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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9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마수가 몰려오는 재앙의 파도가 일어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

         

       프란체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웬만한 일정은 다 넘겼다.

         

       “으으…….”

         

       프란체는 룬어를 해독하던 도중,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최근 꽤 힘들어서.”

         

       마법서 내용인가. 그런데 어느덧 중반부를 넘어있다. 저 정도면 슬슬 영혼 결속 마법을 찾을 거 같은데.

         

       “…카자르가 막히기 시작하면 다른 책으로 넘어가는 게 좋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프란체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해야지.”

         

       거, 쓸데없이 오기 부리시네. 그렇다고 저 책을 빼앗을 수도 없고 참.

         

       ‘모처럼의 시간이니 좀 더 의미 있는 걸 하고 싶은데.’

         

       재앙의 파도가 끝나도 아직 많은 시간이 있지만, 이럴 때 더 많은 추억을 쌓고 싶다.

         

       그 추억은 앞으로 외로이 남을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줄 테니까.

         

       ‘딱히 지역 축제를 하는 곳도 없고.’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에 잠겨있자니, 프란체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니?”

       “아, 아닙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렇게 고민에 잠긴 걸 보면 별일이네.”

         

       픽 웃고는 다시 룬어 해독에 몰두하는 프란체. 뭔가 같이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아.’

         

       그게 좋겠군.

         

       “공녀님.”

       “왜?”

       “목표까지 앞으로 한걸음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 김에 축하 파티는 어떠십니까?”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원래 이런 건 끝나기 직전에 먼저 하는 거야. 끝나고도 다시 하고.

         

       “앞으로의 기원을 생각하며 하는 거죠. 프란체 코퍼레이션의 모두를 불러서 파티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프란체는 안경을 벗고 눈을 끔뻑였다.

         

       “많이 하고 싶어 보이네.”

       “예?”

       “잔뜩 신나있잖아.”

         

       이런, 내 얼굴에 티가 났나 보군.

         

       탁. 프란체는 두껍기 그지없는 마법서를 덮었다.

         

       “그래, 다 불러 모아서 파티라도 열자. 아직 일은 남았지만, 사업은 이미 끝났고 탑 건설은 마지막을 앞두고 있으니까.”

         

       다행히 받아줬다.

         

       “예,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신나서 곧장 전서를 보내려 했는데…….

         

       ‘누굴 불러야 하지?’

         

       일단 카자르, 케일, 라데아, 라이아, 헬레나는 부르고.

         

       ‘셀다스나 엘반 자작도 불러야 하나?’

         

       이 두 사람은 파티에 그다지 어울리진 않는다. 셀다스는 그냥 귀찮아할 것 같고 엘반 자작은 사무적인 관계니까.

         

       ‘오히려 부르면 불편해할 수도 있겠어.’

         

       원래 부르려 했던 사람들만 부르자.

         

         

       * * *

         

         

       황도에 있는 데카르트 공작가의 별채.

         

       프란체를 데리고 아무 술집이나 들어갈 순 없기에 여기서 파티를 열기로 했다.

         

       “황도에도 이런 저택을 따로…?”

       “확실히 공작가는 공작가네요…….”

       “황도에 있는 저택이니 술이 맛있겠군?”

         

       입을 떡 벌린 라데아와 감탄하는 카자르. 그리고 술 생각밖에 안 하는 케일까지. 삼신기에 가깝다.

         

       “헬레나? 오늘은 너도 파티의 손님이란다.”

         

       헬레나는 눈을 동그래 뜨곤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그러지 말고. 명령이야.”

       “네…….”

         

       좀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모처럼 다 같이 즐기는 파티니까. 거기에 프란체의 전속 시종인 헬레나도 빠질 수 없지.

         

       그렇게 완성된 만찬의 자리에는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많은 음식이 올라가 있었다.

         

       모양만 봐서는 얘가 무슨 고기인지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마는, 대충 육해공이 모여 만들어진 겁나게 고급스러운 음식들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만 보던 음식들이군.”

       “이거 라이아랑 같이 먹어보려 했는데!”

       “밥을 제대로 먹는 건 오랜만이네요.”

         

       각각 다른 반응들. 그 와중에 헬레나는 덜덜 떨면서 눈치 보기 바빴다.

         

       “제가, 제가 이런 자리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상석에 앉은 프란체를 바라보는 헬레나.

