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길은 조용하네요.”
“오는 길에 겪은 게 있는데 당연히 그렇겠지.”
여기까지 오면서 쌓인 내 명성은 녹림도고 사파고 뭐고 죄다 설설 기게 할 정도가 되었으니. 게다가 내가 마스터가 된 이상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면 나와 싸울 엄두를 내지는 못할 터였다.
“은공이 초절정의 길에 들어섰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는 너도 그사이에 더 강해졌잖아.”
“나도 강해지긴 했는데에~두 사람이 그러니까 저만 서운하잖아요.”
이제 막 일류 중간쯤이 된 혜령이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셋 중에 가장 경지가 낮은 게 많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네 나이에 일류면 충분히 대단한 거야.”
“아저씨랑 저랑 몇 살 차이도 안 나거든요?”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할 말이 없네. 내가 나이 강조를 많이 하긴 했지.
내가 혜령이랑 나이 차이가 좀 났으면 그래도 이게 위로가 됐을 테지만, 나랑 혜령이의 나이는 채 두 살이 차이가 안 났으니 조금 기만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슬슬 야영할 곳이나 찾아보자.”
어린애처럼 볼 좀 그만 부풀리고. 나는 혜령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러 바람을 빼고는 눈에 오러를 담아 주변을 살폈다.
야영하기 좋은 곳이 어디 없을까.
가능하면 강물이 있어서 간단하게 씻을 수 있는 곳으로.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청력까지 강화하고 나서야 괜찮은 야영장소를 찾아냈다.
“저쪽으로 가자.”
“네에~”
“은공, 그쪽에 강가가 있습니까?”
“어.”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은데…역시 초절정에 오른 무인의 감각은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이 단모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말하면 좀 쑥스러운데.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갔다.
—————–
“누가 머문 흔적이 있는데.”
나는 야영지로 삼으려 했던 공터를 쓱 훑어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만 좋은 터는 아니었는지, 최근에 이곳에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은 인원이.
“…이 근처를 지나가는 상단 같은 게 아니었겠습니까? 이쪽에 바퀴 자국도 있으니…”
“떠난 지 꽤 된 거 같은데 괜찮지 않을까요?”
“문제는 없을 것 같네.”
못해도 이틀 정도는 된 것 같으니 우리와 엮일 일은 없을 터. 나는 그간의 사건들을 떠올리다 한숨을 쉬며 짐가방 속에서 야영 장비를 꺼냈다.
그래봤자 간단한 조리도구뿐이다마는.
“아저씨, 저는 물 떠올게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떠와라.”
“네에~”
“저는 장작으로 쓸만한 나뭇가지를 구해오겠습니다.”
“그래.”
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빠르게 야영준비를 시작했다. 어두운 밤을 따뜻하게 밝혀줄 모닥불과 앉기 좋은 곳에 돗자리, 그리고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 사 온 식자재 손질까지.
하루를 마치기 전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 돌아왔다.
“오늘은 뭘 해 먹을까…”
적당히 야채와 육포를 때려 박은 스프?
아니면 주변에 있는 동물을 잡아서 구워 먹기?
좀 귀찮긴 하지만 초절정이 된 신체 능력을 잘 활용하면 사냥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 지나가던 멧돼지를 잡아서 통구이를 해 먹는 것도 나쁘지 않고.
…멧돼지가 있을 경우에 말이지만.
나는 작은 칼을 꺼내 야채를 손질하며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혜령이와 목경이는 금방 돌아와 저녁 식사 준비를 거들기 시작했다.
“헤헤, 맛있는 냄새~”
“은공이 만드는 요리는 언제나 기대가 됩니다.”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지만 내가 만들면 다 타버리는걸요…”
“화력 조절을 안 해서 그래.”
중화요리가 화끈한 화력으로 하는 요리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 만들기에는 영 문제가 많거든.
물론 혜령이가 요리 실력이 썩 뛰어난 편은 아니라는 점이 크지만.
“그래도 불 조절은 어려운걸요!”
“은공처럼 모닥불을 세심하게 조절까지 하면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야영 요리에 그 정도 정성을 들이는 인간이 드물긴 하지. 오러를 써가면서까지 불 조절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내 동기였던 놈 중 하나가 쓰던 비법 같은 거였는데.
언제였더라, 죽기 전날쯤?
내가 전에 알려달라는 걸 떠올렸는지 나한테 방법을 알려주고 다음날 전투에서 낙마당한 상태로 온갖 병장기에 쑤셔서 죽었던가.
…우울해지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나는 국자로 냄비 속의 내용물을 휘휘 저으며 몸을 녹이고 있는 혜령이와 목경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피부색이 다르다 보니 불에 비친 둘의 모습은 상반된 느낌이었다.
창백한 인상의 목경이와 활발한 인상의 혜령이.
어느 쪽이건 한 미모하는 인간들이라, 눈 둘 곳이 없을 때 적당히 바라보는 걸로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멍하니 허공이나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낫지.
흠, 슬슬 다 됐나.
“그릇 줘.”
“네에~”
하루의 끝을 장식하는 저녁 식사 시간이 시작되었다.
————————-
“난 잠시 수련 좀 하고 오마.”
“아저씨…저,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돼요?”
“뭘?”
“검강이요!”
혜령이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검강이 그렇게 보고 싶은 건가? 검강이 뭐 별거라고.
아니다, 별거는 맞구나.
