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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9

        토츠펠 가의 공녀, 안젤리카 토츠펠.

         

        사대공작가의 일원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특권층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귀족으로서의 예법은 몇 번을 배워도 몸에 익질 않았고, 무엇보다도 귀찮았다.

         

        가문에서 공부하라고 쪼아대던 것도 잔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천재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딱 죽을 만큼 노력하면 틸레트에 겨우 합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안젤리카는 가문의 협박과도 같은 권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틸레트에 응시했다. 그리고 합격했다.

         

        10대의 마지막에서 무언가를 성취해냈다는 뿌듯함도 잠시. 토츠펠에서는 이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토츠펠 가문의 구성원은 대부분 수재였다.

         

        입학성적은 하위권. 그 뒤로도 학점은 올라갈 기미를 안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안젤리카는 공부에 별다른 뜻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저널과 최신식 카메라뿐이었다.

         

        책을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온갖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버리는 천재들과는 연이 없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이번에 들어온 그 엘프 유학생과 금안족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금안족 소녀 같은 경우에는 엄청난 논문까지 써서 내었다고 들었는데, 학문과는 담을 쌓고 지낸 안젤리카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자극과 흥미 위주의 가십거리. 재미있는 이슈와 아카데미 내 사건사고를 다루는 쪽이 훨씬 보람찬 일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올해 후배로 들어온 수석과 차석 입학생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서 어떤 성적을 냈는지는 안 중요하다. 중요한 건 둘이 러브라인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주제…!

         

        “윽…!” 

         

        사고의 흐름이 강제로 끊어졌다.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던 안젤리카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딘가에서 일어났다.

         

        “여긴…….”

         

        사방이 철판으로 가로막힌 어두침침한 공간이었다. 마치 범죄자를 취조하는 방 같았다.

         

        안젤리카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섬찟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스커트 자락을 붙잡고 다리를 움츠렸다.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일어나셨는지요.”

        “히익…!” 

         

        성녀가 말하는 것 같은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곳에는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금색 눈동자가 한 쌍.

         

        마치 죽림에서 호롱불 귀신을 만난 듯한 감각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아니, 귀신보다는 마수다. 절멸급 마수를 만난 것만 같은 공포감의 바다에 빠지기라도 한 듯 숨이 턱 막혀왔다.

         

        “저예요, 저. 에테르. 그렇게 놀라실 것까진 없으신데.”

         

        희미한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흑발금안의 소녀였다. 귀신이나 마수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 하고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여, 여기가 어디죠…?”

        “선배님이 그렇게 취재하고 싶어 하시던 장소입니다. 아까 저 벽 너머로 저와 호르데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잖아요?”

        “그건…….” 

         

        무어라 항변하려고 하던 안젤리카가 말을 멈췄다.

         

        생각해 보면 변명할 필요가 없다. 엿들은 건 엿들었다고 당당히 말하면 된다. 후배 상대로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그보다도.

         

        그보다도……!

         

        “이런 비좁은 공간에서 남녀 둘이 정기적으로 들어왔었다니…. 역시 둘이서 밀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로군요!”

         

        정황상 너무 명료하다.

         

        굳이 안젤리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그러했다. 아무도 없는 시각. 배타적인 동아리 부실에서 혈기 왕성한 두 남녀의 교제! 문예부에 전해주면 좋아라 할 소재였다. 

         

        안젤리카의 말에 에테르와 버멜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둘이서 맥락을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렇게 되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이런 부류의 사람은 뭘 얘기해 줘도 들어먹질 않아.”

        “그래서 다짜고짜 스태프로 때렸다고…?”

        “물리 경감 마법을 걸었으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 로테랑 프레이한테는 말을 잘 해뒀으니까 아마 괜찮을걸.”

        “어휴.” 

         

        스태프로 때렸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으윽…!”

         

        머리가 아프긴 한데. 솔직히 조금 전의 기억이 살짝 모호하긴 하다. 그러고 보면 뭔가 둔기로 맞았었던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안젤리카의 고개가 갸우뚱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에테르가 혀를 쯧 차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선배님. 저희 둘이 사귄다느니 뭐느니 하는 이야기를 교내 신문에 넣으실 계획인가요?”

         

        에테르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분위기 때문에 이리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금안족의 눈이 암흑 속에서도 자체 발광을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알 겨를이 없었다.

         

        솔직히 조금 쫄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말이죠.”

        “사실 아닌데요.”

        “아뇨, 이건 확실한 증거죠! 이런 좁아터진 공간에서 남녀 둘이 시간 날 때마다 모이면 그게 밀회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요?” 

        “이건 선배님이 아는 그런 밀회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밀회가 아니라 공모입니다.”

        “공모…?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네.” 

         

        두 사람은 사전에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2세 계획…?”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버멜과 에테르는 이파리가 썩어들어가는 것처럼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설마 연애했다가 위원회에 회부될까봐 그런 건가요? 에이, 그런 교칙은 느슨해진 지 오래 되었어요! 학업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선생님들도 눈 감아 주시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선배님.”

         

        툭, 하고 내던져진 무거운 말소리.

         

        금안족 소녀의 것이었다.

         

        일순 안젤리카의 숨이 멎었다. 이렇게 날카롭고도 독기 서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과장 안 보태고 말 그대로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선배님.”