         

       “내가 허락했으니 괜찮아. 그간 나를 위해 열심히 하고, 말도 잘 들었으니 상을 주는 거야.”

         

       과거, 다른 시종들이 프란체를 무시할 때 헬레나만은 그러지 않았다.

         

       새로 들어와 내부사정은 잘 몰랐다지만, 사람은 대개 분위기에 휩쓸려 동조하게 되어있는 법인데 말이다.

         

       “저, 저…….”

         

       별안간 헬레나가 훌쩍였다. 어깨를 부르르 떨며 눈물까지 흘리는데, 이거 어떡하냐.

         

       “헬레나…?”

       “저… 저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이윽고 “흐아앙!”하며 울음까지 터트렸다.

         

       “공녀님은 진 님이 관련된 거만 빼면 정말 좋은 분이신데… 다들 공녀님 욕만 하고… 혼자 착한 척 한다고 저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그런 기색이 전혀 없어서 충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절로 눈을 질끈 감게 되는 뒷이야기였다.

         

       “헬레나…….”

         

       프란체는 자리에서 일어나 훌쩍이는 헬레나를 품에 꼬옥 안아주었다.

         

       “이제 모든 게 달라질 거야. 걱정하지 말렴. 그동안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프란체의 품에 안겨 흐느껴 우는 헬레나.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다.

         

       ‘어째 이 공작가는 어째 정상이 없냐.’

         

       공작가의 일원들부터 시작해 시종, 기사들까지. 도저히 선한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내가 프란체였다면 인간 혐오증에 걸렸을 거다.

         

       프란체는 흐느껴 우는 헬레나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최근에도 그러니?”

       “지금은 안 그래요…….”

         

       프란체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해지면서 조용해진 건가. 정말 영악한 놈들이다.

         

       “그래, 헬레나는 그동안 힘냈어. 내 시중을 들어주느라 고생했어.”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여주자 그제야 울음을 그치는 헬레나. 감정이 순간적으로 격해진 탓에 과호흡 증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제부터는 다 달라질 테니까 걱정은 말렴. 알겠지?”

         

       헬레나는 “네에….”하곤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이제 만찬을 즐기자. 다들 그간의 고생을 보내고 이 자리의 모두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니까.”

         

       샴페인이 따라진 잔을 높게 들고 싱긋 웃는 프란체.

         

       “다들 나를 따라와 줘서 고마워. 너희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앞으로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지.”

         

       다들 잔을 들었다. 나도 따라서 잔을 들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오늘은 즐기려고 모인 자리니까 다들 마음껏 먹고, 마셔!”

         

       첫 번째로 원샷을 때리는 프란체. 그에 따라 다들 샴페인을 들이켰다.

         

       “황궁에서 먹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맛있군.”

         

       입맛을 다시던 케일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샴페인이 만족스러운 듯하다.

         

       “와… 고기가 이렇게 부드럽네.”

       “언니, 나 눈물 날 거 같아…….”

       “라이아, 많이 먹어.”

         

       감동한 라이아를 챙기는 라데아와 순수히 감탄하는 카자르.

         

       ‘즐거운 시간이네.’

         

       모두와 함께 하는 파티. 우리는 그간 고생했으니 이런 날도 있어야지.

         

       “진?”

         

       프란체는 나를 바라보며 잔을 들이밀었다. 나는 픽 웃으며 전을 부딪쳤다.

         

       “이런 걸 원했던 거지?”

       “맞습니다. 분위기가 좋네요.”

       “그러게. 마음 편한 파티는 처음이구나.”

         

       하긴, 귀족들로 가득한 파티장에서는 항상 날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잡아먹히는 게 사교계니까.

         

       “가끔은 이렇게 파티를 열어야겠어.”

       “그것도 좋겠네요.”

         

       그때가 되면 나는 없겠지만.

         

       “이번 겨울의 마지막은 수확제도 있으니 그때도 이렇게 파티를 열자. 그동안은 항상 혼자 보냈으니 이렇게 시끌벅적한 수확제도 즐겨야지.”

         

       그게 나와 프란체가 함께하는 마지막 추억이겠군. 그런 생각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지금은 이런 생각 그만하자.’

         

       고개를 휘젓곤 주변을 둘러봤다. 싱긋 웃으며 잔을 흔드는 프란체. 그리고 파티를 즐기는 모두.

