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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9

       *

         

         

         많은 이들, 정말. 정말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사실이 있다.

         

         이반은 결코 종족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소 억울한 누명이다. 그는 피부색이나 개성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애당초 불법인 세상에서 넘어왔으므로.

         

         이 미개한 세상 사람들은 그런 법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문명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이반은 종족의 개성과 특이점. 인류와의 차이점 따위로 타종족을 혐오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명인이 보이기엔 너무 저급한 행동이 아닌가.

         

         그는 지구의 대표였으므로, 언제나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따라서 그는 합리적인 이유로 다른 종족들을 파악한다.

         

         예를 들어보자.

         

         오크와 거인, 그리고 타우루스와 같은 마족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수에 가깝다. 말을 할 줄 알고 저마다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게 사람인가? 아니다. 앵무새도 말은 할 줄 알고, 향유고래도 문화생활을 즐긴다.

         

         사람이란 도덕이 있어야 한다. 이 끔찍한 야만의 세상에서도 이반이 굳게 믿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마족은 논외로 치자.

         

         다른 대표적인 이종족으로는 당연하게도 엘프가 있다.

         

         이반은 엘프를 규정하는 데에 단 일 초조차 낭비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고민의 여지가 없다.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도덕이 없었으므로.

         

         무릇 엘프와 도덕은 양립하기 어려운 단어다. 물과 기름은 적어도 흔들면 섞이기라도 하지, 이반이 엘프를 흔들었을 때 도덕이 잠시라도 섞이는 광경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엘프들은 나름대로 저들의 슬픈 천성을 갚아 나가려 노력했다. 전쟁 시절에 연합과 함께 참전한 것이다. 목숨을 바쳐가며 싸웠으니 참작의 여지가 있다. (개선의 여지는 슬프게도 아직까지 관측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드워프.

         

         이 반토막난 두더지(짧고, 땅을 파고, 수염이 있으며, 찍찍거렸으므로.)들은 오히려 이반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다른 종족을 대하는 데에 있어 편견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수염은 유사점이 아니다.)

         

         너무 편견이 없어서 마족의 편에 섰다는 사소한 문제와, 기묘한 평균주의 사상을 전파하려는 열성적인 첩보 활동과, 활동 반경이 북방전선과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이슈로 인해서, 이반은 전쟁 시절 이들과 참 많은 추억을 쌓아왔다.

         

         따라서 그는 그 자신이 평생 드워프와 함께 뭔가를 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적어도 서로를 죽이는 것 말고는. 애초에 그러기엔 서로가 가진 앙금이 너무나 컸다.

         

         그의 손에 죽어간 드워프가 몇이던가. 그리고 드워프가 죽인 인간은 또 몇이던가. 원한을 헤아리는 것조차 우습다. 누가 먼저 시작했느니를 따지는 것도 웃긴 노릇이다.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러므로,

         

         

         “서기관 동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평균주의란 우리가 달성해야 할 미래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 그 모든 것을 평균주의라 부른다고!”

         

        -와아아아아—!!

         

         

         연회장에 모인 두더지들이 저마다 제 머리만큼 거대한 뿔잔을 들어올리며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반은 한숨을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의 눈 앞에 거대한 대접이 올라왔다. 찰랑거리며 거품을 부글거리는 맥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드워프들은 이것을 술잔이라고 부른다.

         

         

         “마시게나, 동무!!”

         

         

         그 난쟁이는 호의가 가득 담긴 작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이반은 드워프의 웃음이나 호의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어서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독을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다른 데에 탔으면 탔지, 이놈들은 맥주에 독을 탈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족속들이니까.

         

         이반은 시끄럽게 저마다 떠들고, 이따금씩 ‘서기관 동지’의 어록을 대뜸 외쳐대고, 간헐적으로 ‘서기관 동지 만세가’라는 기괴한 노래를 부르는 난쟁이들 사이에서 고독을 느꼈다.

         

         문명과 이성의 길이란 이토록 멀고도 험하다.

         

         이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수련회’ 직후 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 ‘평화’라는 단어가 농담이 아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반은 벌써 며칠 전 프리첸카야가 그리워지고 있었다.

         

         

       

       

       

       

       

       

        EP16. 방학에 해외여행으로 분쟁지역에 가는 사람.

       

       

       

       

       

       

        

         

         “좋군.”

         

         

         이반은 새롭게 개장한 원장실에 느긋하게 앉아 수염을 다듬고 있었다.

         

         드로안의 공성전차가 테러를 자행했던 이 고아원은 성녀와 엘리자베타의 후원 아래에 더 크고 웅장하게 건설되어 있었다.