무림에서 검강을 쓸 수 있는 인간을 다 합해도 채 오십명이 안 될 테니.
새삼 내 경지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 체감이 되네. 내 위로 50명도 안 된다는 거 아니야.
원작에 나온 적들도 중반부 끝자락에서야 초절정에 도달한 놈들이 튀어나왔으니.
그러니 한동안은 큰 위기에 처하지는 않을 터였다.
“뭐 그 정도야.”
“은공, 혹시 저도…”
“따라와.”
“감사합니다. 은공.”
이쪽도 살짝 들뜬 목소리인 걸 보니 검강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야영지의 불이 꺼지지 않게 장작을 몇 개 더 넣어두고 강가로 향했다. 주변이 뻥 뚫린 강가가 수련하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강가 옆 공터에 우두커니 서서 검을 뽑아 들었다.
내 애병인 롱소드.
이 롱소드로 검기성강, 아니 오러블레이드를 펼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단장님이 봤다면 기뻐하셨을까.
그리운 과거를 뒤로 밀어두고 양손으로 검을 쥔다. 살짝 거친, 하지만 친숙한 감촉이 손바닥을 감싼다. 손잡이의 감촉을 느끼며 마나코어를 깨운다.
…근데 왜 마나코어지?
문득 든 의문에 오러를 뽑아내던 행동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러를 쓰는데 왜 오러 코어가 아닌 거지?
아무 생각 없이 쓰던 단어에 신경이 쏠리니 뭔가 기이함을 느낀다.
이것도 초절정의 힘인가.
“아저씨?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늘어난 내공에 적응 중이야.”
적당한 대답을 던지며 오러를 마나코어에서 뽑아낸다.
깨달음을 얻기 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오러가 마나코어의 통제를 벗어나자 내 몸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근육과 마나로드에 스며드는 오러의 양을 확인하고, 천천히 오러를 검에 덧씌웠다.
보다 선명해진 푸른 오러가 검을 감싼다.
검기 자체도 더 정교해졌군.
감탄하며 오러를 한층 더 덧씌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오러를 덧씌울 때마다, 검에 실린 오러의 크기가 불어난다. 못해도 네 척(120cm) 정도는 여유롭게 늘어나는 것을 보니, 작정하면 두 배 정도는 더 길게 만들 수 있을 법했다.
“흠…”
오러블레이드란 건 뭘까.
단장님도 ‘오러블레이드는 압도적인 파괴의 결정체다’정도로밖에 설명 안 해주셨으니 감이 안 잡히네.
나는 검에 맺힌 이글거리는 오러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마스터가 됐다고 해서 머릿속에 자동으로 오러블레이드 만드는 법 같은 게 떠오르지는 않으니까. 일단 생각해둔 방법으로 검강을 만들어내 볼까.
나는 눈을 감고 단장님의 오러블레이드를 떠올렸다. 칼날 위에 거대한 칼날을 덧씌운 듯한 오러블레이드를.
…단장님은 오러블레이드로 성문을 반으로 갈라서 돌격하셨지.
그런 오러블레이드를 뽑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똑같이 정교한 칼날을 덧씌우면 되는 건가.
어떻게?
압축인가?
적당히 풀어놓은 검기를 천천히 압축한다. 작게, 그리고 정교하게.
나는 눈을 뜨고 점점 크기가 줄어드는 오러를 확인했다.
모습이 작아질수록, 오러가 단단히 뭉칠수록 아지랑이 같던 오러는 잘 정련된 칼날 같은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이게…”
“이것이 검기성강(劍氣成罡)…”
“아저씨, 대단해요!”
내 칼날에는 단장님의 것보다는 작지만 형태는 비슷한 오러블레이드가 은은한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신비한 빛깔을 흩뿌리는 오러블레이드는 아름다웠지만, 이것은 파괴의 결정체.
함부로 손을 댔다간 문자 그대로 찢겨나가리라.
“아저씨, 한번 휘둘러봐요!”
그래볼까.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적당히 벨만한 것이 없는지 살폈다. 그러다 내 눈에 띈 거대한 바위 하나.
강가 옆에 있다기엔 뭔가 위화감이 있는 바위는 상당히 커서, 자르는 맛이 있을 것 같았다.
후.
심호흡하고, 팔을 들어 올린다.
자연스럽게 검도 내 머리 위로 올라가, 눈앞의 바위를 베어버릴 준비를 마쳤다.
그럼…
하나.
둘.
셋.
바위를 향해 위에서 아래로 정직한 세로로 벤다. 나는 손에 느껴지는 편안한 감촉에 감탄하며 반으로 갈라진 바위를 쳐다보았다.
“저만한 바위를 한 번에…”
“…손에 저항감이 거의 없는데.”
이게 오러블레이드?
이러니까 다들 초절정에 목을 매는 거구나.
검기랑 차원이 다르잖아. 검기도 바위를 가를 수 있긴 하지만 좀 더 거친 느낌인데 말이야.
나는 바위를 케이크 썰듯이 썰어버리는 오러블레이드의 위력에 감탄하며 잘린 단면을 살폈다.
그리고…
“음?”
“아저씨, 왜 그래요?”
“혜령아, 이거 뭘로 보이냐?”
“…어…지하실 문이요?”
“…숨겨진 비동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깐의 눈빛 교환.
찰나였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나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바위 밑에 있던 정체불명의 문을 열어 젖혔다.
끝냈다는 것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