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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8

       내 말을 들은 프란체는 뚱한 표정으로 빠르게 눈을 끔뻑였다.

         

       “잠깐, 다른 건 알겠는데 공작가의 기사단까지 전부 물갈이한다고?”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카르트 공작가의 기사들은 공녀님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공녀님의 가문이 될 텐데, 그런 기사들을 둘 순 없지 않습니까?”

         

       이 공작가의 기사들은 오래전부터 프란체를 무시했다. 지금은 힘이 생겨 고개를 숙이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거다.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것뿐이다.

         

       “다 죽이겠다는 건 아니지…?”

         

       어허, 나를 무슨 미친 사이코패스로 아시네.

         

       “그럴 리가요. 저도 엄연히 사람입니다.”

         

       프란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물갈이라고 해서 내가 다 죽인다는 줄 안 건가.

         

       “그래, 어떤 작전인지는 대략 알겠어. 재난 상황에 데카르트 공작가의 무능함을 보여줘서 현재 체제를 무너트리자는 말 아니야?”

         

       잘 이해했구나. 나는 “맞습니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근데 그래도 후계자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내가 여자라는 점도 있고, 막내라는 점도 있으니까.”

         

       맞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걸 더 준비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따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으니.”

         

       프란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둔 방법? 그건 뭐니?”

       “이건 비밀입니다.”

       “…궁금하게 만드는 건 여전하구나.”

         

       이번에는 내가 재밌으려고 비밀에 부치는 게 아니다. 정말 말 못 하는 것일 뿐.

         

       “그러면 재앙의 파도에 나도 참가해야 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저를 제어한다는 목적으로 공녀님도 참여하게 되실 겁니다.”

         

       미간을 좁힌 채 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는 프란체.

         

       “흠. 재앙의 파도는 처음인데. 마법으로 싸워본 적이 없기도 하고.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구만.

         

       “공녀님은 라데아와 후방에 계실 겁니다.”

       “그러니?”

       “그렇습니다.”

         

       재앙의 파도 같이 마수가 쏟아지는 위험한 곳에 절대 프란체를 보낼 순 없지.

         

       프란체는 평온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곤 “근데 있잖아.”하며 내게 질문했다.

         

       “네가 마수로 위장하고, 케일이 너를 연기할 거라 했잖아?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건 어떻게 할 예정이니?”

         

       그건 뭐, 간단하지.

         

       “케일의 얼굴을 가리는 갑옷을 준비할 겁니다. 동시에 제 정체를 가려줄 갑옷도 준비할 거고요.”

         

       프란체는 “갑옷?”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케일은 머리와 얼굴만 가릴 수 있는 가벼운 사슬 갑옷을 입을 겁니다. 반대로 저는 온몸을 가리는 칠흑의 갑옷을 입을 거고요.”

         

       마수를 위장하는데 칠흑의 갑옷이 나오니 이번에도 의문을 표하는 프란체.

         

       “칠흑의 갑옷을 입은 마수가 있니?”

       “있습니다. ‘혹한의 망령’이라 합니다.”

         

       프란체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려졌다. 어째 오늘 놀라기만을 반복한다.

         

       “…혹한의 망령이라면, 그 신화 속의 마수를 말하는 거니?”

         

       나는 “그렇습니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한의 망령은 인간형, 기사 컨셉을 가진 히든 보스인데, 말도 안 되는 난이도와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명 마수들의 재앙이다.

         

       “그럼 기사들이나 다른 병사들도 위험하지 않을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이니까요.”

         

       데카르트 공작가의 전선을 무너트릴 생각이지, 학살하려고 마수를 위장하는 게 아니다.

         

       ‘사실 할 건 하나 더 있지만.’

         

       그건 나중에 프란체도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 지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이제 마지막 단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어?”

       “이거론 부족하니까요.”

         

       프란체는 테이블에 팔을 걸며 내 말에 경청했다.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데카르트 공작가는 역사상 가장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체제가 무너지고 두터운 신뢰를 잃었으니까요.”

         

       나는 검지를 치켜세우며 “여기서 공녀님이 등장하시는 겁니다.”하곤 말을 이어나갔다.

