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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

     지브롤터와 모르가니아가 손을 잡는다.

     이 사실이 세상에 퍼지면 그날로 왕도는 개판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동맹은 비밀로 해야 한다.

     “대외적으로 나는 지브롤터를 견제해야 하는 처지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

     “예. 동맹관계라는 걸 들키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그래. 그래서 나는 이 사업에 허가를 내리더라도, 장난질을 칠 수밖에 없단다.”

     장난질이라.

     일단 감사는 나중에 올 거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혹시, 예산이 아니라 물자로 직접 주실 생각이십니까?”

     “호.”

     

     카르멘 왕비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씩 올린다.

     “돈을 냅다 500억 꿀꺽 삼키려고? 어린 것이 벌써 횡령하려고 드는구나. 500억 골드가 만만해 보이더냐?”

     “자재비라는 명목으로 현금으로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만.”

     “지브롤터 백작가가 공사용 자재를 사들인다? 아서라. 순진한 변경백을 상대로 단가를 후려치려는 놈들이 가득할 테니.”

     

     맞는 말이다.

     “네 아버지가 혀로 칼을 두르는 장사치들을 상대로 어떻게 대응하겠느냐?”

     “제가 뒤에 있다고 한들, ‘알아서 진행하시오’라고 말하고 끝나겠죠.”

     “그래. 감히 변경백을 상대로 후려칠 놈들은 없겠지만, 상인이라는 자들은 틈이 있으면 바로 제 잇속 챙기는 자들이지.”

     지브롤터에서 사업을 천명한 뒤, 상인들을 모아 부르면 그들은 분명 지브롤터를 호구로 잡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네게 500억을 모두 줄 수는 없단다. 공사에 관한 모든 건 모르가니아에서 지원할 테니, 너는 주어진 운용자금을 알아서 사용하렴.”

     카르멘 왕비가 초콜릿 조각을 하나 꺼내, 아주 잘게 쪼개어 내게 건넸다.

     “억울해하지 말렴? 이건 당연한 거란다.”

     손톱보다 작은 조각이었고, 카르멘 왕비는 한 조각을 크게 베어 물었다.

     “너무 많은 돈을 탐하려고 들지 말거라. 한 5억 정도라면 모를까, 500억이나 되는 국고를 아직 검증되지도 않은 어린아이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정치적 비밀 아들에게 그 정도도 해주지 못하시는 겁니까?”

     “인정에 호소하기에는 아직 네가 보인 게 이것밖에 없잖니?”

     카르멘 왕비가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말은 번지르르하고 청산유수지만, 현실은 그 이상으로 차갑고 냉정한 법이란다.”

     “즉, 이번 일을 통해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시겠다?”

     “당연하지. 성과를 내면 당연히 나도 그에 맞춰줄 거란다.”

     “…다행이군요.”

     나는 카르멘 왕비가 남긴 작은 조각을 삼켰다.

     “왕비께서 덜컥 10살짜리 아들에게 500억이나 맡기면 어쩌나 싶었는데 말입니다.”

     “다 먹을 자신은 있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마 이야기는 좀 나올 겁니다. 변경백이 변했다. 돈에 까탈스러워졌다. 옆에 있는 아들이 거슬린다. 뭐 그런?”

     “네가 나와 같은 천재라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렇다면 더 이쪽에서 개입해야겠구나.”

     카르멘 왕비가 심각한 얼굴로 초콜릿을 만지작거렸다.

     “어려서부터 너무 두각을 드러내면 안 된다. 암살자는 어디에나 있으니.”

     “카르멘 왕비께서 살해당할 뻔한 것처럼 말씀이십니까?”

     “그래.”

     과거, 카르멘은 천재 공녀였기에 암살당할 뻔했다.

     “개요는 알고 있니?”

     “멍청한 백작가의 영애가 감히 공녀에게 시비를 걸었는데, 파티장에서 모욕당한 걸 백작이 냅다 암살자를 불러서 죽이려 들었다고.”

     “그래. 미친놈이었지. 지금은 멸문했고. 그런데 생각보다 잘 아는구나.”

     “예. 당연히 알죠. 그게 아버지와의 첫 만남이셨잖습니까?”

     “…그래.”

     카르멘 왕비가 소녀처럼 웃는다.

     “암살자에게 살해당할 뻔한 걸 네 아버지가 구해주셨지. 마스터도 아니셨던 시절이었음에도, 기사는 레이디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반할 만하다.

     “하아, 정말이지. 그분은….”

     젊고 잘생긴 연상의 냉혈기사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암살자를 상대로 목숨을 걸고 구해준다?

     ‘내가 그래서 그런가?’

     살짝 누군가가 떠올라, 나는 카르멘 왕비가 잠시 추억에 잠긴 걸 즐기도록 내버려 뒀다.

     “…음. 미안하구나. 사색이 길었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카르멘 왕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리를 꼬며, 손깍지를 끼며 고고하게 허리를 편다.