        “…….” 

        “대답.”

        “…예?”

         

        에테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신마비의 계절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떤 의미인가요……?”

         

        불길했다. 무언가 말실수를 한 듯한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하늘은 높고, 아카데미생은 과제 폭탄으로 한창 고통받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거죠.”

        “무슨…. 혹시 천고마비를 잘못 말한 거 아닌가요?”

        “아뇨, 선배님. 전신마비 맞습니다.”

         

        에테르는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강철로 연마된 듯한 둔기가 들려 있었다.

         

        아니, 둔기가 아니다.

         

        마도사들의 분신이자, 또 하나의 생명과도 같은 스태프. 그것도 철제로 된 2미터짜리 거대 스태프였다.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던 게 있다. 

         

        이 소녀, 개인 결투에서 제2 황자의 머리통을 박살 낸 걸로 유명했지. 반 년이 넘은 이야기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이템을 쓰려면 마취를 해야 하거든요. 무서운 일은 아니니까 잠시 눈만 감고 계시면 됩니다. 아, 여기 뾰족한 곳 말고 횡단면으로 내리칠 거니까 죽진 않아요.”

         

        숨이 점차 가빠왔다. 방이 하도 좁아터져서 도망갈 곳이 없었다. 어디 구석으로 뒷걸음질 치더라도 모조리 스태프의 사정거리 내였다.

         

        “기억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공포로 뒤덮인 뇌는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안젤리카는 최대한 빨리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잠깐, 제가 잘못했…….”

         

        가을이었다.

         

         

        **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네.”

        “어후….”

         

        어째 황자를 한 번 때려눕힌 이후로 이런 사람들을 보면 주먹이 나가는 것 같다. 

         

        물론 저번과 이번 둘 다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황자와의 대결은 아카데미의 전통 규칙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뚝배기를 깨버린 것이었으니 OK였고, 이번 건 두개골에 손상이 안 가도록 정확히 의식만 잃게 만드는 마도를 사용했다.

         

        그래서 이다음에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신기한 걸 꺼냈네. 그게 망자의 랜턴인가 뭔가 하는 건가?”

        “그래.” 

         

        망자의 랜턴.

         

        이름에서부터 직감이 딱 왔다. 이 랜턴에서 나오는 빛을 쬐면 기억상실에 걸리는구나.

         

        원리가 궁금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기절한 사람한테만 효과가 있다고 하지?”

        “눈 뜨고 다니는 사람한테 들이대면 세상 사람 모두가 치매 환자가 되게? 그래도 이건 조심해서 다뤄야 해.”

        “아, 예. 그러세요.”

         

        탁, 탁. 버멜은 아공간에서 꺼낸 랜턴을 점등했다. 아스라한 불빛이 갓 태어난 화염 정령처럼 이리저리 쏘다녔다.

         

        “일주일 치 기억을 잃게 하려면 10초 정도가 적당해.”

        “30분 정도 쐬면 아기가 되려나?”

        “안 해봐서 몰라.”

         

        점등과 소등 과정은 순식간에 끝났다. 인상을 찌푸리던 안젤리카의 표정이 곧 평온해졌다. 나에게 얻어맞은 기억이 사라진 모양이다.

         

        “이거 없었으면 토츠펠 공작에게 찍혔어 너.”

         

        나는 엄지를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마워요 빙의자!

         

        “지구로 돌아가면 연락부터 해. 술이라도 한 잔 사줄 테니까 말이야.”

        “…….”

         

        어쨌거나 이걸로 귀찮은 일은 한시름 덜었다. 이후 안젤리카가 깨어나면 잘 얘기해서 전혀 없었던 일로 만들어야지.

         

        “근데 문예부까지는 안 건드려도 되는 거지?”

        “그래.”

        “흐음. 어쨌거나 문예부도 공범이잖아.”

        “안젤리카 선배만 어떻게 잘 하면 끝나는 이벤트야.”

        “그래도 찝찝한데.” 

        “미래나 이런 건 나에게 맡기고 넌 그…. 제발 여기서 떠나지만 말고 있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공계마도를 제외한 나머지 속성마도를 다 배우기 전까진 틸레트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미래를 알고 있는 빙의자까지 있으니 굳이 타향살이를 할 필요가 없다.

         

        “그건 그렇고, 이거 로즈마리인가 뭔가 하는 애한테는 안 들키려나.”

        “들켰겠지.”

        “설마. 종일 감시하겠어?”

        “녀석은 그러고도 남아.”

         

        오우. 그렇단 말이지.

         

        자칫 잘못하면 귀찮은 일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독자 여러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시험기간은…어떻게든 잘 넘겼습니다. 다만 오랜만에 소설을 쓰려고 하니 영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2주간의 휴재에도 불구하고 연참하지 못하여 죄송하다는 말씀을 남깁니다. 시험이 끝나도 끝난 게 아니군요…

    다만 이번 학기가 끝나고 나면 시간적 여유가 꽤 생길 예정입니다. 자세한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번 공백기를 메꿀 만큼은 연참할 수 있겠죠…!

    한 가지 더!
    오늘은 지금 시각에 올리고, 내일부터는 출퇴근 시간을 고려하여 연재시각을 오전 9시에서 오전 7시로 앞당길 예정입니다.

    기다려 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AiBi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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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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