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한번 살벌하네.”
내 꿈이라기엔 오크샤먼의 기억이 나에게 보이는 듯했다.
넓은 평원을 가득 채운 오크들.
그리고 수많은 언데드들.
아까 봤던 영혼의 모습을 한 오크가 중심에 서 있었다.
“오크들이여! 적과 싸워라! 투쟁하라! 모든 걸 짓밟아라!”
거센 포효를 흘리는 오크들은 지금과는 사뭇다른 모습이었다.
온몸에 가득한 상처와 흉터.
범상치 않은 눈빛.
정광이 흘러나오는 것이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싸움꾼들을 연상케했다.
“샤먼들이여! 신성한 불꽃을 피워올려라!”
굴락이 보여줬던 것과는 다른 주술.
저것이 원형일 것이다.
지금의 굴락이 하는 것은 나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을 테니까.
오크들이 주문을 외우고 평원에 살기와 광기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많이 다르네.”
기절하기 전에 오크들이 보여 준것은 날것의 느낌.
지금 보이는 것은 훨씬 더 정돈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오크들이 이성을 완전히 잃지 않고 투지를 즐기는 모습.
이내, 내가아는 영혼의 모습을 한 오크샤먼이 나직이 읊조렸다.
“오크들은 이곳에서 모두 죽는다.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군.”
뒤에 있는 샤먼들을 보고도.
“샤먼들도 모두 죽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전쟁이 빠른 속도로 흘러 갔다.
언데드를 상대로 우세를 보이던 오크들도 지치지 않는 그들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이미 수도 없이 전쟁을 치른 듯한 오크들.
그들은 지쳐 있었고,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는 듯했다.
“싸워라! 죽어도 명예를 지켜라!”
처음 굴락을 만났을 때 말했다.
오크는 명예를 안다고.
그런데 그것이 정말일 줄이야.
오크들은 싸우면서 사지가 찢길지언정 투지를 놓치지 않았다.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 움직이는 것.
그리고 그때.
꿈을꾸는 나에게도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한 어두움이 휘몰아쳤다.
내꿈이지만 이건 악몽과 흉몽이 분명하다고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저게 도대체 뭐야? 악귀야? 마귀야?”
생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영혼이 너무나 어두웠다.
사람이 광기와 원한에 타락한 것이 아니라 온갖 원한들이 몸을 가지고 태어난 모습.
“저게 마족이구나.”
그들이 등장하자 오크들이 허무하게 쓰러져 나갔다.
샤먼들이 움직이며 주술로 대항했지만 무언가에 막혀서 부서지고 있었다.
어두운 마나를 쓰는 마법.
그것은 단 하나의 존재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낡은.
아니, 썩었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넝마가 된 로브를 걸치고 있는 존재.
사람의 이목구비를 가졌으나, 생기를 가진 살은 없고 뼈와 가죽이 들러붙은 존재.
“망자도 아니고, 생자도 아닌데?”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느낌이었다.
해골에 사람 가죽을 입혀놓으면 저런 모습이리라.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언데드 중에 저런 모습을 한 존재가 있다고.
“리치…”
존재감이 굉장했다.
영혼의 크기마저 컸다.
클로셀 영감님과 파라몬 영감님을 합쳐도 한참이나 부족할 정도로.
“저런 게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마족처럼 어두웠으며, 오크보다 광기가 뚜렷했다.
주술들이 모두 무너졌고, 언데드가 미쳐 날뛰었다.
오크들이 쓰러지고 샤먼조차 몇 남지 않은 그때.
한곳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빛의 느낌이 루나와 비슷했으니까.
“성자…?”
윤기가 흐르는 은발.
그리고 손에 움켜쥔 내가 작두로 쓰고 있는 성검.
전장을 주시하는 황금색의 눈동자.
“눈이 있어?”
대대로 성녀와 성자는 육체의 눈을 잃었다고 했다.
신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라 했었던가.
막상 샤먼의 영혼이 보여 준 장면은 전혀 달랐다.
성자와 눈빛을 주고받는 오크샤먼.
성자가 뭐라 말하는 것이 보였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촉이 왔다.
저걸 들어야 한다는 걸.
그리고 저 리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나의 촉인 것 같기도, 영혼이 보내는 메시지인 것 같기도 했다.
순간, 꿈속의 장면이 변하기 시작했다.
겹겹이 쌓인 오크의 시체들.
그 위에 서 있는 샤먼의 영혼.
내가 기절하기 전보다 상태가 안 좋아진 모습이었다.
낡고 지쳐 있던 영혼이 상처를 입은 모습.
– …리는가?
“….?”
– 들….가?
처음일 것이다.
이곳에 와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영혼을 만난 것이.
꿈에서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게 오크라는 점만 빼면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았으니까.
“들려! 더 말해 봐!”
– …랍군…. 혼의…리를…듣다니!
영혼이 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놀라운 듯 주변을 훑어보기까지 했다.
– …을….담는…릇인가?
샤먼과 대화를 하려는 찰나, 녀석이 돌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를 보고 있지만 미묘하게 어긋난 시선.
어깨와 머리를 오가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고 있었다.
– ….!!!
천적을 앞에둔 초식동물이 저런 반응을 보이지 싶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젖어 있는 눈동자.
언데드의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던 눈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왜 이래? 어깨? 머리?”
오래묵은 영혼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이유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 내 어깨와 머리를 보고 떠는 것이라면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어깨와 머리 위는 신령님이 내려앉는 장소다.