         

         심지어 내부엔 성당도 생겼다. 전속 사제가 배정되어 있지는 않아 주일에만 기도가 열리지만 대단한 성과였다. 원생들은 언제나 자잘한 부상을 달고 사니까.

         

         사제의 치유 성사를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고아원 재정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하게 되는 셈이다.

         

         

        -후륵.

         

         

         볶은 보리를 푹 우려낸 고소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이반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이 완벽한 수염빗에 행여 기능상의 문제라도 생길까 소지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이반은 한동안 이 소중한 시간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지만 충실한 시간이다. 당장 할당된 임무가 없는 탓이 컸다.

         

         아카데미는 방학을 맞이했고, 각국의 잠재적 우방국 스파이들은 저마다 귀국했으며, 임무의 주요 보호대상인 용사 파티의 자제들은 전원 프리첸카야 대성당에 입원한 상황.

         

         성녀가 직접 그들을 간호하고 있으니 뒤탈도 없고, 안전한 곳에 틀어박혀서 조용히 치유나 받고 있으니 경호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반에게 있어서도 방학이란 뜻이었다.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슬프게도 방학 전체를 병상에서 보내게 된 학생들 덕분이었다. (이자벨은 너무 이를 갈아서 성녀에게 경고를 받았다고 들었다.)

         

         

        -콰아아앙—!!

         

         “음.”

         

         

         그래서 문이 폭발할 것 같은 기세로 열려도, 이반은 도끼를 던지는 대신 수염빗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래서 사람이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엔리케. 노크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야.”

         “네, 원장선생님. 시간 좀 되세요?”

         “아니.”

         “지금 뭐하는데.”

         “휴가. 비번이다.”

         

         

         엔리케는 깔깔 웃고는 원장실 소파에 턱 앉아서 휘파람을 불었다.

         

         

         “와, 많이 바뀌었네? 이제 침대도 생기고! 그래, 사람이 침대에서 잠을 자야지.”

         “너는 관에서 잠들지 않나?”

         “응?”

         “음?”

         

         

         흡혈귀는 원래 관에서 잠드는 것이 아니던가?

         생각해보면 전쟁 시절에 관을 들고 다닌 적은 없던 것 같기도.

         

         이반은 자신의 상식이 파괴되는 순간을 목도하고 있었다.

         

         

         “진짜 때려주고 싶네. 제자야. 헛소리 하지 말고 짐 싸라.”

         “짐.”

         “그래, 일 하러 가자.”

         “그럴 수는 없다.”

         

         

         이 나라엔 휴가라는 개념이 없다. 지속 가능한 노동을 위한 근로자 여가 시간의 보장 같은 것은 성당조차도 생각하지 않을 복지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반은 모든 착취 받는 노동자가 그렇듯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해야만 했다.

         

         

         “오늘은 비번이라고 말했을 텐데.”

         “아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우리가 비번 당번이 어디 있다고… 너 지금 방첩사령부 사령관 아니었어?”

         “상관이 쉬어야 부하들도 쉴 수 있는 법이다.”

         “오.”

         

         

         엔리케는 감명 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설득 당할 뻔했네!! 급한 일이라니까? 제자야, 나 얼마 만에 보는 건지는 기억해?”

         “87일.”

         “…이걸 기억하네…. 어디 갔는지는 궁금하지 않고?”

         “음.”

         

         

         그건 이반의 업무 영역이 아니었다. 이반은 지금 공무원이며, 공무원은 자신의 영역을 제외한 모든 방면에 무관심한 직군이다. (몇몇 크라실로프의 공무원들은 심지어 자신의 직무에도 무관심하다.)

         

         엔리케는 이마를 감싸쥐며 소파에 주저 앉았다. 그녀는 이반의 표정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테이블 위에 다리를 턱 얹은 채로 꼬았다.

         

         

         “지금 저 윗쪽에 난리가 났더라.”

         “그렇군.”

         “난쟁이들이 난리가 났다는 의미야.”

         “음.”

         

         

         이반은 엔리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빗질을 이어 나갔다. 엉킨 수염은 무작정 힘으로 밀어서는 안 된다. 빗살 사이로 슬슬,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결을 다듬어야 했다. 자칫하다간 털이 엉킨 채로 끊어지기 때문이다.

         

         엔리케는 버럭 소리질렀다.

         

         

         “아니, 좀! 들어봐!”

         “듣고 있다.”

         “갑자기 난쟁이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고, 나는 왜 그걸 알고 있고, 지금까지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런 거 진짜 안 궁금해?”

         “예상이 된다.”

