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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8

       뒤돌아 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전투 현장.

       

       그곳에 베니와 모르가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큼직한 하얀색 큐브뿐.

       

       별개의 공간처럼 일렁이는 큐브의 모습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척 봐도 들어가면 위험할 것 같은 분위기. 그렇다면 일단 몸부터 숨겨야겠지.

       

       “후우.”

       

       호흡이 느려지며, 몸짓 하나하나가 위화감을 상실한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이 당연한 감각.

       

       얼핏 보면 주변과 동화된 것 같지만, 내 감각으로는 주변과 격리된 것 같은 기묘한 감각 속에서 큐브 속으로 몸을 던졌다.

       

       “…샤도우.”

       

       그리고 그곳에는 죽음을 각오한 자 특유의 서늘한 눈빛을 한 베니가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타이밍 좋게 딱 도착해서 다행이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본능적으로 땅을 박찼다. 이대로 빠르게 접근해, 성역을 전개함과 동시에 뒤에서 심장을 찌르면….

       

       “음? 암살자인가?”

       

       모르가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정확히 이쪽을 향해 스태프를 겨눈다.

       

       과연. 이 새하얀 공간 전체가 자기 영역이라 이거지.

       

       품속에 고이 모셔둔 풀돌 여신상을 움켜쥐며 미궁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사랑의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도와줘.”

       

       파아앗-!

       

       짧은 한마디에 반응하며 강렬한 신성력을 터뜨리는 여신상. 베니를 지나쳤을 무렵에는 전신이 분홍색 광휘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푸스슥.

       

       반투명한 총탄이 그 빛에 휘말려 소멸했다.

       

       동시에 내가 두르고 있던 은신이 풀리기 시작한다. 이만한 신성력을 흩뿌렸으니 몸을 숨기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눈부신 신성력의 광휘 속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모르가나의 공간 마법은 성역 안에서 무효화 된다. 아마 미궁의 시공간을 ‘정상적인 형태’로 고정하는 힘 때문이겠지.

       

       공간 마법은 어찌됐건 평범한 공간을 술자의 의지로 뒤틀어 원하는 결과를 내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내 주변으로 펼쳐진 작은 성역에 한한 이야기. 나는 몰라도 베니는 안전할 수 없다.

       

       그리고 모르가나의 뒤에 자리 잡은 반투명한 단두대 형태의 일렁임. 저기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보통이 아니었고.

       

       즉, 내가 시선을 끌어야 한다.

       

       모르가나가 베니를 노릴 생각조차 못 하도록 속을 벅벅 긁어대야 한다.

       

       모르가나에 관한 상세 설정은 짜둔 적이 없어 어떤 녀석인지 모르지만…마탑의 장로쯤 되면 자신의 마법에 강한 자부심을 품고 있다는 설정은 넣은 적 있다.

       

       얼핏 보면 당연한 설정. 하지만 내가 직접 명시한 설정만큼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지금까지의 경험이 있으니, 한번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은 내가 아는 한 가장 개빡치는 캐릭터 유형.

       

       성역이 전개되며 흩뿌려진 광휘가 흩어질 무렵. 나는 이미 머리속에 떠올린 캐릭터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허~접. 허~접. 이런 것도 마법이라고 쓰는 거예요?”

       

       분명 올려다보고 있을 터인데 상대를 깔보고 있는 눈빛.

       

       여기서 끝이 아니다. 머리를 들이밀듯, 가볍게 숙인 상체. 손으로 가리긴 했으나 훤히 보이는 뒤틀린 입가.

       

       어른을 물로 보는 것 같은 재수 없는 언행에 모르가나의 눈이 크게 뜨인다. 음. 저러니까 주름이 더 자글자글해 보이는군.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에 약간의 뉘앙스를 추가했다.

       

       네가 꼴받으면 뭘 어쩔 수 있는데! 라는 절대 자신이 아픈 꼴을 보지 않으리라는 확신…달리 말해 참교육을 부르는 분위기 말이다.

       

       “허벌 술식! 마력 조루! 사과해! 마법의 신에게 이런 쓰레기 같은 마법을 써서 미안하다고 사과해!”

       

       “이 빌어먹을 애새끼가…!”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하기야.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마법을 무효화시키며, ‘너 재능 없어 마법 못 쓰잖아’를 메스가키 느낌으로 긁어대는데 빡치지 않는 마법사가 얼마나 있겠는가.

