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08

       엘리가 휴학했을 당시 마계.

         

       시가지 대로변엔 어느 고층 건물이 존재했다.

         

       감시를 피해 몰래 입장하면 굳은 표정의 경호원을 만나게 된다. 신원을 확인받고 비밀방에 들어서면 온건파 혹은 비둘기파 마족의 은거지에 올 수 있었다.

         

       이곳은 제국의 색출 아래 궁핍하게 지내는 과격파와는 달랐다. 소속 인원을 대체로 숨기기는 하나 고급 소파와 테이블이 존재하고 온화한 오르골 소리가 울리는 은신처였다.

         

       엘리는 손을 움직여 오르골을 껐다.

         

       그리고 정장 차림의 마족 둘이 앉아 체스 게임을 진행 중인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하얀 나이트 기물을 만지던 자가 고개를 돌렸다.

         

       “오셨군요, 왕녀님. 소득은 있으셨습니까?”

       “없었어.”

         

       반대편에 앉은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2학기 편입생에도 차기 마왕이 없었소? 차라리 마계에서 찾는 게 빠르겠군.”

       “더 찾을 곳이 있다면야.”

         

       이미 다 확인해 봤으니까.

         

       차기 마왕의 출생 연도는 이미 예언된 사항이었다. 마계 태생 중에 그 나이대를 확인한 지도 이젠 십몇 년이 지났다. 이쯤 했으면 마계엔 없다고 판단하는 게 맞았다.

         

       “결국 마계 출신이 아닌가. 매파 녀석들이 격분하겠구만.”

         

       엘리는 코웃음 쳤다.

         

       “마왕위가 언제부터 출신을 따졌다고.”

         

       나이트 기물이 체스판을 톡톡 두들겼다.

         

       “설마, 이미 돌아가신 건 아니겠죠?”

         

       정적이 흘렀다. 완강히 부정하기엔 이성적으로 어려운 감이 있었다.

         

       차기 마왕의 출생 연도는 제국도 알았다. 아니, 대신전의 예언이었으니 마계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선대 황제이자 폭군이 그 예언을 제일 먼저 받아 듣고 한 조치는 단호했다.

         

       그 연도에 태어난 모든 아이의 죽음.

         

       제국과 마계를 가리지 않은 조치는 폭군답지 않게 민폐적인 유능함 덕분에 정말 깔끔하게 시행됐다. 제국의 귀족 태생도 봐 주지 않고 죽였으니.

         

       얼마나 깔끔했는지 현재 아카데미엔 그 출생 연도인 2학년이 한 명도 없었다.

         

       이쯤 되면 차기 마왕은 이미 그때 죽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제국에서도 낙관적인 전망에 따라 마족 출신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 정도로.

         

       폭군은 그 대가로 제국 귀족의 격렬한 분노에 직면해 폐위됐지만 죽은 마왕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분명, 12월 아니면 1월 태생일 거야.”

         

       다른 연도와 시기가 비슷하게 겹쳐 태어났다면 출생 연도를 조작하기 위해 12월이나 1월에 태어났다고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쓸데없이 유능한 폭군도 그걸 잘 알았다. 윗년도 12월과 아랫년도 1월 태생의 귀족까지 죽이겠다고 선언했었다.

         

       황실을 존중해 중립을 지켰더니 힘겹게 낳은 후계자가 죽게 생긴 크래프트 가문이 완강히 맞서며 결국 폐위된 거지만.

         

       정작 출산 이후 건강이 악화된 몸으로 무리해 버린 크래프트 가주가 사망하고, 친구로서 폐위에 협력하던 황태자가 즉위한 뒤 황실을 능멸했다는 안면몰수한 명분으로 어린 백치 가주만 남은 크래프트 가문을 배신하고 풍비박산내 황권을 강화하긴 했어도 덕분에 폭군의 조치에 빈틈이 생겼다.

         

       그래서 1월 태생과는 동급생이 될 수 있는 엘리시타 자신이 서브 신분을 동원해 몰래 입학까지 한 것이었다.

         

       운이 좋았는지 입학 때부터 학생회에 가입해 하늘섬 권력 중추에 당도할 수 있었다.

         

       “오호라.”

         

       노인이 체스판의 비숍을 움직였다. 폰이 잡히고 상대 킹이 공격당했다.

