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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9

       “아이린에게 들은 것이어요. 관리인이 모험가 시절 뭐라고 불렸는지에 대해.”

       

        난 또 뭐라고, 그쪽이었구나.

        내가 이세계에 떨어지고 5년간 모험가 생활을 해왔던 사실을 딱히 숨긴 적은 없었다.

        단지 그걸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남지 않게 되었을 뿐.

        은익 기사단의 일원이었던 아이린은 모험가 조합에서 일했기에 처음 봤을 때부터 나를 알아봤었다.

        아마 실종 전단 같은 걸 본 거겠지.

       

        이것 참, 비범한 실력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부정하랴. 해주학파 소속으로 반 년만에 이명을 얻는 경지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나의 영민함 덕이었다.

        혹자는 제대로 쓸 수 있는 마법은 간섭기 뿐이라며 손가락질하겠지만 꼬우면 너도 창질하던가.

        오히려 육체적으로 허약한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밤마다 나를 암살하려 드는 마검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따라서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창, 창…… 창부? 분명 그와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이에요.”

        “창끝입니다.”

        “아무튼, 보기보다 대단한 모험가라고 들은 것이에요. 대륙에 몇 없을 정도로 뛰어난.”

        “뭐…… 싸인해 드릴까요?”

       

        나는 주섬주섬 노트와 펜을 꺼냈다.

        마침 얼마 전에 만난 사생팬 덕에 부랴부랴 연습한 싸인이 있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다음에 열릴 포인트 상점에는 친필 싸인 항목을 추가할 생각이었다.

        똑같은 이름만 쓰면 희소성도 재미도 없으니 그동안 숨겨왔던 부계정들의 닉네임을 동원해 가챠 시스템으로 승화시킬 원대한 계획.

       

        그러나 내 싸인이 적힌 종이를 받은 마리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필요 없는 것이에요.”

        “이거 귀한 건데…… SSR급으로 풀릴 예정이라고요? 복각 없이 한정 픽업 2배 이벤트로 100만분의 1의 확률 밖에 되지 않아서 뽑기만 하면 비틱 인증글이 범람할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모르겠으니 다무는 것이에요. 제가 관리인의 과거를 언급한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에요.”

        “따로 있다고요?”

        “네, 모험가는 의뢰를 수행하고 보수를 받는 직종. 그러니…… 제 의뢰를 받아주는 것이에요.”

       

        의뢰라고? 새삼스럽게 뭘 부탁하려는 거지?

       

        “저는 반드시 40층을 통과해 탑으로부터 이명을 받아야 해요.”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요? 아니면 복수를 위해서요?”

        “둘 다. 하지만 지금의 저로서는 천변의 방을 통과할 수 없는 것이에요.”

       

        아직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무슨 소리지?

        나는 자연스럽게 떠오른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냈다.

        해봤구나, 그것도 여러 차례.

        다양한 공략대의 러브콜을 받으면서도 구태여 혼자 도전하려던 이유는 이미 그들과 함께했다 실패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서운 마리엘, 성장하는 마리엘.

        시간 조작 마법을 금술로 지정되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이 대화를 하는 것도 처음이 아닐지도 몰랐다.

        오직 그녀만이 기억하는 과거 속에서 샌드위치에 바퀴벌레(반쪽)를 넣은 내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등골이 시렸다.

        세계는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말았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스테이지로 진입이 불가능했던 것이에요. 파티원을 바꿔도 모두 같았어요.”

        “그럼 제게 의뢰해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뇨, 제가 조언을 구했을 때 관리인은 낄낄대면서 깔끔하게 포기하라고 했던 것이에요. 아앗! 바로 지금 그 표정으로……!”

       

        뭐야,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못 올라가는 거였잖아.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 나였다.

        딱히 방법을 알고 있었다기보다 마리엘의 불행을 즐기느라 나온 반응일거라 확신했지만 그녀는 나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제 시련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거겠죠. 그러니까 의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저한테 의뢰하려면 비쌉니다.”