       

       뒤에 있던 베니가 광역 도발에 저항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오냐. 어디 한번 이것도 받아내 보거라!”

       

       딱딱.

       

       스태프로 바닥을 두 번 두드리는 모르가나. 그와 동시에 내 주변을 둘러싸는 반투명한 벽. 정육면체 상자 안에 갇힌 모양새네.

       

       딱딱.

       

       재차 모르가나가 바닥을 두드리자, 벽이 순식간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마치 공간 그 자체가 조여들며 압착시키려는 듯한 모습.

       

       이대로라면 과즙 100% 요나 주스가 되어버리고 말겠지.

       

       사랑의 여신이 백업해 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우웅-

       

       약간의 공명음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공간의 벽. 자신의 마법이 근본에서부터 부정당한 모르가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 한 번은 숨겨둔 한 수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알겠구나. 사랑의 여신이 직접 힘을 쓰고 있다는걸. 허나, 여신은 더 이상 간섭할 힘이….”

       

       “저기 저기.”

       

       모르가나의 말을 끊으며 다가갔다. 이쪽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물러서지도 않는 녀석.

       

       그런 모르가나를 향해 대놓고 손을 흔들었다. 무언가를 쥐고 위아래로 흔드는 모양새.

       

       조금 전의 스태프로 바닥을 두드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도 보이도록 말이다.

       

       “방금 그 딱딱 뭐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혹시 틀니 부딪히는 소리?”

       

       “무, 뭐라?”

       

       틀딱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지 흠칫한 녀석을 향해 보란 듯이 키득였다.

       

       “아니면……남자가 없어서 스태프로 딸치는 소리?”

       

       “놈! 공간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 알겠다! 과연 이것마저 여신의 휘광으로 극복할 수 있겠느냐!”

       

       노호성을 내지르며 스태프를 크게 휘두르는 모르가나. 그 궤적을 따라 긴 균열이 그어지더니, 안쪽에서 큼직한 골렘이 기어 나온다. 하지만.

       

       “샤도우?”

       

       -키샤아악!

       

       이쪽에는 샤도우가 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층 끔찍해진 몰골을 하고 있는 샤도우. 그만큼 강해진 녀석이 순식간에 기사처럼 생겨 멋들어진 골렘을 덮친다.

       

       한껏 몸집을 부풀려 통째로 골렘을 집어삼킨 샤도우. 그 안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까드득. 카각.

       

       그렇게 샤도우가 다시 본래의 몸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바닥에 흩어진 약간의 부스러기뿐이었다.

       

       “어, 어떻게 그 불사의 짐승을….”

       

       경악하는 모르가나. 양손을 가슴께 앞에서 맞잡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며 이죽였다.

       

       “닭장♡ 노괴♡ 기술이니 학문이니 하지만 진짜 기적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허접 마법사♡”

       

       작정하고 쥐어짠 달콤한 목소리. 하지만 자신의 마법으로 불로불사를 이루고자 했을 정도로 자부심 가득한 모르가나에겐 세상 무엇보다도 꼴받는 목소리이리라.

       

       “마법 그런 거 왜 배워? 기도 딸깍이면 다 없던 일이 되는걸?”

       

       “……죽여버리겠다!”

       

       이번에는 스태프를 높이 들어 올리는 모르가나. 그 끝에 달린 보석에서 투명한 광채 그 자체가 뿜어지더니 그녀의 등 뒤로 무수히 많은 균열이 생겨난다.

       

       조금 전보다는 확연히 작고 약해 보이는 골렘과, 가동하기 시작한 대포를 닮은 마도구들.

       

       공간을 직접 뒤트는 마법이 아닌, 순수한 물리력과 파괴력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당연히 이런 건 성역으로도 막을 수 없지. 하지만.

       

       “저건 나랑 샤도우가 막을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요나 너는 그사이에 저년을 쓰러뜨려!”

       

       “아핫!”

       

       모르가나의 방심을 유발하거나, 도발하기 위함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이를 위해 처음부터 그렇게 도발하고, 방심시키며 거리를 좁혀왔던 거다.

       

       소매치기 스킬로 얻은 민첩. 그동안 성장한 신체 능력. 성역 안에서 받는 버프. 그리고 최근에 얻은 새끼손톱만 한 오러를 통한 순간적인 강화.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나온 결과는 한 걸음이었다.