         

       “5수 체크메이트 더블 어택이오.”

       “오, 내 룩. 왕녀님께 집중하느라.”

       “젊은 친구가 변명이 길구만.”

         

       시선이 엘리를 향했다.

         

       “소득이 없다 했으면, 그렇게 넓게 훑어봐도 없던 것이요?”

       “마땅한 사람은 없었어.”

         

       학생회 권한을 남용해 샅샅이 확인해 봤지만 차기 마왕이라고 기대할 만한 자는 없었다.

         

       “그래도 눈에 띄는 자는 있었을 거 아니오. 학교란 환경상 성적도 다 나와 있을 터고. 차기 마왕이라면 송곳처럼 튀어나오지 않았겠소? 12월이나 1월 태생 중에서 말이요.”

       “한 명 정도는 있긴 했지만…….”

       “있었군!”

         

       기대하는 눈빛에 엘리는 미묘한 표정이 됐다.

         

       “1월 1일인 애가 한 명 있어. 필기 수석일 정도로 머리가 좋고 여유롭게 경지를 숨기는 데다가 마족에겐 반감이 없는.”

         

       혈통만 아니라면 최소한 친마족 인재로라도 주의 깊게 지원해야 할 존재가.

         

       방학 때 이미 학생회 생활을 들었던 마족들이 덩달아 미묘한 표정이 됐다.

         

       “설마 그거 크래프트 말하시는 겁니까?”

       “그 크래프트. 그럴 리 없지.”

       “그러니까.”

         

       엘리가 이미 거의 진 마족에게 나오라는 양 손짓했다. 자리가 생기자 노인 앞에 앉아 체스 기물을 재배치했다.

         

       “그래도 휴학이 끝나면 크래프트를 살펴볼 생각이긴 해. 마침 반마족 프레임이 깔렸으니 어떻게 대처했는지 보고 친마족 인재로 지원해 줄지 말지를 결정하면 되겠지.”

         

       어지간하면 하게 될 거 같다.

         

       어리숙한 겉모습에 감춰진 속내를 파악하기 까다롭긴 해도 정말 마족에겐 반감이 없는 듯하니.

         

       연기였다면 같은 공간에서 피곤한 업무를 반복하며 생활하는데 티가 안 날 리가 없다.

         

       “크래프트 지원이오? 화낼 사람 많겠군.”

       “마계가 언제부터 출신을 가려 받았다고.”

       “크래프트 가문에 생존한 가신이 딱히 없으니 인재부터 지원하시렵니까? 흥미롭긴 하겠군요.”

       “아니야. 어차피 그레이스 상단주부터가 친마족 상인이니까 우리가 괜히 간섭할 필요는 없어.”

         

       크래프트 가문의 가신 집안이면서도 반마족 성향에 반감을 느끼고 뛰쳐나온 사람이니까.

         

       엘리는 퀸 앞의 폰을 두 칸 전진시켰다.

         

       “파스텔 아니 크래프트는 빚내서 상단 팽창시키기를 좋아하니까…….”

         

       상대가 행동하자 비숍을 움직인 다음 나이트를 미리 들었다.

         

       “신용 무시하고 빌려주면 되겠어. 사업은 알아서 잘하겠지. 이 안건은 됐고.”

         

       체스판에 나이트를 배치했다.

         

       “근래 소식을 들려줘. 나쁜 소식부터.”

       “부둣가에 철도를 부설해 주던 하늘섬 측 상단이 파산했습니다.”

         

       마족이 말하며 침울해졌다.

         

       “매파의 하늘고래 테러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걸 이유로 제국은행이 하늘섬 상단들의 신용 평가를 하락시키며 융자를 강제 회수한 바람에 손도 못 쓰고 파산했다 합니다.”

       “너무 나쁜 소식이잖아…….”

         

         

         

       #

         

         

         

       “아아! 왜요! 악마님!”

         

       파스텔은 잠옷 바람으로 폴짝폴짝 뛰었다.

         

       악마가 높이 들어 올린 약혼 초상화 액자들에 손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

       『볼 필요 없다.』

         

       액자가 더 높이 올라갔다.

         

       “으아아!”

         

       이젠 근처도 안 닿아!

