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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9

       “…그래서 가출해서 찾아온 곳이 여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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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이의 녹색 눈동자가 황당하게 나를 바라본다. 가출이라는 표현이 조금 애매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고서는 짐을 방안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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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당분간 저 좀 재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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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은 따로 챙겼니? 침대는 하나밖에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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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뇨, 클로이님이 바닥에서 주무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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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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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이는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데없이 손님이 들어와 방주인의 잠자리를 쫓아내니 황당하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니고 클로이는 나한테 아무런 불만도 가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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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한테 잘못하신 거 하나 있으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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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망이 한가득 담긴 나의 시선에 클로이의 몸이 움찔 떨려왔다. 깊게 동요하는 그녀의 눈을 보아하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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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대공령에서 나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클로이님 때문인 건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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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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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에 클로이가 멋대로 내 몸에 그런 짓을 해놓지만 않았더라면, 아가씨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가씨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아가씨에게 그런 권리를 준 클로이도 잘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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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을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스위치가 손에 쥐어져 있으니 아가씨가 자신도 모르게 난폭해지신 거지. 만약 클로이가 내 몸에 이상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면 아가씨와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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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그때 아가씨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몰라서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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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이님이 하신 짓이 베르놈이 저한테 한 짓과 별 다를 바 없는거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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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그건 아니지. 그 애송이 자식은 흑마법으로 시체를 되살린 게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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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이는 저를 한 개의 인형으로 만드셨고요. 저는 클로이님을 믿고 몸을 맡긴 건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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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날카로운 지적에 클로이는 아무런 반론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을 입을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이내 깊게 한숨을 내쉬고 두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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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한데 내가 침대가 없으면 못 자서, 이불을 하나 구해줄 테니 그곳에서 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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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푹신한 걸로 주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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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몸을 멋대로 인형으로 만들어놓고 양심은 있었는지, 클로이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은 그녀에게 삐져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클로이도 아가씨의 권력 앞에서는 선택권이 없었을 테니 넘어가 주기로 했다.

       ​

       소파 위에 몸을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선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낼 테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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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

       클로이가 차 한잔을 건네며 맞은편에 앉았다. 차를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혀끝에서 살짝 느껴지는 떫은맛, 아무래도 위대한 연금술사라 불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차는 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일들이 꽤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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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이에게 검은 달에서 사건 이후 아가씨가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해주었다. 한층 차갑게 변하고, 나를 지켜준다는 명목하에 부끄러워 죽을만한 일들을 강압적으로 행했고, 결국 버티지 못한 내가 대공령에서 나왔다는 걸 전부 말했다.

       ​

       “너의 입장에서는 꽤 당황스러웠겠네.”

       ​

       나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클로이는 차 한잔을 마시고선 짧게 감상평을 돌려주었다.

       ​

       “그렇다니까요, 특히 마지막에는 제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아가씨도 너무했어요.”

       ​

       “근데 앨리스, 혹시 기분이 나빴니?”

       ​

       “네?”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의도로 질문을 물어본 걸까. 기분이 나빴냐니, 그거야 당연한 게 아닌가?

       ​

       “그런 짓을 하는데 나쁜 게 당연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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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적 기분을 물어보는 거야. 아가씨가 널 그리 대할 때 많이 불편하고 아팠어?”

       ​

       “그거야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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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인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

       잠시 그때의 감각을 되살펴 보았다. 아프거나 불편하다기 보다는,뭔가 강렬하고 못 버티고 터질 것 같은 감각이었는데, 그게 기분이 나빴냐고 물어본다면….

       ​

       ‘아니, 왜 고민하고 있는 거야.’

       ​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어 외딴섬으로 가는 이성을 다시 붙잡아 세웠다. 이딴 걸로 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 강압적으로 대하는데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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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나빴죠. 제가 변태도 아니고 그런 짓을 좋아할 리 없잖아요.”

       ​

       “…아니던데.”

       ​

       클로이는 나의 시선을 잠시 피한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왜인지 시원찮은 그녀의 대답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

       “아무튼, 제 몸에 건 주술이든 마법이든 뭐든 도로 되돌려놓아 주세요.”

       ​

       일단 가장 중요한 건 몸에 걸린 주술부터 풀어야 한다. 몸에 새겨진 그것이 없어야 아가씨와 다시 대화하든 말든 할 테니 말이지.

       ​

       “음…그게 사실 이 원리가 육체 내부에 각인을 새기는 거거든?”

       ​

       하지만 클로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한없이 맥 빠지는 목소리였다. 한층 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클로이는 두 손을 가로저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

       “베르놈 같은 애송이는 문제가 없지만, 네 몸에 새겨진 각인이 아가씨의 마나로 새겨졌어. 그래서 그 술식을 파괴하려면 보다 높은 질의 마나가 필요한데 말이지?”