       

       단 한 걸음이면 나와 모르가나 사이의 간격을 뛰어넘을 수 있다.

       

       무엇보다 모르가나는 여신의 힘을 경계할 뿐, 나라는 사람 자체는 전혀 경계하고 있지 않으니 적어도 한번은 확실하게 닿을 수 있다.

       

       넘어질 것처럼 몸을 기울인다. 급격하게 앞으로 쏠리는 무게중심. 이에 버텨내듯 다리를 길게 뻗으며, 단 한 번의 발길질에 오러를 전부 격발시켰다.

       

       팡!

       

       내가 해놓고도 깜짝 놀랄 정도의 속도. 어느새 팔 뻗으면 닿을 위치까지 가까워진 모르가나의 눈이 커진다.

       

       하지만 그녀는 명실상부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마법사.

       

       체내에 품은 마나는 존재 자체로 주인의 몸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 동격의 기사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2층의 모험가 하나 때려죽이기엔 충분하겠지.

       

       그래. 평범한 2층의 모험가라면 말이다.

       

       쐐애액!

       

       위협적인 속도로 휘둘러지는 스태프. 이를 향해 비어있는 손을 뻗었다.

       

       손끝이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속하는 움직임. 오랜만에 본업에 나선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모르가나에게서 스태프를 소매치기했다.

       

       “어…?”

       

       당황한 모르가나. 이대로 유니콘 단검으로 심장을 찌르면 끝…이지만, 아쉽게도 이는 불가능하다.

       

       단검을 꺼내기도 전에 들키는 바람에 성역을 먼저 전개했기 때문.

       

       아공간 반지도 일단 공간 마법인 터라 성역의 유지 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열 수 없다.

       

       그러니 이번에는 다른 무기를 쓰는 수밖에.

       

       묵직한 왼손을 들어 모르가나의 가슴께를 겨누었다.

       

       “뒈져.”

       

       손목을 까딱이는 것으로 발사된 석궁.

       

       쐐애액!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 동시에 모르가나의 로브가 밝게 빛났으나, 빛나기만 하고 방벽이 생성되지는 않았다.

       

       샤도우의 이빨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고 짐작했는데…역시나 로브에 인챈트 된 마법도 공간 마법인 모양.

       

       결국 무방비한 상태로 평범한 화살에 심장을 꿰뚫린 모르가나.

       

       “커헉…! 내, 내가 이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모르가나. 이내 그녀의 눈동자에 표독함이 차오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주먹을 꽉 쥐고 그대로 무언가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는 모르가나.

       

       등 뒤에 가만히 서서 위압감을 흩뿌리던 반투명한 단두대의 날이 떨어져 내린다.

       

       서걱.

       

       단두대에 걸어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들려오는 무언가 잘리는 소리.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무언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대로 시간을 주면 녀석은 최후의 발악을 이어갈 것이다.

       

       경지가 높은 이는 생명력이 질겨지고, 그만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유예가 길어지니까.

       

       그러니 필요한 것은 확인 사살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뒤져!”

       

       빼앗은 스태프로 모르가나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빠악!

       

       “베니랑 샤도우를 실험체 삼는 데 성공해도 어차피 넌 실패하니까 그냥 뒤지라고!”

       

       빠악! 빠악!

       

       끄트머리에 달린 투명한 보석에 모르가나의 정수리가 오목해졌다.

       

       눈을 까뒤집은 것을 보아 죽은 것 같긴 한데…혹시 몰라 계속해서 내리쳤다.

       

       일단 불로불사에 관해 연구하던 녀석 아닌가. 무언가의 보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퍼억! 퍼억! 철퍽! 

       

       무언가 깨지는 소리. 타격음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하고, 튀어 오른 핏물이 내 볼을 뜨겁게 적실 무렵이 되어서야 손을 멈추었다.

       

       좋아. 이쯤 했으면 듀라한으로 되살아 나지도 못하겠지.

       

       만족스레 웃으며 모르가나였던 것을 한차례 걷어차고는 뒤를 돌았다.

       

       “베니! 우리가 이겼어요!”

       

       “…앗, 응.”

       

       어쩐지 질린 표정의 베니가 내 시선을 피했다.

