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포근하고 따듯한게 굉장히 편안했다.
말랑거리면서도 딱딱한 촉감.
부드러운 향기까지.
몸 상태 마저도 개운했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사라져 버린 기분이랄까?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놈이 아주 호사를 누리는구나.”
오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풍겨 오는 맥주냄새.
드워프인가?
“하이엘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다니. 드워프인생 별꼴을 다 보는군.”
아, 이게 허벅지였구나.
어쩐지 베개와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싶었다.
“…허벅지?”
번뜩.
눈을 뜨니 보이는 얼굴.
맑은 눈동자와 오뚝한코.
하얀 피부에 앵두 같은 입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싱긋 –
“일어나셨어요?”
“어어…?”
매일보는 얼굴이지만 밑에서 올려다 보니 색달랐다.
그리고.
쏘옥 –
세레나의 머리 옆으로 고개를 내미는 루나.
“빠? 일어나쪄?”
“루나야!”
퉁퉁부어오른 두 눈.
울었던 것이 확실했다.
내가 갑자기 기절해 버려서 그런 걸까?
“빠, 아파? 루나가 치료해 주께!”
치료?
성녀인 루나가 못할 건 아니지만, 루나는 아직 신성력을 다루는 법을 모르지 않나?
세레나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크리스가 쓰러지고 루나가 신성력을 다루기 시작했어요.”
“신성력을?”
“많이 놀랐었나 봐요. 아직은 어려워하지만…”
세레나의 목을 잡고 매달려 있던 루나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꺄륵!”
번쩌어어억 –
“….????”
눈부신 정도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온몸에 차오르는 힘.
나른해지는 근육들.
“또! 또!”
버언쩍!
“빠! 이제 안 아파?”
아프고말고 할게 없었다.
막말로 이 정도의 신성력이면 칼 한번 맞아도 금방 나아버리지 않을까?
“아푸지마!”
어안이 벙벙한순간이다.
아기들은 자고 일어날 때마다 큰다지만, 하루하루 성장이 놀라울 만큼 빠르지 않은가?
이러다가는 정말 어느새 다 커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루나가 언제 이렇게 세라나랑 친했지?
나 말고는 업히지 않는 줄 알았는데?
루나가 꾸물꾸물 나에게 내려왔다.
“언니 조아! 언니가 까…”
“응?”
“꺄륵! 비밀이야!”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에게 비밀이라니?
루나가 나에게 비밀이라니?
그리고 실제로도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쿠웅 –
빠지직 –
오도독.
“하….아까부터 이게 무슨 소리야?”
자고있을 때부터 들리던 소리였다.
때리고 부수는 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드잔트가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갑옷을 덕지덕지 입고 있는 드잔트.
도끼와 몽둥이 같은 것들을 들고 있는 오크.
“어이, 오크! 여기 어깨 부분을 다시 때려 봐라.”
“취이익!”
나무몽둥이가 휘둘러지고, 갑옷에 닿자마자 부서져나갔다.
콰지직 –
“이런 멍청한 몬스터를 봤나! 도끼로 내려쳐야 할 거 아니야?”
“취익! 기다려라!”
다시 드잔트의 어깨에 휘둘러지는 도끼.
콰치잉 –
퍼석.
도끼가 통째로 부서져 버렸다.
“흐음, 아직은 충격 흡수가 미흡하군.”
“취이익! 내 주먹은 도끼보다 단단하다!”
도끼가 부러진 오크가 췩췩거리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 갑옷에 상처 하나 내지못한 것이 분했으리라.
부웅 –
휘둘러진 주먹이 투구를 쓰고 있는 드잔트의 뒤통수에 직격했다.
오도독 –
“취이이익! 부러진 거 아니다!”
“나르쿠! 주먹 부서졌다! 이제 약하다.”
“부서진게 아니라 잠시 뼈가 흩어진 것이다!”
지랄도 가지가지였다.
도대체 저게 뭘 하는 짓이란 말인가?
“드잔트씨가 만들고 있는 물건이 있다고 하네요.”
“음?”
“파라몬님과 클로셀님의 부탁으로 만드는 중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지금 저렇게 인체실험을 진행하는 중이란 말인가?
“영감님들은 언제왔어?”
“어제 왔어요. 화가 잔뜩 나서 오셨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분명히 오크의 영혼에게 말했다.
후회할 것이라고.
인간이 오크와 마주치면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도망을 가던가 죽여없애던가.
큰일이야 없을 걸 알지만 그래도 진땀 좀 뺐지 않으려나?
“그래서 지금 어디 있어? 다친 오크는 없고?”
“다행히 두 분에게 다친 오크는 없지만…스스로 다치고 있을거예요.”
“….?”
그러고 보니 기절하기 직전에 개판이 나버렸었다.
자기들끼리 치고 받으며 날뛰던 오크들.
그걸 아직도 하는건가?
“가 보자.”
루나를 안아 들고 얼마 움직이지 않아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취이익! 더 싸워라!”
“구,굴락 오크들 전부 죽는다!”
“아직 안죽는다! 죽기직전에 알려준다!”
오크들의 상태가 말이아니었다.
굴락이 펄쩍펄쩍 뛸 때마다 눈이 벌게지는 오크들.
심지어 굴락이 능숙하게 그것들을 다루고 있었다.
