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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8

       

        “음.”

        “음이 아니라…. 나 잠깐. 에시. 혹시 저거 나만 보이는 거 아니지?  너도 보여? 너희도 보여?”

        “네….”

        “어….”

        “응.”

        

        

        이반은 다친 학생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학생들을 고문할 필요는 없으니 사제를 찾아야겠는걸.

        

        생각 이상으로 크게 다쳤군. 그래도, 후유증이 남을 수준의 부상은 아니다. 이 놀라운 전근대 판타지 세상엔 사제가 진짜 힐링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디 쇠는 두드리며 강해지고,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 법이므로 괜찮다. (당연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전원이 신경 가속을 얻었으니 이번 훈련은 놀라울 정도로 성과가 좋다. 신경 가속에 감조차 잡지 못했던 생도들을 고작 엿새 만에 성장시킨 것이다.

        

        이 커리큘럼을 조금 더 다듬어서 정규 편성으로 돌리면, 방첩사령부의 무장 수준은 어지간한 군사 조직들로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가 되리라.

        

        

        “아저씨. 진짜예요?”

        “음?”

        “진짜, 정말. 진짜로. 정말진짜로. 멀쩡한 거예요? 다친 곳도 없고? 몸을 움직일 수도 있고…?”

        “무슨 뜻이지?”

        

        

        고통으로 인한 환각을 겪고 있는 것인가? 이반은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냈다. 사제 서품을 받은 요원 하나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급한 대로 치유 기도를 조금 해두고, 인근 영지로 옮겨 성당에서 마무리 진료를 하면 방학 안에 멀쩡해질 부상이다.

        

        이반은 이런 방면에 충분한 경력이 있었다. 특별한 외과적 지식이 필요하지도 않다. 대부분 몸으로 겪어봤으니까.

        

        일반적으로 완전히 사지를 손실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반은 가능한 모든 종류의 부상을 직접 겪어본 사람이다. 그는 부상의 정도만으로도 생도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통에 비해 심하진 않은 수준이다. 이 생도들의 기적적인 육체 성능 덕이겠지.

       

        오히려 대단한 일이다. 고작 한두 달 진료실에 누워있는 것을 대가로 초인의 영역에 발 끝을 걸칠 수 있게 된 셈이니 전혀 손해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 잠깐만! 잠깐!! 멈춰!”

        “음.”

        “음!도 멈춰! 지금… 지금… 지금 뭐… 뭐 한 거에요? 진짜 제정신이야? 우리, 우리를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고요?”

        “아, 그건 아니다.”

        

        

        훈련 보조를 위해 꾸준히 현장 상황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러니 완벽히 통제된, 안전한 훈련이었다. 라고.

        

        무미건조하게 설명하는 것이 속이 터져서.

        

        

        “안전!! 그걸 말이라고 해!! 쟤, 쟤 봐봐. 오스칼은 양팔이 부러졌고, 저, 저, 엘피헤라는 눈에서 피눈물을 흘렸다고요!”

        “삼촌 저는 번개를 맞았는데요….”

        “상정 가능한 수준의 부상이었다.”

        “으아아아아—!! 대체 언제부터! 왜!!”

        “처음부터.”

        

        

        이반은 이쯤에서 종합평가 피드백을 내려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본디 오답노트는 문제풀이 직후에 작성하는 것이 학습 능률 향상에 더 도움이 된다. 21세기의 발달한 교육과정이 이 전근대 세상에 베푸는 선진 문물이다.

        

        

        “처음 너희가 ‘마족에게 습격당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언제지?”

        “네…?”

        “총성. 요원 하나가 총격을 받고 쓰러졌을 때였지. 그 시점에서 패닉에 휩싸여 도주를 선택한 것을 보고 있었다.”

        “아니, 당연히 눈 앞에서 사람이 벌집이 되어서 쓰러져… 있는…?”

        

        

        이자벨의 시선 끝에 한 요원이 감동한 표정으로 손을 휙휙 젓고 있었다.

        

        습격 첫날 도망치라고 비명을 지르며 피를 쏟아내고 총격을 받았던 요원이다.

       

        흐그으극, 이자벨은 얼굴을 감싸쥐며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너희가 만난 오크들의 무장 중에 화약 병기가 있던가?”

        “…?!”

        “그 시점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오크들은 총을 사용하지 않았잖은가. 이 숲에서 유일하게 총기를 소지하고 사용한 것은 요원들뿐이었다.”

        “아니, 그게 뭔…?!”

        

        

        이반은 이쯤에서 말을 끊고 손을 흔들었다.

        

        곧, 숲 속에서 요원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대략 50여명 가량 되어 보이는 덩치 큰 사내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나타났다.