       

       너무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무튼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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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8

EP.108





       뒤돌아 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전투 현장.


       


       그곳에 베니와 모르가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큼직한 하얀색 큐브뿐.


       


       별개의 공간처럼 일렁이는 큐브의 모습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척 봐도 들어가면 위험할 것 같은 분위기. 그렇다면 일단 몸부터 숨겨야겠지.


       


       “후우.”


       


       호흡이 느려지며, 몸짓 하나하나가 위화감을 상실한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이 당연한 감각.


       


       얼핏 보면 주변과 동화된 것 같지만, 내 감각으로는 주변과 격리된 것 같은 기묘한 감각 속에서 큐브 속으로 몸을 던졌다.


       


       “…샤도우.”


       


       그리고 그곳에는 죽음을 각오한 자 특유의 서늘한 눈빛을 한 베니가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타이밍 좋게 딱 도착해서 다행이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본능적으로 땅을 박찼다. 이대로 빠르게 접근해, 성역을 전개함과 동시에 뒤에서 심장을 찌르면….


       


       “음? 암살자인가?”


       


       모르가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정확히 이쪽을 향해 스태프를 겨눈다.


       


       과연. 이 새하얀 공간 전체가 자기 영역이라 이거지.


       


       품속에 고이 모셔둔 풀돌 여신상을 움켜쥐며 미궁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사랑의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도와줘.”


       


       파아앗-!


       


       짧은 한마디에 반응하며 강렬한 신성력을 터뜨리는 여신상. 베니를 지나쳤을 무렵에는 전신이 분홍색 광휘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푸스슥.


       


       반투명한 총탄이 그 빛에 휘말려 소멸했다.


       


       동시에 내가 두르고 있던 은신이 풀리기 시작한다. 이만한 신성력을 흩뿌렸으니 몸을 숨기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눈부신 신성력의 광휘 속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모르가나의 공간 마법은 성역 안에서 무효화 된다. 아마 미궁의 시공간을 ‘정상적인 형태’로 고정하는 힘 때문이겠지.


       


       공간 마법은 어찌됐건 평범한 공간을 술자의 의지로 뒤틀어 원하는 결과를 내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내 주변으로 펼쳐진 작은 성역에 한한 이야기. 나는 몰라도 베니는 안전할 수 없다.


       


       그리고 모르가나의 뒤에 자리 잡은 반투명한 단두대 형태의 일렁임. 저기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보통이 아니었고.


       


       즉, 내가 시선을 끌어야 한다.


       


       모르가나가 베니를 노릴 생각조차 못 하도록 속을 벅벅 긁어대야 한다.


       


       모르가나에 관한 상세 설정은 짜둔 적이 없어 어떤 녀석인지 모르지만…마탑의 장로쯤 되면 자신의 마법에 강한 자부심을 품고 있다는 설정은 넣은 적 있다.


       


       얼핏 보면 당연한 설정. 하지만 내가 직접 명시한 설정만큼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지금까지의 경험이 있으니, 한번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은 내가 아는 한 가장 개빡치는 캐릭터 유형.


       


       성역이 전개되며 흩뿌려진 광휘가 흩어질 무렵. 나는 이미 머리속에 떠올린 캐릭터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허~접. 허~접. 이런 것도 마법이라고 쓰는 거예요?”


       


       분명 올려다보고 있을 터인데 상대를 깔보고 있는 눈빛.


       


       여기서 끝이 아니다. 머리를 들이밀듯, 가볍게 숙인 상체. 손으로 가리긴 했으나 훤히 보이는 뒤틀린 입가.


       


       어른을 물로 보는 것 같은 재수 없는 언행에 모르가나의 눈이 크게 뜨인다. 음. 저러니까 주름이 더 자글자글해 보이는군.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에 약간의 뉘앙스를 추가했다.


       


       네가 꼴받으면 뭘 어쩔 수 있는데! 라는 절대 자신이 아픈 꼴을 보지 않으리라는 확신…달리 말해 참교육을 부르는 분위기 말이다.


       


       “허벌 술식! 마력 조루! 사과해! 마법의 신에게 이런 쓰레기 같은 마법을 써서 미안하다고 사과해!”


       


       “이 빌어먹을 애새끼가…!”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하기야.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의 마법을 무효화시키며, ‘너 재능 없어 마법 못 쓰잖아’를 메스가키 느낌으로 긁어대는데 빡치지 않는 마법사가 얼마나 있겠는가.