        “가, 가진 건 전부 주는 것이에요! 아직까지 유일하게 홀크로프트가 소유하고 있는 죽음의 협곡이라도……! 대륙이 안정을 되찾으면 분명 가격이 천정부지로 폭등할 것이어요!!”

        “몇 번이나 말했지만 거기 멸지(滅地)잖아요. 줘도 안 갖는다니까.”

       

        고작 땅 몇 마지기로 대륙 최고의 모험가를 부리려 하다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자 마리엘이 내 로브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 그럼 결혼……! 관리인 인생에서 두 번째로 이런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할 기회를 주는 것이에요! 마침 서명도 받았겠다 누가 봐도 제가 손해인 계약이지만 40층만 통과시켜 준다면 개한테 물린 셈치고 눈 딱 감고……!”

        “그런데 쓰라고 준 거 아니니까 내놓으세요.”

       

        내 서명이 들어간 종이가 혼인 신고서로 바뀌기 전에 잽싸게 빼앗았다.

        조건부 회귀라는 개사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줄만한 게 기껏해야 땅 아니면 몸뿐이라니.

        이것도 다 마리엘이 허튼 짓 못하도록 주구장창 옆에서 괴롭혀온 덕분이었다.

       

        — 다음 스테이지로 가는 문을 찾았어요!

        — 지금 좌표를 보낼게요!

       

        어차피 같은 시련 안으로 들어온 이상 마지막 스테이지로 들어가야 하긴 했지만 굳이 지금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혹시 이자젤처럼 마지막으로 꿍쳐둔 재보라도 토해내지 않을까 기다리던 와중 수정구에서 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두 번째 스테이지로 가는 입구는 시스테인 파크의 한 천막 안.

        서커스단의 무대 뒤편의 어느 소품창고에 있었다.

        나는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손에 쥔 종이를 힐끗거리는 마리엘을 데리고 합류했다.

       

        ‘문’의 개념이면 어떤 종류든 입구가 될 수 있다는 건가.

        거대한 곰의 가죽으로 만든 호객행위용 인형탈이 창고 구석에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모습.

        그 앞에서 샬롯과 엔, 그리고 세라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맞아?”

        “네, 확실해요. 저편에 뭐가 있는지 확인도 끝냈어요.”

        “뭐가 있었는데?”

        “그건…….”

       

        말끝을 흐리는 세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 아르투르가 보이지 않았다.

        대학원생의 왕에게 잡혀갔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배가 갈라진 곰의 가죽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저희도 따라가죠. 여긴 경매장 밖이라 대학원생의 왕이 곧 들이닥칠 겁니다.”

        “관리인 조금 전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하고 일단 들어가요.”

        ”아앗! 알겠는 것이에요! 알겠으니까 그렇게 밀 필요는……!”

       

        나는 마리엘을 곰 가죽 안으로 집어넣었다.

        새하얀 드레스에 쌓인 엉덩이를 꾹꾹 밀어버린 뒤에 곧장 뒤따라서 머리를 집어넣었다.

        축축하고 습한 냄새가 콧가에 맴돈다 싶더니 이내 시야가 확 밝아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서커스의 천막은 온데간데 없고 천장이 어디쯤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층고가 높은 성이었다.

        이런 곳에 살았던 적은 없었으나 건축양식이나 장식물들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횃대와 타오르는 불을 형상화한 문양은 미티어 학파의 것.

        나는 악의의 층에서 이와 비슷한 저택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어서 오게, 자네들도 성을 지키는데 도움을 주러 왔나?”

       

        다른 이들이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루벤이 나타났다.

        아르투르도 그 옆에 서 있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할 뿐 이전과 다르게 보스 몹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세라의 표정은 여전히 안 좋았다.

       

        나는 불야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의를 차리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발디니 가의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헌데 성을 지키다니요? 혹 위협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지금 이곳으로 한 무리의 마족들이 쳐들어오는 중이지.”

        “마족이라고요?”

        “음, 이쪽으로 오게.”

       

        대륙에 남은 마족이라 함은 마녀, 흡혈귀, 그리고 망자까지 셋이었다.

