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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

       좆됐다.

        ​

        아무리 생각해도 좆됐다.

        ​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

        갑자기 무슨 화성에 조난 당한 사람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이 그랬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조난당한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

        “그럼 나는 대놓고 마리아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여겨지는 거야?!”

        ​

        “…지금 마리아라 하셨습니까?”

        ​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

        욤 이 미친 황녀바라기.

        ​

        내가 그, 아무튼, 입에 담기도 조금 민망한 궁전에 거주한다는 것보다 마리아를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에 집중하는 거냐.

        ​

        “젠장, 이러면 진짜 꼼짝도 못 하고 마리아에게 발목이 잡혀 버리는데?”

        ​

        “혹시 마리아 전하의 파트너로 선정되는 데 불만이 있는 겁니까?”

        ​

        내 반응에 욤이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

        아니, 그야 당연한 것 아냐?

        ​

        “그럼, 벌써부터 결혼으로 발목이 묶인다는 데 즐거울 것 같아?!”

        ​

        “그 나이를 먹고?”

        ​

        “…크아악!”

        ​

        이번엔 내가 긁혔다.

        ​

        그래, 그러고 보면 여긴 시대상이 조금 달랐지. 19살에 성인식을 치르고 거의 대부분 그 직후, 길어도 1~2년 안에 결혼하는 게 보통이었다.

        ​

        나처럼 스물셋이나 먹고 결혼은커녕 변변한 약혼자도 없이 떠돌고 있으면 이제 슬슬 노총각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세상이었다.

        ​

        “아니, 아니…!”

        ​

        하지만, 평균 결혼 연령 30세 이상을 찍던 나라에서 온 내게는 스물셋이면 새파란 애송이라고…! 지구에 살 때는 이 나이에 대학교 졸업요건 못 채워서 교수님들한테 통화 돌리면서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지고 있었다고…!

        ​

        물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말해봐야 미친놈 소리 들을 게 뻔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뭐 어찌할 수도 없다. 이 세상 이치가 원래 그랬으니까.

        ​

        결국 내가 대책 없이 집에서 뛰쳐나와 돌아다닌 것에 대한 일종의 인과응보 같은 거다.

        ​

        “에휴, 그래. 상대가 누구냐를 떠나서, 나는 애초에 결혼에 대해 생각이 없어. 그래서 불만이다. 그럼 뭐 네가 도와주기라도 할 거냐?”

        ​

        “그걸 나한테 묻는 건 좀 싸가지가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

        …그러고 보니, 얘는 마리아를 두고 나한테 결투까지 걸었던 놈이었지. 

        ​

        “음, 미안하다.”

        ​

        이건 내가 잘못했네.

        ​

        빠른 사과에 욤은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기댔다.

        ​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런 인식이 박히는 게 불만이면 그냥 궁에서 나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

        “나보고 마리아를 먹고 버린 쓰레기가 되라고?”

        ​

        “…설마-”

        ​

        “아, 아니라고!”

        ​

        아무래도 욤 이놈은 볼수록 진짜 순수하게 마리아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짓거리를 시도한 건 괘씸하긴 했지만, 원래 이 나이대가 사랑에 눈멀면 가끔 그러기도 하는 거지.

        ​

        청춘이 별건가. 이런 게 청춘이지.

        ​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 모함만은 못 참았다.

        ​

        “주님께 맹세코, 마리아와는 한 침대에 누워본 적도 없다고! ”

        ​

        “…한 방에서 지내본 적은 있다?”

        ​

        “그거야, 아무래도 예전에 호위로 일한 적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

        “씁….”

        ​

        그러나 욤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계속 나를 바라봤다. 이거야 원, 해명해도 소용이 없겠네.

        ​

        그냥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

        “아무튼, 내 이미지도 이미지인데, 마리아의 이미지도 문제잖아. 내가 별궁의 내궁에서 마리아와 같이 지내다 떠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마리아는 정부랑 하룻밤을 보내놓고 바람맞은 사람이 되는 거잖아.”

        ​

        욤이 내 말에 의문을 표했다.

        ​

        “그곳의 소문이 바깥으로 나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건 기우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

        “음…, 그게 말이지.”

        ​

        뭐,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의 말이 옳았다. 애초에 불륜이나 정부를 끼고 노는 것을 위한 건물이라면 보안만큼은 더없이 철저할 테니까.

        ​

        “마리아가, 그걸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거든.”

        ​

        확신할 수 있었다.

        ​

        그걸 숨길 생각이었다면, 황제에게 그렇게 대놓고 보고하지 않았을 테니까.

        ​

        이미 마리아가 대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날 데리고 별궁을 드나드는 것을 본 사람만 해도 수백명이니, 이미 소문은 애진작에 퍼지기 시작했을 터.

        ​

        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

        -―

        ​

        내 걱정은 기우로 끝나지 않았다.

        ​

        내가 후작저에서 나와 궁으로 출발하자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마력을 움직여 그들이 뭐라 떠드는지 집중했다.

        ​

        “진짜 별궁으로 들어가는 건가…?”