“취익! 죽기직전까지만 싸워라!”
그 옆에서 영감님들이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자네 왔는가? 빨리 이걸 좀 설명해보시게.”
“영감님?”
클로셀 영감님도 상태가 이상했다.
미쳐날뛰는 오크들 처럼 잔뜩 흥분한 모습.
“도대체 어떻게 오크가 굿을 하는 것인가? 지금 보이는 저것들은 다 뭐고?”
“그…좀 복잡한데…”
오크들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운명이 걸린일이다! 취이익! 더 싸워라! 불꽃을 피워야 한다!”
굴락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영감님들한테 위협이라도 당한 걸까?
그때 나를 발견한 굴락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울상을 지으며.
“인간샤먼! 큰일 났다!”
“응?”
“선조의 영혼이 사라졌다! 당장 저길봐라!”
굴락이 가리킨 곳은 불꽃이 타오르는 곳.
“어, 그러네? 없네?”
“취이익! 그러네가 아니다! 선조의 영혼이 오지 않는다!”
무려 발을 동동구르면서 말하는 굴락.
영감님들이 대놓고 신기하게 그걸 관찰하고 있었다.
“라몬, 자네가 저놈을 죽였으면 마법사들이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네.”
“그래서 먼저 물어보고 행동하지 않았나?”
“검을 뽑고 다 죽일 기세로 말인가?”
이 영감탱이들이 내가 기절한동안 도대체 뭔짓을 하고 다닌 거야?
오고 가는 농담과는 별개로 굴락은 미치기 직전인 것 같았다.
샤먼에게는 큰일 일테니.
“당분간 못 올걸?”
“취익?”
신가물에 함부로 침입을 한 영혼.
지금쯤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느라 힘을 많이 쓴것 같기도 했고.
“다시 올 거야, 영혼을 회복시키려고.”
“취익? 확실한가?”
“할머니가 나쁘게 보지는 않으시네. 애초에 그랬으면 너도 죽었을 걸?”
“취익?”
오크들의 일이야 시간이 나면 해결이 될 것이니 젖혀두고.
영감님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샤먼의 영혼이 저에게 옛날 기억을 보여줬어요.”
“호오?”
“영혼이 살아있을 때의 기억이니까 대략 오백년 전쯤?”
“오백년이란 말인가…흐음.”
클로셀영감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명해 주겠는가?”
“오크들이랑 언데드가 전쟁 중이었고, 마족들이 있었어요.”
마족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어느새 따라와 있는 드잔트도, 세레나 역시도 말이다.
“그 당시의 성자도 보였고요.”
제일 중요한 것이 남았다.
도저히 내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
생자도 망자도 아닌 해괴한 것.
“리치도 함께 있더라고요.”
“….!”
클로셀 영감이 두 눈을 부릅떴다.
“리치라 하였는가? 혹시, 그것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는가?”
“아니요. 당시의 모습만 볼 수 있었어요.”
파라몬 영감님이 슬며시 손을 휘저었다.
“나와 로셀은 이미 그자와 많이도 싸웠네. 성기사들과 함께 이긴 적도 많았지.”
“…”
“아주 오래된 악연이라네. 최후의 전투가 있기까지 끊임없이 싸웠으니 말일세.”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대륙전쟁 때의 일은 다들 말하기를 꺼려하는 분위기였으니까.
마족에 관한 이야기만 넌지시 들었을 뿐.
제대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도 한계가 있다.
평민들은 대륙전쟁의 전후 사정은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할 뿐이고 네크로맨서들은 전쟁을 일으킨 나쁜 놈인 것이니까.
“리치는 목을 베어내도 죽지를 않는다네. 그놈의 육체를 갈가리 찢어놓아도 마찬가지네.”
애초에 살아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놈이니 그럴 것 같았다.
“라이프 포스 베슬이라는 것이 있네. 리치의 영혼을 담아 놓는 그릇이지. 그걸 파괴해야 놈이 사라지네.”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
곧 이어 영감님이 설명을 이어갔다.
“네크로맨서들의 수장이라 하면 다들 마족이나 마왕을 생각하겠지만.”
“….”
“마족과 마왕의 소환을 진두지휘하는 건 그놈일세.”
마족과 마왕의 소환.
지금까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줄곧 궁금했다.
“도대체 그걸 소환해서 뭘 하는 건가요?”
클로셀 영감이 이상한 표정을 짓다가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군. 자네라면 당연하게 모든 걸 알고 있을거라 생각했네. 평민이었다는 걸 깜빡했군.”
“…예?”
지금 내 위치가 애매하긴 하다.
온갖 큰일에는 다 연루가 되어 있으며, 같이 다니는 사람들도 범상치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큰 인물들과 얽히고 있는 것.
평민이 하고 다니는 일이라 보기에는 심각하게 이상했다.
“지금부터 말해 줄 것은 사람들이 모르는 극비의 정보라네. 자네가 감당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듣겠는가?”
당연한 소리 아닌가.
내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일 텐데.
“말해주세요.”
안녕하세요!
히로인과의 스토리를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께 알립니다!
세레나가 히로인의 포지션을 가졌음에도 분량이 적은 이유는…
단순히 작가인 저의 연애경험이 적어서 그렇습니다….!
여러작품들을 읽으며 공부하는 중이니 꼭 이쁜 이야기들도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