         

       “황실의 신뢰를 받고,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것도 모자라, 저를 움직일 수 있는 공녀님의 등장은 데카르트 가문에게 구원자로 보일 겁니다.”

         

       프리다를 무너트렸을 때와 비슷한 방법이다. 상황을 만들고, 연출을 뽑아내는 것.

         

       위기 상황에 극적인 연출을 이용해 등장하는 영웅은 어디서나 환영받는 법이다.

         

       “근데 그 계획에 구멍이 있어.”

       “무엇입니까?”

         

       눈썹에 힘이 들어가 다소 진중해진 프란체.

         

       “네가 있는데 우리 전선이 무너진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아.”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 문제는 괜찮습니다. 그 부분에서도 계획이 있으니까요.”

         

       프란체는 “그건 또 무슨 계획이니?”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재앙의 파도는 구역을 정해서 전선을 유지합니다. 여기서 제가 노릴 곳은 오로지 최전방이자 핵심인 본대입니다.”

         

       다른 곳은 건드리지 않고 공작과 에덴이 있는 곳만 무너트린다. 이것만으로 명예를 실추하는 건 가능할 거다.

         

       “그러면 다른 곳도 무너지게 되고, 결국 데카르트 공작가의 병력은 후퇴할 수밖에 없겠죠.”

         

       한 마디로 도미노와 같다. 한곳이 부서지면 나머지도 우르르 무너지는 게 전선이니.

         

       “그럼 민간인 피해가 막대하지 않을까?”

       “여기서 공녀님이 등장하시는 거죠.”

       “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데카르트 공작가의 본대가 전투 불능 상태로 후퇴하면 저와 케일, 라데아를 중심으로 공녀님께서 전선을 지휘하실 겁니다.”

         

       프란체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내가 전선을 지휘한다고?”

       “말이 지휘지 그냥 시간 끌기입니다.”

         

       적당히 연출만 하면 된다. 어차피 재앙의 파도는 내가 금방 정리할 거니까.

         

       “흐음. 알 거 같으면서도 뭔가 잘 모르겠는데. 일단 네 계획이니 알겠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

         

       프란체는 입술을 삐죽이며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제대로 이해한 거 맞지? 

         

       ‘그때가 되면 다시 브리핑해야겠네.’

         

       뭐, 아무튼.

       

       내가 진 바렌베르크로서 해야 하는 마지막 임무, 프란체 가주 만들기.

         

       이 일이 끝나면 우리는 헤어진다.

         

         

       * * *

         

         

       시각은 점심.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프란체는 룬어 해독에 들어갔다. 페이지를 보니 여전히 중반부에서 막혀있는 듯하다.

         

       “공녀님, 가벼운 산책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 말에 프란체는 안경을 벗고 미간을 주물렀다.

         

       “그럴까? 눈이 아픈 걸 보니 최근에 너무 책만 본 거 같네.”

       “그럽시다. 겨울이 오면 가볍게 나가기도 힘들 테니까요.”

         

       프란체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가자. 헬레나를 불러주렴.”

       “예, 알겠습니다.”

         

       문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헬레나를 부르고, 프란체는 금방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그렇게 저택을 나오고, 우리는 공작령을 거닐기 시작했다.

         

       “점점 쌀쌀해지는구나.”

       “곧 겨울이니까요.”

         

       나뭇잎들이 점점 노랗게 변하고, 바람은 서서히 차가워져 간다. 지금은 이별이라는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추억을 만들어줄 가을이라는 계절이다.

         

       “이렇게 걷고 있으니 새로운 기분이네.”

       “전과는 뭔가 다릅니까?”

       “그래. 보이지 않았던 것까지 보이는구나.”

         

       그리 말하곤 나를 바라본다. 싱긋 웃는 프란체.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풍경에 잘 어울린다.

         

       “가을의 공작령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예전과는 달리 상황이 좋아져서 그런지 시야가 넓게 보이는구나.”

         

       프란체는 내 손에 깍지를 낀 채 그대로 올려 자신의 뺨에 비볐다.

         

       “다 네가 오고 나서 바뀐 거야.”

         

       작은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짓는 프란체.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녹음의 눈동자에는 내가 비추어져 보였다.