         

       “나 보라고 온 초상화인데!”

         

       위대한 크래프트 각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 예비 약혼자들의 애절함이……!

         

       『약혼용으로 보내는 초상화는 매우 미화된 그림이지. 혹해서 연애편지라도 주고받는 날엔 괜히 결혼했다가 마음고생만 하게 되는 거다.』

         

       그냥 초상화만 구경하는 건데 어디까지 상상하시는 거예요!

         

       “악마님이 마음고생하신다는 거죠?!”

       『흠.』

         

       악마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으으!

         

       파스텔은 바들바들 떨다가 외쳤다.

         

       “그건 별로 상관없잖아요!”

         

       약혼 초상화나 보여주세요!

         

       『뭐라고……?』

         

       악마가 충격받았다.

         

       파스텔은 이때를 틈타 점프했다.

         

       “진심 점프!”

         

       가벼운 몸이 단번에 날아올랐다. 초상화 액자들을 뺏어 들고 착지했다. 액자끼리 달그락대며 소리가 났다.

         

       “후우!”

         

       사실 가뿐히 뺏을 수 있는 높이였는데 악마님의 어리광에 어울려 드리느라 고생했네!

         

       그대로 얼어붙은 악마를 두고 룰루랄라 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얇은 초상화를 쌓아두자 자신의 키보다 높은 양이었다.

         

       “아~!”

         

       인기인의 숙명이란.

         

       상시 보내지는 약혼 초상화를 악마님이 말도 안 해주고 폐기 처분하던 걸 그냥 기간 두고 모았을 뿐인데 이렇게 쌓이다니.

         

       내 인기가 가끔은 부담스럽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베개를 잡았다. 의자처럼 침대맡에 세팅하고 옆자리를 팡팡 쳤다.

         

       “악마님! 악마님! 특별히 같이 구경할 영광을 드릴게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

         

       오직 악마님에게만!

         

       『하아.』

         

       악마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정장 바지에 혹여 있을 먼지를 살피더니 침대맡에 같이 앉았다.

         

       『뭘 보던 거짓이다. 초상화는 얼마나 좋은 화가를 고용할 수 있는 자산과 명망을 갖췄는지 보여줄 뿐이야.』

       “네네!”

         

       파스텔은 등받이 베개를 조정해 악마에게 기대앉았다. 편하게 다리가 펴졌다.

         

       “박수! 박수! 초상화 시간입니다!”

         

       짝짝! 짝짝!

         

       “악마님! 악마님도 박수!”

       『하아.』

         

       악마가 본인 어깨에 난잡하게 늘어진 분홍 머릿결을 곱게 정리해 주곤 손을 들었다. 성의 없는 박수가 이어졌다.

         

       짝짝, 짝짝.

         

       “좋아요! 첫 번째 초상화!”

         

       파스텔은 초상화를 잡았다.

         

       호화찬란한 사람 그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허억.

         

       절세 미남!

         

       “외모 평가는 좋지 않지만, 굉장히 미남이시네요!”

         

       이 정도면 악마님의 1.1배는 되는 듯!

         

       현실에 있어선 안 되는 천상의 외모 같아!

         

       인기 레벨을 따져보면 파스텔의 0.8배 정도라고 할까!

         

       악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해도 해도 미화가 너무 심하군. 이런 상대는 거들떠도 안 보는 게 좋다. 관계에 진실이 들어 있지 않아.』

         

       그 정도인가?

         

       연애를 바란다면 스킨케어 정도는 하는 게 좋은 것처럼 초상화를 줄 거면 그림체 미화 정도는 해야 예의가 아닐까?

         

       하긴 난 여기 관습 모르니까!

         

       “그럼 이건 패스할게요!”

         

       다른 초상화를 들었다.

         

       “우왓! 이분도 절세 미남……!”

         

       인기 레벨이 파스텔의 0.9배는 되는 듯!

         

       바로 기록 경신!

         

       『볼 것도 없군. 한치의 진실조차 없어. 이것도 넘기는 게 맞다.』

       “패스! 패스!”

         

       파스텔은 팔을 휘저으며 히히덕댔다.

         

       악마님과 초상화 구경 즐겁다.

         

       헤헤.

         

         

         

         

         

       

       

    다음화 보기


           


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