “…알겠어요. 금방 다녀올 테니 꼭 버티고 계세요.”


       


       알았으니 빨리 가라는 듯, 대답 대신 손을 휘적이는 베니.


       


       어찌됐건 위험한 건 사실이니 일단 거리를 벌렸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된 걸까. 뒤에서 요란한 폭음과 진동이 느껴진다.


       


       특이하게도 중간중간에 본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괴성과 충격. 재생과 일시 정지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에 그제야 모르가나의 전공을 떠올렸다.


       


       공간 마법이 모종의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하리라.


       


       일부러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베니의 말대로 오로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에 집중하기 위하여.


       


       그렇게 점점 등 뒤에서 들여오는 전투의 여파도, 베니의 욕지거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어?”


       


       문득.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던 불안함이 불길처럼 번지며 전신으로 뻗어 나간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 머릿속이 그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어느새 한가지 형태를 이루었다.


       


       “큭!”


       


       짤막한 두통과 함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미지.


       


       투명한 검에 베인 것처럼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조각조각 베이는 나.


       


       사지를 절단당했음에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베니와, 그런 그녀를 향해 구슬프게 울부짖는 샤도우.


       


       미쳐 날뛰는 베니를 닮은 샤도우인지, 샤도우를 닮은 베니인지 모를 괴물.


       


       젊어진 모르가나가 자신의 피부를 보며 환희하다가, 살갗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그 위로 무수히 많은 눈동자가 돋아나는 장면.


       


       심장이 비어있는 베니의 시체 앞에서 입술을 짓씹고 있는 나와 엘리.


       


       그 외에도 온갖 끔찍한 장면이 뇌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실제 흐른 시간은 기껏해야 몇 초. 하지만 체감상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던 환각이 드디어 끝나고 흙으로 둘러싸인 통로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진 머리. 잔뜩 지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이 하나둘 기억에서 사라지며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한다.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자 남는 것은 끔찍한 것을 보았다는 감상뿐, 자세한 기억은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내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이게 무슨….”


       


       혼란스러운 마음에 벽에 한 손을 짚으며 머리를 감쌌다. 잔불처럼 밑바닥에 눌어붙은 불안감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무언가 일어났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그리고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후우.”


       


       깊게 심호흡하며 잠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있으면 베니가 제대로 싸울 수 없다, 있어도 끼어들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뭔지는 몰라도 좆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에라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라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불안감과 기시감이 갑자기 왜 지금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것도 무슨 마법인가? 세뇌어플…아니, 정신 계열 마법 같은 걸로 목격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그런 건가?


       


       답답함은 분노로 치환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손은 괜시리 주머니를 뒤져본다.


       


       당연한 말이지만 잡히는 것은 없다. 간단한 간식거리, 샤도우가 선물로 준 매끈한 돌, 그리고 언제든 장전할 수 있게 꺼내둔 석궁 화살 정도.


       


       아공간 반지를 얻은 이후로 중요한 건 전부 아공간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공간까지 뒤적이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몰캉.


       


       “……어어?”


       


       손에 잡히는 부드러운 감각. 마치 사람의 살을 만지는 듯한 말랑함의 정체는 하나뿐이다.


       


       풀돌 여신상.


       


       헌데,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조금 이상하다. 평소처럼 이쪽을 끌어안듯 살짝 팔을 벌린 자세가 아니다.


       


       뭔가 싶어 꺼내 보자, 기도하듯 양손을 가슴께 앞에서 모으고 있는 여신상.


       


       뭐지. 간절한 기도 메타로 가챠라도 돌리라는 것인가.


       


       하지만 지금껏 캔 마석은 전부 샤도우에게 있다.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건 비상금으로 신발 밑창에 넣어둔 1실버 뿐. 


       


       혹시나 싶어 단챠를 돌려보았다.


       


       띠링!


       


       [1성: 잘 말린 마력초]


       


       “아잇!”


       


       이건 아닌가 보다.


       


       그럼 대체 저 기도는 대체…….


       


       마력초를 우물거리며 고민하던 것도 잠시. 내가 그동안 잘 사용하지 않던 여신상의 기능이 그제야 떠올랐다.


       


       풀돌하며 성물이 된 여신상에 기도를 올리면 미니 성역을 구축할 수 있다.


       


       본래라면 기껏해야 신체 능력과 재생능력을 한층 끌어올리는 게 전부지만……이곳은 미궁이다.


       


       사랑의 여신이 스스로를 희생해 틀어박힌 신들의 무덤이며, 뒤엉킨 시공간에 규칙을 부여해 만든 존재할 리 없는 장소.


       


       그리고 모르가나는 공간 마법을 주력으로 삼는 녀석이다.


       


       “아하?”


       


       여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에휴. 좀 쉽게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투덜거리면서 왔던 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불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우린 그걸 계시라고 부르기로 햇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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