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가출해서 찾아온 곳이 여기라고?”
클로이의 녹색 눈동자가 황당하게 나를 바라본다. 가출이라는 표현이 조금 애매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고서는 짐을 방안에 내려놓았다.
“네, 당분간 저 좀 재워주세요.”
“이불은 따로 챙겼니? 침대는 하나밖에 없단다.”
“아뇨, 클로이님이 바닥에서 주무셔야죠.”
“음? 내가 왜?”
클로이는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데없이 손님이 들어와 방주인의 잠자리를 쫓아내니 황당하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니고 클로이는 나한테 아무런 불만도 가져서는 안 된다.
“저한테 잘못하신 거 하나 있으시잖아요?”
원망이 한가득 담긴 나의 시선에 클로이의 몸이 움찔 떨려왔다. 깊게 동요하는 그녀의 눈을 보아하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 대공령에서 나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클로이님 때문인 건 아세요?”
“….”
애초에 클로이가 멋대로 내 몸에 그런 짓을 해놓지만 않았더라면, 아가씨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가씨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아가씨에게 그런 권리를 준 클로이도 잘못이 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을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스위치가 손에 쥐어져 있으니 아가씨가 자신도 모르게 난폭해지신 거지. 만약 클로이가 내 몸에 이상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면 아가씨와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네가 그때 아가씨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몰라서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뿐이란다.”
“클로이님이 하신 짓이 베르놈이 저한테 한 짓과 별 다를 바 없는거 아시죠?”
“그, 그건 아니지. 그 애송이 자식은 흑마법으로 시체를 되살린 게 아니냐.”
“클로이는 저를 한 개의 인형으로 만드셨고요. 저는 클로이님을 믿고 몸을 맡긴 건데 말이죠.”
나의 날카로운 지적에 클로이는 아무런 반론도 꺼내지 못했다. 한참을 입을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이내 깊게 한숨을 내쉬고 두 손을 들었다
“…미안한데 내가 침대가 없으면 못 자서, 이불을 하나 구해줄 테니 그곳에서 자렴.”
“푹신한 걸로 주셔야 해요.”
남의 몸을 멋대로 인형으로 만들어놓고 양심은 있었는지, 클로이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은 그녀에게 삐져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클로이도 아가씨의 권력 앞에서는 선택권이 없었을 테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소파 위에 몸을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선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낼 테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클로이가 차 한잔을 건네며 맞은편에 앉았다. 차를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혀끝에서 살짝 느껴지는 떫은맛, 아무래도 위대한 연금술사라 불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차는 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일들이 꽤 있었죠.”
클로이에게 검은 달에서 사건 이후 아가씨가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해주었다. 한층 차갑게 변하고, 나를 지켜준다는 명목하에 부끄러워 죽을만한 일들을 강압적으로 행했고, 결국 버티지 못한 내가 대공령에서 나왔다는 걸 전부 말했다.
“너의 입장에서는 꽤 당황스러웠겠네.”
나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클로이는 차 한잔을 마시고선 짧게 감상평을 돌려주었다.
“그렇다니까요, 특히 마지막에는 제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아가씨도 너무했어요.”
“근데 앨리스, 혹시 기분이 나빴니?”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의도로 질문을 물어본 걸까. 기분이 나빴냐니, 그거야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 짓을 하는데 나쁜 게 당연하잖아요?”
“육체적 기분을 물어보는 거야. 아가씨가 널 그리 대할 때 많이 불편하고 아팠어?”
“그거야 당연히-”
왜인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그때의 감각을 되살펴 보았다. 아프거나 불편하다기 보다는,뭔가 강렬하고 못 버티고 터질 것 같은 감각이었는데, 그게 기분이 나빴냐고 물어본다면….
‘아니, 왜 고민하고 있는 거야.’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어 외딴섬으로 가는 이성을 다시 붙잡아 세웠다. 이딴 걸로 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 강압적으로 대하는데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히 나빴죠. 제가 변태도 아니고 그런 짓을 좋아할 리 없잖아요.”
“…아니던데.”
클로이는 나의 시선을 잠시 피한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왜인지 시원찮은 그녀의 대답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아무튼, 제 몸에 건 주술이든 마법이든 뭐든 도로 되돌려놓아 주세요.”
일단 가장 중요한 건 몸에 걸린 주술부터 풀어야 한다. 몸에 새겨진 그것이 없어야 아가씨와 다시 대화하든 말든 할 테니 말이지.
“음…그게 사실 이 원리가 육체 내부에 각인을 새기는 거거든?”