         

         

         이반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프리첸카야 지하 테러, 드워프의 대지망 굴착기가 일으킨 소동이었지. 그때 네가 지하도 침공을 직접 요격하기 위해 떠났던 것을 알고 있다.”

         “어… 어어. 그렇지.”

         “지하도에 드워프가 굴을 팠다면, 그 루트를 역추적해야 하는 것은 너나 나나 알고 있다. 놈들의 침략 경로를 파악해서 차단해야 할 테니까.”

         “…그래.”

         “그 와중에 드워프와 조우했고, 교전이 있었고, 드워프들이 대체 왜 갑자기 프리첸카야까지 들이닥쳤는지도 파악했겠지.”

         “…맞아.”

         

         

         이반은 수염빗을 내려놓고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건 군부의 일이다.”

         “….”

         “엔리케. 우리가 모든 분쟁을 조율할 수는 없어.”

         

         

         용사 파티라면 더욱이 그래야만 한다. 군무와 임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용사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 전쟁은 군대의 역할이니까. 제 아무리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전선에 투입될 수는 없는 법이다.

         

         용사의 진가는 스스로 드러나지 않을 때에 있다. 칠용장을 죽일 수 있을 수준의 무력이 전선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강력한 억제력이 되었으므로.

         

         설령 전선이 무너지더라도, 설령 수많은 사람들이 도륙되고 있더라도. 용사는 결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용사 파티는 칠용장과 마왕을 암살하기 위해 적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따라서 용사는 엄밀히 말하자면, 인류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굳이 역할로 분류하자면 인류의 복수자, 복수의 대행자에 가까웠다.

         

         전쟁이 끝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용사 파티의 은거는 연합 왕국의 평화에 대단히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마왕조차 암살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저마다 흩어져 각국에 은거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야망가들의 공포가 될 수 있으니.

         

         

         “알아. 안다고. 하지만 제자야.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란다.”

         

         

         엔리케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반을 바라보았다.

         

         

         “테러가 아니라 전쟁을 준비하고 있더라. 드워프들 말이야. 군수 공장이 산맥 전체에서 가동되고 있었어.”

         

         

         이반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엔리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를 향해서, 인류를 향해서가 아니야. 내전을 준비하고 있더라. 아비디타스, 기억나지?”

         “….”

         

         

         이반의 시선이 우묵해졌다. 사룡의 군주 아비디타스. 옛적에 죽은 그 망령이 지금 여기서 왜…?

         

         

         “그 미치광이 리치는 영멸했지만… 그 사도들은 여전히 살아있지. 아비디타스의 공중섬이 추락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그놈들이 드워프를 반으로 나누고, 서기장의 아들을 납치했어.”

         “….”

         “내전에서 만일 놈들이 승리할 경우엔 전화가 북부 전선으로 옮겨붙을 거야. 놈들은 이 나라를 반드시 없애고 싶어할 테니까.”

         

         

         아비디타스의 사도들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복수이리라. 그들의 신을 죽인 불경자들을 향한 징치.

         

         그들의 성전은 반드시 크라실로프로 향할 것이다. 드워프 내전은 그 전초에 불과하다.

         

         엔리케는 전쟁에 반대하는 드워프들과 접촉하고 전황을 파악하는 데에 지난 시간을 모두 투자해야 했다.

         

         

         “크라실로프의 국체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아. ‘작은’ 이반. 부탁이야.”

         

         

         드워프를 상대해야 할 때, 그리고 네크로맨서를 상대해야 할 때 가장 믿을 수 있는, 또한 가장 유능한 전문가를 바라보며.

         

         엔리케는 진지한 눈으로 자세를 다잡았다.

         

         

         “이 나라를 구하자. 지난 전쟁에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끝내러 가자.”

         

         

         이반은 엔리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수염빗을 조심스럽게 데스크의 서랍 안에 넣고 복잡한 잠금 장치를 탁, 탁 맞물려 놓았다.

         

         

         “휴가가 길어지겠군.”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엔리케는 지난 프리첸카야 테러 당시에 지하터널에 침입한 드워프 군단을 막아서기 위해 출격한 직후부터 쭉 부재중이었습니다.

    엔리케가 부재중이라는 언급은 중간중간 한 번씩 나오곤 했었답니다!!

    *

    사룡의 군주 아비디타스는 유일하게 용사 파티를 제외한 다른 대상에게 사망한 칠용장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언급은 이반의 과거 회상 중간에 짧게 나옵니다. 그 전투 당시 투입된 절멸부대 요원들 중 생존자는 이반 뿐이었습니다. (다른 칠용장 암살조에선 몇몇 더 있긴 했습니다. 이건 극초반 엘프 공중전함 편에서 언급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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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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