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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9

       마부 한 명, 그리고 승객 세 사람을 실은 마차는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아카데미를 향해 움직였다.

         

        이미 일주일 전에도 한 번 오갔던 길이라 그런지 나름대로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어쩌면 길 자체는 이미 꽤 예전에 익숙해졌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루미노르 아카데미』를 플레이하면서 아카데미로 돌아갈 때는 자주 지나던 길이었으니까.

         

        …이미 그것조차도 몇 년 전의 기억이라 조금씩 가물가물해지고 있긴 하지만.

         

         

        뭐, 그만큼 이 세계의 분위기에 익숙해졌으니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어쨌든 내가 앞으로 더 오래 살아가야 할 세계는 과거의 한국이 아닌 지금의 아르겐티아 제국이었으니까.

         

        초봄의 싱그러운 분위기가 물씬 나는 풍경을 스치며 마차는 앞으로 나아갔고.

         

        이사벨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들뜬 감정을 감추지 못하며 내게 신난 듯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었다.

         

         

        “릴리스, 릴리스. 나 마차 타고 이렇게까지 멀리 나와본 적 처음이야!”

         

        “그래?”

         

        “응! 블랙우드 영지에 있는 마을로는 일 때문에 자주 왔다 갔다 하기는 했지만, 마차 타고 이렇게까지 멀리 나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뭐, 생활 반경이 블랙우드 영지 내였던 이사벨이라면 들뜰 만도 하지.

         

        굳이 고향이나 원래 같이 살던 부모님에 대한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게 메이드들 간의 일반적인 예의이기도 했고.

         

        이 세계에서 귀족의 집에 얹혀사는 숙식 메이드는 어떤 이유로든 기존의 고향이나 가족과의 연이 끊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들어봤자 찜찜할 확률이 높은 사실을 캐물을 필요는 없겠지. 아마 이사벨도 내 아버지가 도박 빚 때문에 나를 빚 메이드로 팔았다는 소식을 듣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대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즐거운 이야기로 분위기를 살리는 게 여러모로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아마 루미노르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더 놀랄걸. 아카데미가 있는 지식의 섬은 커다란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땅을 엄청나게 긴 다리로 연결해 놓은 곳이거든.”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 되게 예쁠 것 같아….”

         

        “예쁘긴 해. 맑은 날에는 하늘이 호수에 그대로 비쳐서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이기도 하거든.”

         

        “와아아….”

         

         

        앞으로 도착할 곳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자마자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오는 이사벨.

         

        그녀가 내 전속 메이드로 아카데미에 동행하게 되는 것도 처음에는 어느 정도 우여곡절이 있을 뻔했지만, 이렇게 함께 가게 된 것도 지금 생각하면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사벨과 함께 있으면 적어도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동안 지루하거나 우울한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확실히 이사벨의 긍정 에너지는 주변까지도 함께 전파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평소에는 무표정한 메이드도 친구랑 함께 있을 때는 잘 웃는구나.”

         

        “…소란스러웠나요, 에단 도련님?”

         

        “아니야. 그냥 메이드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렇게 즐겁게 웃는 얼굴 원래는 잘 안 보여주잖아.”

         

        “…그렇습니까?”

         

        “응. 그랬어.”

         

         

        그래도 최근에는 나름 좋은 소식도 많이 있어서 자주 웃었던 것 같긴 한데.

         

        생각해 보니 이 세계에서 웃었던 건 대부분이 이사벨이나 카타리나하고 같이 이야기할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레벨업을 한 날이라든가 준남작 귀족 신분을 얻은 날이라든가, 그런 특별한 날에 혼자 방에서 실실 쪼갰던 그런 것들이 전부였고.

         

        에단 앞에서 웃는 표정을 보여준 건 첫 만남에서 가식 웃음을 제외하면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긴 했다.

         

         

        …웃는 것보다 부끄러운 표정은 지금 말고도 꽤 많이 보여준 것 같기는 하지만.

         

         

        “자주 웃어드리는 편이 좋습니까?”

         

        “응?”

         

        “제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필요하시다면, 앞으로는 가능한 한 웃는 표정으로 업무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메이드는 지금 이대로도 좋으니까.”

         

        “그렇습니까?”

         

        “응. 그러니까 괜히 나 때문에 억지로 표정 관리할 필요까지는 없어. …메이드가 웃는 얼굴은 내가 직접 짓게 만들고 싶으니까.”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

         

        눈앞에서 항상 표정 관리를 요구 같은 걸 하지 않았다는 걸 아무튼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가.

         

        그러고 보면 『루미노르 아카데미』 게임 속에서의 혐단은 제 전속 메이드인 릴리스에게 항상 웃는 표정을 지을 것을 억지로 강요했었지. 어떻게든 릴리스를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게 만들어서 자신의 학대 사실을 감추기 위해.

         

        이런 일상 속의 사소한 대화 속에서도 혐단과 에단의 확연한 차이점을 구분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뭐, 이런 에단이랑 4년 동안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아니,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오히려 조금 즐거울지도 모르고.

         

         

        “흐응~.”

         

        “이사벨?”

         

        “응?”

         

        “…왜 갑자기 그런 묘한 미소로 쳐다보고 있어?”

         

        “응? 내가 언제~?”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아무것도 아니야, 후흣.”