하지만 클로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한없이 맥 빠지는 목소리였다. 한층 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클로이는 두 손을 가로저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베르놈 같은 애송이는 문제가 없지만, 네 몸에 새겨진 각인이 아가씨의 마나로 새겨졌어. 그래서 그 술식을 파괴하려면 보다 높은 질의 마나가 필요한데 말이지?”
“…그런데요?”
“우선 나는 어림도 없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가씨보다 마나의 격이 높을 만한 사람이 당장은 멜리안느 정도밖에 안 떠오르네.”
“…멜리안느 님이요?”
내가 아는 멜리안느는 대현자라 불리는 그녀밖에 없었다 . 이전에 아카데미 지하 묘지에서 우연히 멜리안느의 잔상과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지. 근데 그녀가 아니라면 이 술식을 풀 수 없다고?
“그, 그럼 지금 당장 해제 못하는 거예요?”
“뭐, 아가씨가 직접 해제해주거나, 아니면 아가씨가 갖고 있는 그 목걸이를 파괴하면 된단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단 말이에요!”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또다시 나의 몸에 이상한 짓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출귀몰하다 언급된 멜리안느를 찾아다니는 건 더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지.
“혹시 클로이님은 멜리안느님이 어디 계신 줄 아시나요?”
“아니? 걔가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걸?”
그렇겠지. 손짓 한 번에 대륙을 이동할 수 있는 대마법사를 무슨 수로 찾아다닐까. 하늘에 떠 있는 별은 그 자리에 있기라도 하지, 멜리안느는 완벽한 우연이 아니라면 도저히 마주칠 수 없을 것이다.
“근데 너무 상심하지는 마렴. 내년까지는 풀어줄 수 있을 거니까.”
“내년이요?”
“응, 무슨 그 까탈스러운 마법사가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지만, 내년에 아카데미 교수직으로 들어간다더라.”
“아.”
그래, 분명 그랬었지. 클로이의 말에 원작 일부분의 내용이 떠올랐다. 여주인공의 우연인지 혜택인지 몰라도, 딱 루시가 입학하는 해에 세기의 대마법사라 불리는 멜리안느가 아카데미의 교수로 들어오는 역대급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지.
멜리안느는 루시에게 흠뻑 빠지게 되고, 수천 명들의 마법사들이 혈안을 하고 애타게 원하는 그녀의 조수석을 루시가 차지하게 된다.
“내년에 내가 멜리안느에게 부탁할게. 나의 말이면 들어줄 거니 그때 풀 수 있을 거란다.”
“…그럼 내년까지는 못 푼다는 말이겠네요?”
“뭐 아가씨가 자체적으로 풀어준다 하면 가능하겠지.”
이 각인을 해제하고 아가씨와 다시 마주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그렇다고 내년까지 아가씨를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가씨가 교복을 입고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모습은 꼭 봐야 한단 말이야.
“…어휴.”
이 와중에도 아가씨 생각이라니, 나도 참 중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아가씨를 위해서도 당분간은 서로 떨어져 있는 편일 테니, 그동안 천천히 생각해보면 되겠지.
‘…그럼 지금부터 뭐하지?’
소파에 드러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선 패기롭게 대공령에서 나오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나오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백수 생활이라도 즐겨보지 그러니?”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건지, 클로이가 옅은 미소로 말을 건넸다.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수 생활이요?”
“그래, 모처럼 얻은 휴식 기간이지 않니? 솔직히 아가씨도 좀 걱정되긴 하지만, 내심 너도 네 인생을 좀 챙기길 바랐단다.”
백수.
전생에서부터 꿈만을 위해 뼈 빠지게 일했던 나에게는 낯선 단어였다. 애초에 부모도 없는 고아에 가난에 시달렸던 나에게 백수라는 직업은 너무나도 부러운 사치였다.
알바와 알바 사이 시간마다 소설을 읽는 것을 제외하곤 별다른 취미도 없었기에 굳이 쉬어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었지.
이곳에 빙의하고도 몇 년 동안 계속 하녀 일만 했었지. 클로이의 말대로 잠깐은 푹 쉬면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보통은 쉬게 되면 좋아하던데, 왜인지 나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할 뿐이었다. 오히려 할 일이 없으니까 더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백수 생활….’
백수는 뭘 해야 하지?
낙낙서서님 후원 감사해요!
이렇게 또 다시 후원이라니,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독자님께서 재밌게 읽어주시는 것 만으로도 정말 행복해요.
그럼에도 항상 이렇게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편도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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