        

        그들은 저마다 활짝 웃으며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이, 이 분위기 뭔데?!!”

        “하지만 축하한다. 너흰 모든 과정을 훌륭한 성적으로 수료했으며, 협동심과 생존기술을 배웠고, 신경 가속을 익혔다. 수행 목표의 초과 달성인 셈이지.”

        

        

        이반은 신상필벌이 확실한 사람이다. 당연히 모든 과업에는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의 손짓에 따라 동시에, 그리고 굉장히 장엄하게.

        심지어 몇몇은 훌쩍거리기까지 하면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본디 방첩사령부란 절멸부대의 정신적 후예들이었으므로, 용사 파티에게 대단히 관대하기 마련이었다.

        

        

       -짝.

       -짝. 짝. 짝.

       -짝.짝짝. 짝.

        

        

        요원들이 엄숙한 분위기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자벨의 귓가에 뭔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끄익….”

        

        

        그녀는 뒷목을 잡고 실신했다.

        

        

       *

        

        

       -톡, 톡, 톡.

       

        

        금촉으로 연마된 만년필이 리듬감 있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 만년필 촉은 대단히 연약하기 때문이다.)

        

        촉이 머금은 잉크가 후드득, 테이블 위에 흩어졌다. 새까맣게 번지는 것이 꼭 그녀의 정신 상태를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예술적이군. 엘리자베타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쥐었다.

        

        달그락, 달그락.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 의도치 않게도 수전증이 왔네. 그래. 그럴 만도.

        

        사실 만년필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손이 떨렸다. 덜덜덜 하고.

        

        

        [이하 훈련 과정은 모두 보고자에 의해 통제되어 있었으며, 상황 도중에 발생한 부상은 현장 처치 후 후속 진료소로 인계되었음.

        

        이자벨 : 전신 타박상, 2개소 골절상, 신경 과부하로 인한 장기 요양 소견서 첨부.

        엘피헤라 : 마력피로 누적으로 인한 체내 회로 손상, 회복을 위해 필요한 약재는 참조2에 영수 내역을 증빙함.

        오스칼 : 좌우 상박에 골절, 좌족 골절, 슬하부 염좌, 최소 15개소 근육 파열, 한달 이상의 집중 치료 소견서 첨부.

        에시디스 : 중범위 공격주문(6등급 추정)에 노출, 최소 5개소 이상의 화상, 근육 파열, 좌완 인대 중증도 염좌, 신경 부하로 인한 5주 이상의 집중 치료 소견서를 첨부.

        

        이하 여백.

        

        보고자 :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검수자 :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

        

        

        엘리자베타는 떨리는 손으로 애써 찻물을 삼키려다 두 번 정도 앞섶에 흘린 뒤에야 포기했다.

        

        언제나처럼 이반의 보고서는 놀라울 정도로 담백했다. 너무 담백해서 마른 나무를 씹어먹는 것만 같았다.

        

        평소와는 달리 그녀는 조금 단 것을 먹고 싶어졌다. 이반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뇌의 당분 부족이라 진단했을 것이었다.

        

        슬프게도 크라실로프는 4계절 꾸준한 냉한대기후를 자랑하는 국가인 탓에, 사탕수수는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검소한 군주로서 엘리자베타는 설탕의 유혹을 또 다시 뿌리쳤다.

        

        대신 그녀는 다른 유혹을 수용했다.

        

        

        “몇 개까지 헤아렸는가?”

        “일천 하고 오백마흔셋이었습니다. 전하.”

        “이천 번까지 자세를 유지하도록.”

        “예, 전하.”

        

        

        그녀는 그제야 보고서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고개를 들었다.

        

        드넓은 총장실의 한 구석에서, 두 명의 사내가 물구나무 선 채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말고 순수하게 육체 능력으로만 시행하라는 명령을 준엄하게 받든 탓에, 이반과 드미트리는 전신에서 흘린 땀으로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 지경이었다.

        

        

        “그만. 그만. 그만!! 그만!!!”

        “예, 전하.”

        “으아아아—!! 아아… 아아악— 왜! 왜 그랬는가, 왜!”

        

        

         이반은 다소 거칠어진 호흡을 순식간에 정리한 뒤에 각잡힌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고 명령을 기다렸다.

        

        언제나 모범이 되는 담백한 충신의 표상이었다. 너무 담백해서 씹어먹고 싶었다. 엘리자베타는 대신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 끝을 씹었다.