     “자재는 한 달 내에 모두 지브롤터로 수송될 거란다. 도착할 때까지 인부는 뽑아두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공사에 필요한 철광은 모르가니아 광산에서 뽑아내실 거고.”

     카르멘 왕비의 손가락이 살짝 움찔거렸다.

     “왕가에서 철광 차출명령을 내렸더니, 이에 응한 가문이 마침 모르가니아인 셈이지.”

     “눈 가리고 아웅 아닙니까?”

     “왕국에서 가장 질 좋은 철을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새삼스럽게, 왕국과 제국의 차이에 괴리감이 느껴진다.

     “거래대금으로 좀 챙기시기도 하고?”

     “아무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제국에서는 사업을 진행할 때, ‘공개입찰’이라는 제도를 시행한다.

     최소한 세 개 이상의 관련 업체가 자신들의 사업 계획서를 들고 온 뒤, 가장 뛰어난 업체를 선정하여 사업을 진행한다.

     물론 공개입찰도 뒷돈을 챙기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왕국은 그런 과정조차 없다.

     “안심하렴. 제국을 향한 방패를 보수하는 일이다. 철강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일은 없을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저질의 철을 보급한다면, 변경백이 진심으로 화를 낼 거니까요.”

     “당연하지. 내가 설마 그분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일을 할까?”

     행여나 싸구려 잡철을 보내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 정치적 아들이 되고 나니 이점이 많다.

     “…뭔가, 계략을 꾸미는 미소로구나.”

     “제가 웃었습니까?”

     “그럼. 눈이 웃고 있잖니. 네 아버지처럼.”

     “국왕 전하는 제 눈이 제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셨습니다만.”

     “하! 그건 그냥 한 소리일 거다. 그러고 보니….”

     카르멘 왕비가 뭔가 말을 하려다 살짝 머뭇거렸으나, 이내 곧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열었다.

     “우리의 공사다망한 전하께서는 지금 취미 생활 중이시니, 혹시나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취미 생활….”

     “…혹시,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카르멘 왕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도 그럴게, 최대한 돌려서 말한 국왕의 취미 생활이라는 건 아무래도 알려져서는 안 될 문제니까.

     “제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파악하겠지만,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것 정도야 뭐.”

     “…….”

     “왕도에 있는 귀족들 다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름다운 여인을 여럿 불러서, 쯧.”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편지를 전할 타이밍이 안 나올 것 같은데.’

     어머니가 국왕에게 쓴 편지가 있는데, 그걸 전할 타이밍이 없다.

     그렇다고 카르멘 왕비에게 전한다?

     바로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 아버지에게 신고하지 않을까.

     “왜 그러니?”

     “음. 아뇨. 저는 혹시나 전하께서 저를 피하는 줄 알고.”

     “…그것도 있겠지. 그런데, 너는 꼭 전하를 한 번 만났으면 하니?”

     “예.”

     “전할 물건이라도 있니?”

     “전언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

     카르멘 왕비가 눈을 감는다.

     아무래도 ‘거짓’을 꾸며낸 상황이기에, 왕비가 이상을 눈치챌 가능성도 있다.

     “…그래. 그분이 세인트에게 편지를 쓰거나 할 이유는 없겠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지, 내가 들어봐도 되겠니?”

     “전해주시렵니까? 아버지께서는 제게 직접 전하라고 하셨습니다만.”

     “…….”

     “…알았다. 따라오렴.”

     카르멘 왕비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대신 전하의 취미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알겠지?”

     “예.”

     이렇게까지 꼭꼭 숨기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카르멘 왕비가 국왕을 찾아갔다’라는 정치적 부담이 생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직은 이르니, 벌써 헛바람을 넣지 말렴.”

     나를 도와주는 건, 그녀가 진심으로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기 때문이겠지.

     “마찬가지로, 아직 나는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의 아내다. 남편의 치부 때문에 나에게, 나의 친가인 모르가니아 공작가에 부담이 된다면 나는 가차 없이 너를 제거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너는 그의 아들이지, 그가 아니잖니. 그걸 뼛속 깊이 새기렴. …따라오거라.”

     카르멘 왕비가 앞으로 나선다.

     “왕비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램프를 제게….”

     “되었다. 내가 직접 들고 가지. 국왕 전하께 가는 길이니까.”

     “아, 예…!”

     옆에서 따라붙으려는 시종들을 손으로 물리며, 카르멘 왕비는 어두운 복도를 밝히는 램프를 들고 앞으로 걸었다.

     “여기다.”

     세 번째 침실.

     “…안에 들어가면 분명 그 난장판이 펼쳐져 있을 것이나, 너는 예의를 갖춰 행동하거라.”

     결코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공간의 문 앞에 서서, 카르멘 왕비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국왕이니까, 술에 취한 미친개가 칼 들고 설쳐도 나는 너를 보호해줄 수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심기를 거스르면 죽는다.

     무능왕이든 뭐든, 이 왕성에서는 노스트럼의 피를 가진 자가 절대자다.