       ​

       “…그런데요?”

       ​

       “우선 나는 어림도 없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가씨보다 마나의 격이 높을 만한 사람이 당장은 멜리안느 정도밖에 안 떠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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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리안느 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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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멜리안느는 대현자라 불리는 그녀밖에 없었다 . 이전에 아카데미 지하 묘지에서 우연히 멜리안느의 잔상과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지. 근데 그녀가 아니라면 이 술식을 풀 수 없다고?

       ​

       “그, 그럼 지금 당장 해제 못하는 거예요?”

       ​

       “뭐, 아가씨가 직접 해제해주거나, 아니면 아가씨가 갖고 있는 그 목걸이를 파괴하면 된단다.”

       ​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단 말이에요!”

       ​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또다시 나의 몸에 이상한 짓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출귀몰하다 언급된 멜리안느를 찾아다니는 건 더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지.

       ​

       “혹시 클로이님은 멜리안느님이 어디 계신 줄 아시나요?”

       ​

       “아니? 걔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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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겠지. 손짓 한 번에 대륙을 이동할 수 있는 대마법사를 무슨 수로 찾아다닐까. 하늘에 떠 있는 별은 그 자리에 있기라도 하지, 멜리안느는 완벽한 우연이 아니라면 도저히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

       “근데 너무 상심하지는 마렴. 내년까지는 풀어줄 수 있을 거니까.”

       ​

       “내년이요?”

       ​

       “응, 무슨 그 까탈스러운 마법사가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지만, 내년에 아카데미 교수직으로 들어간다더라.”

       ​

       “아.”

       ​

       그래, 분명 그랬었지. 클로이의 말에 원작 일부분의 내용이 떠올랐다. 여주인공의 우연인지 혜택인지 몰라도, 딱 루시가 입학하는 해에 세기의 대마법사라 불리는 멜리안느가 아카데미의 교수로 들어오는 역대급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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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리안느는 루시에게 흠뻑 빠지게 되고, 수천 명들의 마법사들이 혈안을 하고 애타게 원하는 그녀의 조수석을 루시가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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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에 내가 멜리안느에게 부탁할게. 나의 말이면 들어줄 거니 그때 풀 수 있을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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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내년까지는 못 푼다는 말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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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아가씨가 자체적으로 풀어준다 하면 가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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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각인을 해제하고 아가씨와 다시 마주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렇다고 내년까지 아가씨를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가씨가 교복을 입고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모습은 꼭 봐야 한단 말이야.

       ​

       “…어휴.”

       ​

       이 와중에도 아가씨 생각이라니, 나도 참 중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아가씨를 위해서도 당분간은 서로 떨어져 있는 편일 테니, 그동안 천천히 생각해보면 되겠지.

       ​

       ‘…그럼 지금부터 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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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파에 드러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선 패기롭게 대공령에서 나오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나오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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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 생활이라도 즐겨보지 그러니?”

       ​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건지, 클로이가 옅은 미소로 말을 건넸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백수 생활이요?”

       ​

       “그래, 모처럼 얻은 휴식 기간이지 않니? 솔직히 아가씨도 좀 걱정되긴 하지만, 내심 너도 네 인생을 좀 챙기길 바랐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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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 

       ​

       전생에서부터 꿈만을 위해 뼈 빠지게 일했던 나에게는 낯선 단어였다. 애초에 부모도 없는 고아에 가난에 시달렸던 나에게 백수라는 직업은 너무나도 부러운 사치였다.

       ​

       알바와 알바 사이 시간마다 소설을 읽는 것을 제외하곤 별다른 취미도 없었기에 굳이 쉬어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었지.

       ​

       이곳에 빙의하고도 몇 년 동안 계속 하녀 일만 했었지. 클로이의 말대로 잠깐은 푹 쉬면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

       보통은 쉬게 되면 좋아하던데, 왜인지 나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할 뿐이었다. 오히려 할 일이 없으니까 더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

       ‘백수 생활….’

       ​

       백수는 뭘 해야 하지?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낙낙서서님 후원 감사해요!

    이렇게 또 다시 후원이라니,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독자님께서 재밌게 읽어주시는 것 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

    그럼에도 항상 이렇게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편도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My Little Grand Duchess

My Little Grand Duchess

나의 어린 대공녀님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Northern Duchess.”

A ruler who dominates the frigid land with an iron fist. A ruthless slaughterer who spares no one, whether they be demons or humans.

There’s something peculiar about the way she looks a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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