        

        

        “본인이 너무 많은 것을 바랐는가? 본인의 잘못인가? 아니, 본인의 잘못이 맞다. 반카. 그대에게 예의범절과 상식을 가르쳐주지 못한 본인의 과오가 크다. 하긴, 전장에서 유년시절부터 살아왔으니, 귀관의 무지와 무례는 귀관만의 잘못이 아니리라. 본인의 잘못이다. 내가 죽일 년이다!!”

        

        

        이반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엘리자베타의 말을 흘려 들었다.

        

        솔직히 상식과 예의범절을 전근대 유사 러시아 제국의 독재 군주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이반은 무려 오백여 년을 엄정한 유교 문화로 꽃피운 도덕과 예절의 국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 출신의 4년제 대학 입학생이었다. (심지어 사회탐구 영역 윤리 1등급을 자랑하는 살아있는 도덕책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합리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을 굳이 부연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자베타는 가슴을 쥐어 뜯었다.

        

        

        “본인은… 그냥… 본인에게 와서, 대체 토너먼트 때에 무슨 생각으로 대귀족 전원 토벌과 국내 세력 개혁을 상의도 없이 실시했는지 보고하라고 명령했네. 그렇지 않나?”

        “예, 전하.”

        “그런데 선조치 후보고를 하겠답시고 학생들을…. 교장 인가도 받지 않고, 특별 수업이라며 끌고 가서, 오지에서 수련을 시켰다고.”

        “예, 전하.”

        “예, 전하가 아니라악!!”

        

        

        엘리자베타는 씩씩거리다가 얼굴을 감싸쥐었다.

        

        

        “훈련… 훈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알겠네. 내 이해하지. 이해하겠네.”

        

        

        엘리자베타는 손가락 사이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얼굴을 보자 답답함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문득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 저 남자는 아직도 전장에 살고 있었지.

        

        그러니까 이 평화로운 시대에, 굳이 학생들을 끌고 가 가혹한 생존 훈련을 시도했다는 것이겠지. 그 방법이야 과도하게 가혹했다 하더라도, 납득이 가능하기는 했다.

        

        이들은 평범한 학생이 아니다. 용사 파티의 후예들이다. 마족, 야망가, 역심을 품은 귀족들까지 가릴 것 없이 혼란을 위해서라면 가장 노리기 좋은 타겟이란 소리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결국 크라실로프에 돌아올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행동한 것일 테지.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이 나라를 위해 한 짓이겠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으아아아—!!”

        

        

        엘리자베타는 각국 귀빈들에게 ‘귀하의 소중한 자녀가 아작이 났으나 다행히 후유증 없이 치료 중입니다. 슬프게도 이번 학기 방학엔 본국에 귀가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라는 국서를 전달해야 한다는 상황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믿기 어렵겠으나 크라실로프는 결코 외국의 귀빈을 볼모로 잡지 않는다.)

        

        그녀는 끅끅 신음을 흘리다가 애써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자벨 양이 눈을 뜨자마자 본인에게 꼭 전해달라 한 말이 있었다네.”

        “경청하겠습니다, 전하.”

        

        

        강의 평가라.

        

        이반은 흡족하게 고개를 들었다. 제법 자신도 있었다. 그의 교육 과정은 대단히 심혈을 기울여 모든 변인을 통제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대에 대한 독자적인 암살 시도를 용인해달라 하더군. 승인했네.”

        “…예, 전하.”

       

       

        이반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소 시무룩해졌다.

       

       

        “경은 이제 근신…. 아니, 그냥. 그냥….”

        

        

        등신.

        

        엘리자베타는 힘겹게 마지막 단어를 삼키고, 손을 휘저어 두 머저리를 내쫓았다. (드미트리는 억울했다.)

        

        여름방학 개시 후 첫 주가 지난 무렵이었다.

        

       

       

       

       

        

       

       EP15. 아카데미 여름방학 이벤트는 실전이 상식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현대인 천재론의 표상, 교육학의 신기원, 계절학기의 지배자, 수강생 전원에게 의료보건복지서비스 무상제공, 학장 면담 프리패스상, 현대 문명의 전파자, 수련회 캠프파이어 국룰의 준법시민.
    김선우의 즐거운 방학 캠핑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휴! 이번 에피소드도 무난히 아카데미에서 끝나서 다행이다!
    왜냐하면
    다음 에피소드는 아카데미에서 벗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방학에 누가 대학에 가. 계절학기도 없는데.
    인정하십시오, 해리포터도 방학엔 호그와트에 가지 않았다.
    그것은 아카데미물의 상식입니다.

    *

    진짜 무친 연참이엇따 그쵸? 에피소드 끌기 싫어서 엄청 태웠어요!
    오늘도 사랑합니다 여러분!! (사랑하십시오.)
    오메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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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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