     “전하. 카르멘이옵니다.”

     똑똑똑.

     “그레이 지브롤터가 전하를 뵙고자 합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노크와 함께 정중한 말로 묻자.

     “……들어와.”

     첫 마디부터 착 가라앉은 국왕의 목소리가 문 사이로 들렸다.

     끼이익.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악취.

     ‘제국산이군.’

     진한 발효된 포도향 사이, 와인 너머에 있는 미약하고도 익숙한 냄새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할 건 다 하시는군.’

     소파에 축 늘어진 채 비스듬하게 앉아, 주변에 빈 와인병이 여러 개 널브러진 채, 잔뜩 붉어진 얼굴로 게슴츠레 나를 노려보는 저자가 이 나라의 국왕이다.

     “전하….”

     “뭐. 왜.”

     “…늦은 시간이나, 지브롤터의 후계자가 인사를 드리겠다고.”

     “음.”

     국왕은 한껏 불콰해진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얼굴 봤으면 됐나? 물러가지.”

     “전하.”

     나는 카르멘 왕비의 앞으로 나서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지브롤터의 장남, 그레이 지브롤터가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태양은 개뿔. 다 내가….”

     술에 취해있음에도, 내가 가슴팍 앞으로 살짝 보인 ‘그것’은 잘 보였나 보다.

     “…흐음.”

     국왕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래. 그 자식 아들이기는 해도, 그녀의 아들이기도 하니. 여기 와서, 한 번 떠들어보거라.”

     “전하?”

     “나가보시오. 왕비. 다 나가.”

     “지브롤터의 자식에게 설마 술 시중을 들게 하려는 건…!”

     “나는, 나가라고 했소.”

     무능왕이 이를 갈며 빈 와인병의 주둥이를 움켜쥐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카르멘 왕비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나갔다.

     순간적으로 스친 눈빛에는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나를 향한 걱정이 얼핏 보였다.

     끼이익, 덜컥.

     문이 닫혔다.

     이제 이 방은 바깥과 완전히 차단된 구역이다.

     “…그걸 네가 왜 가지고 있는 거지?”

     무능왕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너, 설마?”

     “위.”

     “……?”

     “그 어떤 눈도, 어떤 귀도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천장을 가리켰다.

     “…변경백이 그런 것도 가르쳐주더냐?”

     “아니오. 다른 분이.”

     “……물러가라.”

     나를 향한 말이 아니다.

     “어서.”

     샤삭.

     국왕의 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을 두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 꼬마가, 지금 나와 독대를 원하지 않느냐.”

     “하오나 전하.”

     “너마저 왕명을 무시할 셈이냐.”

     어느 나라든, 국왕의 목숨을 바로 옆에서 지키는 존재가 있는 법.

     “그녀의 아들이다. 너도 알지 않느냐?”

     “…….”

     “그래. 5분. 딱 5분만 꺼져다오. 제발.”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림자는 나를 향해 흉흉한 살기를 풍기며, 다시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됐다. 이제, 이 공간에는 너와 나뿐이다. 그래, 무슨 말을 전하려고?”

     “어머니께서 전하께 쓴 편지가 있습니다. 직접 전하라고 하셔서.”

     “!!”

     국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 진짜로?!”

     

     얼굴에 가득했던 기운이 단숨에 사라지고, 연애편지를 처음 받는 소년처럼 눈동자가 떨린다.

     “예.”

     나는 편지를 꺼내 국왕에게 두 손으로 건넸다.

     “이건…. 내가 그녀의 생일 때 준 손수건인데.”

     다행이다.

     이 미친 왕이 이런 건 또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채서.

     ‘포장에 신경을 쓴 보람이 있어.’

     전할 건 전했다.

     어차피 국왕과 할 이야기는 없고, 나는 편지만 전하면 끝이니까.

     그리고 왕도에 온 목적에 있어, 이미 성과는 초과 달성이다.

     “전하.”

     “어, 그, 그래.”

     국왕은 손수건의 밀랍 봉인을 직접 손으로 뜯으며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목소리를 깔고, 약간의 불쾌감을 드러내며.

     “참으로, 효자로구나. 아버지 때문에 내 얼굴을 꼴도 보기 싫을 텐데.”

     “어머니의 부탁이니까요.”

     “그래. 크흐, 효자가 따로 없어. 효자가.”

     국왕은 나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가라.”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나가기 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쓰으읍, 하아. 샬롯, 흐흐. 흐흐흐….”

     제국산을.

     ‘이건 미래에서도 몰랐는데. 왕도로 오길 잘했어.’

     와인이 아닌, 와인의 옆에 놓여있던 하얀 가루를.

     ‘약을 썼구나.’

     어머니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그래도.

     ‘써도 하필이면 싸구려를 쓰네.’

     붉은 와인이랑 섞는 건 최악이라는 말, 그만 목구멍 밖까지 튀어나올 뻔했다.

     “후우우….”

     밤이라서 그런가.

     정신이, 좀 더 맑아지고 또렷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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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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