         

       “아니, 아저씨 맞잖아요!”

       “맞아, 저랑은 10살 차이라고요!”

       “카자르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죠?”

         

       라데아와 라이아의 말에 눈썹을 좁히곤 고개를 주억이는 카자르.

         

       “28살이면 나랑 7살 차이인데, 아저씨가 맞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자 케일은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발끈했다.

         

       “28살이면 한창인 나이다!”

       “케일 아저씨 이번 겨울 지나면 29이잖아요.”

       “…….”

       “슬슬 처를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늦은 나이인데…….”

         

       그러게. 이 세계에서 곧 29살이면 결혼하기에 많이 늦은 나이긴 하다.

         

       “나는 용병왕이자 백귀라 불리는 무인. 사랑은 쓸데없는 감정이다.”

         

       그리 말하곤 차가운 도시 남자처럼 잔을 바라보는 케일.

         

       “우와, 들으셨어요?”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케일 씨는 좀 안쓰럽네요.”

         

       무수히 쏟아지는 동정의 시선. 그러나 케일은 그에 굴하지 않고 샴페인을 원샷 때렸다.

         

       “이제 그만하자. 케일 아저씨도 생각이 많을 테니.”

       “카자르 언니 말이 맞아요. 케일 아저씨도 고민이 많으실 거예요.”

         

       저러는데도 끄떡없는 케일.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용병왕, 백귀라고 불리던 동부의 수호자였는데 이제는 타격감 좋은 아저씨로 변해버렸다.

         

       보다 못한 프란체는 고개를 휘저었다.

         

       “다들, 재밌는 건 알겠지만 케일 놀리기는 그만하렴. 모처럼 즐기려고 모인 자리인데 주제가 그러면 좀 그렇잖니.”

         

       그리 말하면서 은근 먹이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내가 주제를 꺼낼게. 곧 수확제야.”

         

       수확제라는 말에 다들 풀이 죽었다. 뭐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가 살던 로아크 남작령은 수확제에서 아무것도 없었는데…….”

       “내가 있던 세이렐 백작가에서도 그랬어. 사람들이 찢어지게 가난했거든.”

       “나는 수확제를 즐겨본 적이 없다. 마수를 잡느라 바빴거든.”

         

       그러고 보니 얘네는 다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

         

       “공작령의 수확제는 다르단다.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공작가에서 직접 주최해서 축제를 열거든.”

         

       좋은 문화다. 프란체는 씩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다른 영지들도 비슷하긴 하지만, 공작령에는 좀 더 특별한 게 있어.”

         

       라데아와 라이아는 “특별한 거라면…?”하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궁정 마법사들을 초대해서 마법의 무대를 열거든.”

         

       ……마법의 무대? 그런 것도 있었나? 게임의 모든 이벤트를 알고 있는 내가 모를 일은 없을 텐데.

         

       “마법의 무대가 뭐예요?”

         

       라이아가 묻는 걸 보니 나만 궁금했던 게 아닌 모양이다.

         

       “마력을 응축한 마법을 하늘로 쏘아 올려 폭발시키는 거야. 하늘에서 가지각색으로 터지는 마력이 구경거리지.”

         

       아, 단순하게 폭죽이었다.

         

       “신기하네요.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마력을 하늘로 쏘아 올려 폭발시키다니.”

       “이건 데카르트 공작령에서만 보여주는 거야. 그건 나도 항상 챙겨봤거든.”

         

       프란체는 픽 웃으며 날 바라봤다.

         

       “근데 이젠 같이 볼 사람들이 있네.”

         

       첫인상 때 봤던 표독스럽고 생기 없는 얼굴과는 관계가 멀어진, 지금의 프란체.

         

       그녀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법의 무대…. 얘기만 들었는데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데카르트 공작가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도 있을 줄이야…….”

       “그런 것까지 하다니, 마법사들은 신기한 족속들이군.”

         

       각자 다른 반응이었지만, 대부분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아무튼, 수확제는 이렇게 진행될 거야. 다들 기대하고 있으렴.”

         

       프란체는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다들, 앞으로도 프란체 코퍼레이션을 잘 부탁해!”

         

       환한 미소로 가득 찬 모두와는 다르게.

         

       오직 나만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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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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