       


       뒤에 있던 베니가 광역 도발에 저항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오냐. 어디 한번 이것도 받아내 보거라!”


       


       딱딱.


       


       스태프로 바닥을 두 번 두드리는 모르가나. 그와 동시에 내 주변을 둘러싸는 반투명한 벽. 정육면체 상자 안에 갇힌 모양새네.


       


       딱딱.


       


       재차 모르가나가 바닥을 두드리자, 벽이 순식간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마치 공간 그 자체가 조여들며 압착시키려는 듯한 모습.


       


       이대로라면 과즙 100% 요나 주스가 되어버리고 말겠지.


       


       사랑의 여신이 백업해 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우웅-


       


       약간의 공명음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공간의 벽. 자신의 마법이 근본에서부터 부정당한 모르가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 한 번은 숨겨둔 한 수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알겠구나. 사랑의 여신이 직접 힘을 쓰고 있다는걸. 허나, 여신은 더 이상 간섭할 힘이….”


       


       “저기 저기.”


       


       모르가나의 말을 끊으며 다가갔다. 이쪽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물러서지도 않는 녀석.


       


       그런 모르가나를 향해 대놓고 손을 흔들었다. 무언가를 쥐고 위아래로 흔드는 모양새.


       


       조금 전의 스태프로 바닥을 두드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도 보이도록 말이다.


       


       “방금 그 딱딱 뭐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혹시 틀니 부딪히는 소리?”


       


       “무, 뭐라?”


       


       틀딱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지 흠칫한 녀석을 향해 보란 듯이 키득였다.


       


       “아니면……남자가 없어서 스태프로 딸치는 소리?”


       


       “놈! 공간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 알겠다! 과연 이것마저 여신의 휘광으로 극복할 수 있겠느냐!”


       


       노호성을 내지르며 스태프를 크게 휘두르는 모르가나. 그 궤적을 따라 긴 균열이 그어지더니, 안쪽에서 큼직한 골렘이 기어 나온다. 하지만.


       


       “샤도우?”


       


       -키샤아악!


       


       이쪽에는 샤도우가 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층 끔찍해진 몰골을 하고 있는 샤도우. 그만큼 강해진 녀석이 순식간에 기사처럼 생겨 멋들어진 골렘을 덮친다.


       


       한껏 몸집을 부풀려 통째로 골렘을 집어삼킨 샤도우. 그 안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까드득. 카각.


       


       그렇게 샤도우가 다시 본래의 몸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바닥에 흩어진 약간의 부스러기뿐이었다.


       


       “어, 어떻게 그 불사의 짐승을….”


       


       경악하는 모르가나. 양손을 가슴께 앞에서 맞잡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며 이죽였다.


       


       “닭장♡ 노괴♡ 기술이니 학문이니 하지만 진짜 기적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허접 마법사♡”


       


       작정하고 쥐어짠 달콤한 목소리. 하지만 자신의 마법으로 불로불사를 이루고자 했을 정도로 자부심 가득한 모르가나에겐 세상 무엇보다도 꼴받는 목소리이리라.


       


       “마법 그런 거 왜 배워? 기도 딸깍이면 다 없던 일이 되는걸?”


       


       “……죽여버리겠다!”


       


       이번에는 스태프를 높이 들어 올리는 모르가나. 그 끝에 달린 보석에서 투명한 광채 그 자체가 뿜어지더니 그녀의 등 뒤로 무수히 많은 균열이 생겨난다.


       


       조금 전보다는 확연히 작고 약해 보이는 골렘과, 가동하기 시작한 대포를 닮은 마도구들.


       


       공간을 직접 뒤트는 마법이 아닌, 순수한 물리력과 파괴력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당연히 이런 건 성역으로도 막을 수 없지. 하지만.


       


       “저건 나랑 샤도우가 막을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요나 너는 그사이에 저년을 쓰러뜨려!”


       


       “아핫!”


       


       모르가나의 방심을 유발하거나, 도발하기 위함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이를 위해 처음부터 그렇게 도발하고, 방심시키며 거리를 좁혀왔던 거다.


       


       소매치기 스킬로 얻은 민첩. 그동안 성장한 신체 능력. 성역 안에서 받는 버프. 그리고 최근에 얻은 새끼손톱만 한 오러를 통한 순간적인 강화.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나온 결과는 한 걸음이었다.