        그러나 루벤을 따라서 발코니로 나간 나는 산맥 너머에서 꾸물거리는 검은 형상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가 마족이라며 가리킨 이형의 존재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나 다름없는 내 눈에 딱히 마족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떄문이었다.

       

        그것들은 창백한 피부 대신 털이 숭숭 난 거친 가죽을.

        반짝이는 손질된 손톱 대신 날카롭고 투박한 손톱을.

        그리고 시체 썩는 냄새 대신 짐승의 털 냄새를 풍겼다.

       

        창작물에서나 등장할 법한 ‘수인’에 해당되는 반인반수의 괴물.

        당연히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마족이라 불린 적도 없었다.

       

        물론 저 만큼의 숫자가 모이면 충분히 위협적이니 루벤을 도와서 성을 지켜야겠지.

        근처에는 문이 달려있는 다른 건물도 없었다.

        문제는 이것이 대체 누구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시련이냐는 것.

       

        답은 조금만 대화해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가문의 병사들로는 도무지 상대할 방도가 없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한 참이다. 헌데 자네들이 먼저 와줘서 다행이군.”

        “저들이 그렇게 강한가요?”

        “다르다네. 전투력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공격할 수가 없어.”

        “네……?”

        “음, 아버지 말씀에 나도 동의하는 바다.”

       

        옆에서 세라가 ‘하, 씨.’라고 중얼거리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언제나 반듯한 모범생같던 그녀가 내뱉은 한 마디에 마리엘마저 놀라서 어깨를 움찔거렸다.

        만약 아르투르가 혼자 천변의 방에 들어왔다면 죽어도 못 깼겠군.

       

        나는 왜 마가렛이 40층의 시련은 팀을 짜야 한다는 걸 강조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둘 뿐만 아니라 다들 저런 상태야? 전혀 전력이 안 된다고?”

        “클락 씨, 저 진짜 못하겠어요. 확 차버릴까요?”

        “니들 사귀는 사이였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대답해 봐.”

        “성에 있는 마법사들 말하는 거라면 네, 누구 머리에서 튀어 나왔는데 당연하죠.”

        “…….”

        “갤러리에서 이상한 사진들 저장했을 때부터 말렸어야 했는데…… ‘진정한 친구’인지 뭔지 걸리기만 하면 아주 트라팔가 호수 밑바닥에 처박아버릴 거에요…….”

       

        음, 이건 절대 걸리면 안 되겠군.

        나는 곧바로 위치노트에서 ‘강아지 사랑꾼’을 친삭함과 동시에 머릿속에서도 깨끗이 지워 버렸다.

       

        불쌍한 아르투르.

        어떤 사악한 저주술사의 술수에 휘말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당장은 저 몰려오는 수인 무리들을 상대로 성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미티어 학파의 마법사들과 아르투르, 그리고 ‘불의 춤꾼’이라 불리며 악의의 층에서도 굉장한 실력자로 평가받던 루벤까지 떼어놓고서는 승산이 없었다.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기발한 해결책을 떠올렸다.

        시련의 난이도가 인식의 차이를 기반에 두고 있다면 그 인식을 고치면 되는 것이었다.

       

        “이대로면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전멸할 것이다.”

        “지금도 저 수인들의 품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버지.”

        “사실 나도 그렇구나. 꾹 참는 중이다.”

        “어쩌면 여기가 천국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잠시만요. 와서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나는 세라의 복장을 터뜨릴 기세로 만담을 주고 받는 루벤과 아르투르를 부른 뒤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않은 건데, ‘수인’과 ‘퍼리’는 엄밀히 다른 겁니다.”

        “?”

        “그게 무슨……?”

        “저 괴물들은 두 분이 좋아하는 퍼리가 아니라 그냥 수인이라고요. 수인은 역겹지만 퍼리는 역겹지 않아요. 저것들은 한 마디로 역겨운 놈들입니다.”

       

        머리로 망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

        반대로 옆에 있던 세라는 완전히 죽어버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둘 다 똑같이 역겹거든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낮잠돌고래 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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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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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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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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