         

         

        …이사벨 얘는 갑자기 또 왜 묘한 느낌으로 나랑 에단을 번갈아 쳐다보는 거지.

         

        생각해 보면 이사벨도 게임 속에서의 이사벨과 비교하면 조금이지만 달라지긴 했다.

         

        가장 단적인 예를 들어본다면 게임 속에서의 이사벨은 항상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 것처럼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때때로 컷씬에서 에단과 릴리스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고 나면 그 뒷모습을 정말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으니까.

         

        지금처럼 묘하게 흐뭇한 미소를 띠며 바라보는 게 아니라.

         

         

        뭐, 아무리 이사벨이 성격이 바뀌어봤자 에단만큼 바뀌었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와 아까 못다 한 아카데미 이야기를 다시 나누고 있을 무렵, 맞은편에서 다시금 에단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저기, 메이드.”

         

        ““네?””

         

        “아, 아니. 내가 부른 건 메이드 쪽이었는데.”

         

        “아, 죄송합니다.”

         

        “괜찮네, 그럴 수도 있지. 다음에는 헷갈리지 않도록.”

         

         

        나와 거의 동시에 대답한 이사벨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는 에단.

         

        지금까지 나와 에단의 대화를 보면 아마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겠지만, 그가 메이드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는 전속 메이드인 나를 부를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이사벨이나 카타리나 같은 다른 메이드를 부를 때는 보통 이름이나 성으로 부르는 편이었고.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에단이 메이드라고 부르는 건 나 한 명뿐이었고. 저택에서 일하는 메이드는 대부분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카데미로 간다는 사실에 이사벨이 너무 들뜬 나머지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 순간이었으나.

         

        왜인지 오늘의 이사벨은 에단에게 사과를 하면서도 무언가 한 마디를 덧붙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요, 도련님. 혹시 릴리스를 부르는 그 메이드라는 칭호를 아카데미에 들어서서도 계속 쓰실 생각이신가요?”

         

        “…미안하지만, 계속 쓸 생각이네.”

         

        “하지만, 아카데미라는 건 에단 도련님과 릴리스 말고도 많은 귀족이 모이는 교육 시설 아닌가요? 아마 에단 도련님과 릴리스 말고도 많은 귀족 자제분과 전속 메이드가 아카데미에 계실 것 같은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아카데미 안에서만큼은 메이드라는 호칭보다는 릴리스라고 이름을 부르시는 편이 문제가 덜 생기지 않을까 하고,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릴 뿐이랍니다.”

         

        “…….”

         

        “…….”

         

         

        이사벨의 제법 과감한 직언에 잠시 조용해진 에단.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부분인 건지 의외로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이사벨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나에게도 든 순간이었고.

         

         

        일단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다른 귀족의 전속 메이드라든가, 혹은 아카데미 자체에서 고용한 메이드도 수없이 돌아다닐 텐데.

         

        거기서까지 나를 계속 메이드라고 불렀다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오해를 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저택 안에서는 에단이 메이드라고 부르는 사람이 오직 나 한 명뿐이었으니 신입 메이드들을 제외하면 딱히 헷갈리는 사람도 없었지만, 아카데미는 저택 바깥이니까.

         

        아무래도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호칭을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확실히, 이사벨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이드?”

         

        “여차할 때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저를 이름으로 부르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에단 도련님.”

         

        “…….”

         

        “도련님?”

         

         

        나를 이름으로 부르라는 말에 묘하게 어색해하며 내 시선을 피하는 에단.

         

        다른 메이드는 잘도 이름으로 부르면서 왜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를 때만 저런 반응인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그의 없는 어이없는 태도에 어째선지 기분이 살짝 불쾌해졌고.

         

        일부러 에단의 피해진 시선 쪽으로 고개를 슬쩍 들이밀어 그에게 되물었다.

         

         

        “에단 도련님.”

         

        “아, 으응. 메이드….”

         

        “메이드가 아니라, 릴리스입니다.”

         

        “…….”

         

        “에단 도련님?”

         

        “…알았어, 릴리스.”

         

         

        겨우 이름으로 부르는 게 뭐라고 저리 낯간지럽게 반응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사내놈이 꼭 이상한 부분에서만 묘하게 부끄럼을 타기는.

         

         

        “…….”

         

        “…….”

         

         

        에이씨, 괜히 의식하니까 나도 왠지 낯간지러운 것 같잖아.

         

        생각해 보니 에단에게 직접 이름으로 불린 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일 년쯤 전에 있었던 황궁 습격 사건에서 약혼자 연기를 했을 때를 제외하면 사실상 처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저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괜히 나까지 의식하게 되어 부끄러워지는 착각이 드는 느낌이었고.

         

        일부러 맞은편에 앉은 에단과 시선을 피하며 창 밖으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흐응~.”

         

        “…왜 그래, 이사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우흐흣.”

         

         

        아니 뭔데.

         

       

        그 눈빛 뭐냐고, 진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악질우결충 이사벨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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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I Became the Maid of the Lout Prince

망나니 공자의 메이드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transmigrated into a character from my favorite game in my previous life. Moreover, as the character I despise second most in the game. (Not a wasteman) The cover was designed by Deep Dark Wolf, and the typography was done by 유일유화 (Yu Ilyu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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