흔히 머리 위에 앉아 있다 혹은 잡귀가 어깨에 앉아 있다라고 말하는 곳.
– ….치지 않는다! …안하다!
샤먼의 영혼이 바닥으로 넙죽 엎드렸다.
꾸짖음을 당한 듯 벌벌떠는 녀석.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잘못을 비는 모습.
– 성…가 아닌데 왜…!
억울한 듯 외치는 녀석의 목소리가 뜨문뜨문 이어졌다.
– 정말…다! 해치..않…다!
영혼이 하는 말과 행동에 지금의 상황이 짐작이 갔다.
나는 신가물이다.
그것도 말도 안될 정도로 무당이 될 팔자를 타고난.
신을 담는 그릇안에 들어온 영혼이 만날 신령님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주술적인 방법으로 침범한 것에 가깝지 않은가.
“할머니 화나신 건가?”
***
쉬이이익 –
세 사람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클로셀과 파라몬, 그리고 드잔트.
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하늘을 돌파하는 중이었다.
“라몬, 자네 저런 것을 본적이 있는가?”
“처음 보는군.”
“드잔트, 자네는?”
“오크가 저런 짓을 한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클로셀이 기가차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땟목을 타고 바다를 횡단하는 오크라니.
어이가 없을지경이었다.
클로셀이 딱딱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는 파라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가 있는 곳이 여기가 확실한 것인가?”
“그러네.”
클로셀의 눈이 슬픔에 젖어 들었다.
평생을 함께한 친우.
겨우 웃음을 찾았던 친우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크리스가 사라졌다는 걸 안 직후부터 저런 상태였다.
드잔트도 그것을 알아챈듯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제야 익숙한 얼굴이 되었군.”
“쓸데없는 소리.”
“어째 네놈은 인간인 주제에 그런 얼굴이 더 어울리는 것이냐.”
드잔트의 핀잔에도 파라몬은 줄곧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을 꽉잡은 손.
온몸이 당장이라고 검을 뽑을 듯 날카로운 기세를 흘리고 있었다.
“라몬, 진정하시게. 크리스에게 별일이 없을 거라는 걸 잘 알지 않는가?”
분명 파라몬 역시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클로셀의 생각이었다.
애초에 파라몬이 미소를 되찾은 것은 크리스의 영향이었으므로.
“….”
“신이 돕는 사람일세. 성녀와 세레나양이 함께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걸세.”
클로셀이 마나를 있는 힘껏 움직였다.
아무래도 친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억제하는 듯했지만 흘러나오는 살기.
마치, 대륙전쟁 시절에 동료를 잃었을 때와 비슷했다.
‘라몬, 어찌하여 또….’
크리스가 사라진 직후에는 이렇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걸어놓은 마법의 위치를 발견하고 찾아가기 시작했을 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크리스를 찾아 날아가는 거리가 길어질 수록 파라몬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얼어 붙었다.
“로셀, 세레나양에게서 연락은 아직인가?”
클로셀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파라몬과 같았다.
세레나도 그저 크리스에게만 따듯할 뿐.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증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할 만큼 차가웠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랄까.
“연락해도 받지를 않네.”
“….”
“별일 없을 것이네.”
클로셀의 말과는 별개로 비행 속도는 더 빨라져만 갔다.
밑에서 노를 젓는 오크들이 순식간에 사라져갈 정도로.
“안개로군. 말도 안 될 정도로 짙은 안개일세.”
클로셀이 주위를 훑었지만 마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말은 네크로맨서들의 장난질은 아니라는 말.
“들어가겠네.
이윽고, 사라지는 안개.
그들이 본 것은 커다란 안개였다.
세 사람이 날아가는 섬안에서 충격적인 광경이 보였다.
그들에게만 보이는 풍경.
“로셀.”
“….”
파라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흘러나오는 강한 살기.
당장에라도 무언가를 베어낼 것만 같은 날카로운 예기.
드잔트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란 결국 변하지 않는 모양이군.”
“이보게 드잔트, 라몬도 변해서 이렇게 된 것이라네.”
파라몬이 살기를 흘리는 이유가 있었다.
인간을 벗어난 감각을 가진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충격적인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
창백한 얼굴을 한 크리스였다.
그것뿐이겠는가, 주위를 둘러싼 오크와 제국 북부의 정상에서 보았던 푸른 불길.
“내려주시게.”
세 사람이 내려앉은 곳에는 혼란스러운 반응이 이어졌다.
“인간! 침입이다!”
“죽여 없앤다!”
시뻘건 눈으로 날뛰는 오크들 중에 이성을 찾을 것은 굴락일 뿐.
굴락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모두 물러나라! 전부 죽는다!”
“취이익!”
“죽음의 예언이다! 죽어도 샤먼을 지킨다!”
파라몬과 클로셀이 쓰러져 있는 크리스를 향했다.
“….”
크리스의 옆에서 울고 있는 성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세레나.
흉폭한 기세를 흘리는 오크들.
파라몬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
“세레나양, 묻겠네.”
“….”
“크리스가 쓰러진 이유가 오크들 때문인가?”
세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다치지 않으니 걱정 말라 했어요.”
세레나의 대답이 나오는 순간.
오크들의 숨통을 조이던 살기도.
당장에라도 무언가를 베어낼 듯한 예기도 사라졌다.
굴락이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취이익…!”
스르릉 –
탁 –
다시 검집으로 모습을 숨기는 검.
파라몬이 입을 열었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허허, 또 그냥 기절한 것이로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