         

       그곳의 나는 애틋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를 데려오신 건 공녀님이시잖습니까. 모든 건 공녀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시선을 돌리곤 멋쩍게 웃었다.

         

       “부끄럽니?”

       “그건 아닙니다만…….”

       “부끄러운 거구나.”

         

       이내 고개를 내밀며 배시시 웃는 프란체. 아무것도 모르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울컥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씁쓸하더라도, 쓰더라도 미소는 미소니까.

         

       “겨울이 오면 수확제도 같이 보내야겠네.”

       “수확제 말입니까?”

       “그래.”

         

       ‘로판소’의 수확제. 단순히 말하자면 성탄절이라 보면 되겠다.

         

       “여신님이 오신 날에 항상 혼자서 창밖만 바라봤는데, 이젠 같이 보낼 사람이 있어서 좋아.”

         

       가슴이 답답하다.

         

       “그간 혼자였으니 이제 가고 싶은 곳이 많아. 해보고 싶은 것도 많지.”

         

       죄책감에 속이 울렁거린다.

         

       “나는 예전과 달리 혼자가 아니야. 모두가 있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네가 있으니까.”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습니까.”

       “그래, 너는 내게 내려진 축복이야.”

         

       마치 부모님과 산책을 나온 어린아이처럼 가을을 거닐며 바람을 맞이하는 프란체.

         

       고민에 잠긴 듯이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멀뚱멀뚱 서 있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바라봤다.

         

       “파티장에서 네가 말했지? 내가 가진 감정에 대해서 좀 더 오래 생각하고, 고민해보라고.”

         

       나는 “그랬었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생각한 게 맞아.”

         

       안 된다.

         

       “너는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꿨어. 생명의 은인이면서 나의 구원자야.”

         

       나는 그 마음에 보답해줄 수 없다.

       

       “네가 좋아, 진.”

       

       프란체는 환하게 웃으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번 일이 끝나면 내 힘으로 바렌베르크를 해방해 지방 세력으로 만들 거야. 그렇게 되면 내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으련?”

         

       따스한 미소로 내게 묻는 프란체. 내가 어떻게든 미루고 미뤘던 감정에 결국 마침표가 찍혔다.

       

       “…….”

         

       바렌베르크의 해방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모든 계획의 끝에 있는 프란체는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

       

       이대로만 가면 정말 함께할 수 있다만…….

         

       “저는…….”

         

       당장이라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프란체와 같이 있고 싶다. 그러나 입술만 달싹여졌을 뿐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너와 함께하면 이 마음을 공유한 나는 사라지니까.

         

       “저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답은 뭐야? 애매하게.”

       “말 그대로입니다.”

       “받아들인 거로 생각해도 되는 거지?”

       “…….”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대답하기 부끄러운 거구나? 너는 생각보다 숫기가 없다니까.”

         

       차디찬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흩날리고, 그간의 추억과 곧 생겨날 아픔이 마음 한구석에 스며들었다.

         

       같이 걷던 길 위에는 낙엽들이 쌓여갔다. 한 잎, 한 잎, 남은 이별의 시간을 알려주듯 떨어져 내렸다.

         

       가을은 변화와 고요함의 계절인데, 그 안에서 우리는 손끝에서 흘러내린 낙엽처럼 멀어져갔다.

         

       “…지금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습니다.”

         

       변화의 계절에서 영원을 염원한다.

         

       욕심이었다.

         

       “그러니?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환하게 빛나는 미소가 애틋하게 다가와 가슴을 옥죄인다.

         

       ‘이럴 줄 알았어.’

         

       언젠가는 발걸음을 떼야 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고, 다양한 감정을 공유했으며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정을 줘버렸다.

         

       그 결과로 망설임이라는 족쇄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있다.

         

       “바람이 차갑네요. 슬슬 돌아가시죠.”

       “벌써?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가벼운 산책이었으니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프란체는 익숙하다는 듯이 손을 잡았다.

         

       “그래, 돌아가자.”

       “예.”

         

       우리는 손을 맞잡고 공작저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도 계속 떨어지는 낙엽은 마치 이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시계와 같았다.

         

       내가 없는 봄이 와도 너는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까.

         

       프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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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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