       


       단 한 걸음이면 나와 모르가나 사이의 간격을 뛰어넘을 수 있다.


       


       무엇보다 모르가나는 여신의 힘을 경계할 뿐, 나라는 사람 자체는 전혀 경계하고 있지 않으니 적어도 한번은 확실하게 닿을 수 있다.


       


       넘어질 것처럼 몸을 기울인다. 급격하게 앞으로 쏠리는 무게중심. 이에 버텨내듯 다리를 길게 뻗으며, 단 한 번의 발길질에 오러를 전부 격발시켰다.


       


       팡!


       


       내가 해놓고도 깜짝 놀랄 정도의 속도. 어느새 팔 뻗으면 닿을 위치까지 가까워진 모르가나의 눈이 커진다.


       


       하지만 그녀는 명실상부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마법사.


       


       체내에 품은 마나는 존재 자체로 주인의 몸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 동격의 기사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2층의 모험가 하나 때려죽이기엔 충분하겠지.


       


       그래. 평범한 2층의 모험가라면 말이다.


       


       쐐애액!


       


       위협적인 속도로 휘둘러지는 스태프. 이를 향해 비어있는 손을 뻗었다.


       


       손끝이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속하는 움직임. 오랜만에 본업에 나선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모르가나에게서 스태프를 소매치기했다.


       


       “어…?”


       


       당황한 모르가나. 이대로 유니콘 단검으로 심장을 찌르면 끝…이지만, 아쉽게도 이는 불가능하다.


       


       단검을 꺼내기도 전에 들키는 바람에 성역을 먼저 전개했기 때문.


       


       아공간 반지도 일단 공간 마법인 터라 성역의 유지 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열 수 없다.


       


       그러니 이번에는 다른 무기를 쓰는 수밖에.


       


       묵직한 왼손을 들어 모르가나의 가슴께를 겨누었다.


       


       “뒈져.”


       


       손목을 까딱이는 것으로 발사된 석궁.


       


       쐐애액!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 동시에 모르가나의 로브가 밝게 빛났으나, 빛나기만 하고 방벽이 생성되지는 않았다.


       


       샤도우의 이빨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고 짐작했는데…역시나 로브에 인챈트 된 마법도 공간 마법인 모양.


       


       결국 무방비한 상태로 평범한 화살에 심장을 꿰뚫린 모르가나.


       


       “커헉…! 내, 내가 이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모르가나. 이내 그녀의 눈동자에 표독함이 차오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주먹을 꽉 쥐고 그대로 무언가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는 모르가나.


       


       등 뒤에 가만히 서서 위압감을 흩뿌리던 반투명한 단두대의 날이 떨어져 내린다.


       


       서걱.


       


       단두대에 걸어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들려오는 무언가 잘리는 소리.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무언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대로 시간을 주면 녀석은 최후의 발악을 이어갈 것이다.


       


       경지가 높은 이는 생명력이 질겨지고, 그만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유예가 길어지니까.


       


       그러니 필요한 것은 확인 사살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뒤져!”


       


       빼앗은 스태프로 모르가나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빠악!


       


       “베니랑 샤도우를 실험체 삼는 데 성공해도 어차피 넌 실패하니까 그냥 뒤지라고!”


       


       빠악! 빠악!


       


       끄트머리에 달린 투명한 보석에 모르가나의 정수리가 오목해졌다.


       


       눈을 까뒤집은 것을 보아 죽은 것 같긴 한데…혹시 몰라 계속해서 내리쳤다.


       


       일단 불로불사에 관해 연구하던 녀석 아닌가. 무언가의 보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퍼억! 퍼억! 철퍽! 


       


       무언가 깨지는 소리. 타격음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하고, 튀어 오른 핏물이 내 볼을 뜨겁게 적실 무렵이 되어서야 손을 멈추었다.


       


       좋아. 이쯤 했으면 듀라한으로 되살아 나지도 못하겠지.


       


       만족스레 웃으며 모르가나였던 것을 한차례 걷어차고는 뒤를 돌았다.


       


       “베니! 우리가 이겼어요!”


       


       “…앗, 응.”


       


       어쩐지 질린 표정의 베니가 내 시선을 피했다.


       


       너무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무튼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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