        ​

        “그냥 파트너로 선택하신 게 아니라 인생의 파트너였다고?”

        ​

        “이 정도로 시끄러워졌는데도 별도의 조치가 없다는 건,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건가…?”

        ​

        이미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소문이 퍼진다고 모든 귀족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도 알음알음 별궁의 내부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있는 모양이었다.

        ​

        애초에 정부로 불려가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수도에 사는 귀족이었을 테니 당연한 이야기긴 했다.

        ​

        “끄응….”

        ​

       이제는 궁 밖으로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논외였다. 마리아와 나의 평판도 문제지만, 그런 건 나중 일이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

        “마리아가 가만 안 있을 텐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

        ​

        장담할 수 있었다.

        ​

        내가 궁에서 도망쳐 나가면, 마리아는 반드시 이 일을 사방팔방 시끄럽게 떠들며 어떻게든 나를 붙잡기 위해 난리를 칠 거다. 지난 며칠간 보여준 그녀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보면 분명했다.

        ​

        물론 거기서 도망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

        하지만 그 소식을 듣고 쫓아올 아버지와 아버지 손에 끌려가 어머니 앞에 도달하는 미래는 피할 자신이 없었다.

        ​

        “씁, 이제 어떡하지.”

        ​

        그동안은 속 편하게 적당히 때가 되면 도망치면 그만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냥 연회 파트너로 데려오는 사이 정도면 중간에 서로 깨져서 헤어지는 일은 흔했으니까.

        ​

        하지만 동침했다는 소문이 퍼진 순간부터는 달랐다. 이건 자칫하면 황실 모욕죄에 걸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죽지는 않겠다만, 황실과 사이가 틀어진 프리랜서를 고용해줄 간 큰 귀족들은 제국에 별로 없었다.

        ​

        머리를 써야 할 시간이었다.

        ​

        머리에 손을 얹고 최대한의 속도로 뇌를 가동시켰다.

        ​

        ‘요점은, 양쪽에 이미지 타격 없이 수도를 벗어나는 것.’

        ​

        저번처럼 휙 도망쳐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다시 만난 마리아는 저번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실행력이 높아지고 설계가 치밀해졌다. 거기에 제 이미지까지 집어던져 가면서까지 날 붙잡으려 하는 집착이 더해지니, 이건 나도 쉽게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

        그렇다면 방향을 바꿔야 했다.

        ​

        누구나 납득할만한 핑계를 대고 수도를 빠져나가는 것이야말로 내가 마리아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문제는, 수도를 벗어날 만한 정당한 사유를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

        ‘일단 가족이 부른다는 명분은 배제한다.’

        ​

        항상 나보고 대체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던 부모님이시다. 그분들께서는 상대가 황녀라는 점에 놀랄지언정 내가 발목이 붙들렸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을 분들이었다.

        ​

        “…뭐지, 왜 내가 불효자인 것 같지?”

        ​

        아닌가? 이 세계 기준으로는 실제로 불효자가 맞나…?

        ​

        아무튼, 가족을 제외한 다른 경우의 수를 살펴봤다. 수도에 연이 있거나 내 소문을 확인한 귀족들은 내 편을 들어줄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그들은 내가 수도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해줄 리가 없었다.

        ​

        그나마 어린 시절부터 나를 봐온 포메른 공작가 그라이펜 가문 정도가 있을 텐데, 그쪽은 예전부터 황실과 사이가 좋은 이들이었다.

        ​

        결국 귀족들을 비롯한 세속 권력들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

        ​

        “잠깐만, 세속 권력?”

        ​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

        곧장 방향을 바꿨다.

        ​

        목적지는 궁전 남쪽에 위치한 대성당이었다.

        ​

        ​

        -―

        ​

        지구의 상식 중 이 세계에서도 통하는 몇 가지를 뽑으라면, 그중 하나는 종교에 대한 것이 있었다.

        ​

        종교는 언제나 세속 권력을 찍어누르고 자신들이 우위에 서고 싶어 했다. 지구에서 인류의 역사란, 세속 권력이 종교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

        이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

        다양한 존재가 존재했지만, 결국 주류를 차지한 종교, 황금십자교가 한때 대륙을 지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문명이 발전하며 세상의 여러 이치를 인간의 능력으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종교의 권위는 점점 세속의 권위에 밀리게 되었다.

        ​

        하지만 황금십자교는 여전히 세속 권력을 상대로, 제국과 황제를 상대로 힘싸움을 할 정도의 세력은 갖추고 있었다.

        ​

        팔츠성 북쪽의 중심을 잡고 있는 황궁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남쪽 중심에 자리 잡은 대성당은 이 시대 종교 권력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계십니까?”

        ​

        성당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잠시 기다리니 안에서 사제가 문을 열고 나왔다.

        ​

        “죄송합니다. 오늘 미사는 이미 끝난지라-”

        ​

        나는 그에게 오는 길에 챙겨온 동전이 가득 든 주머니를 보여주며 흔들었다. 짤랑짤랑 소리가 나는 주머니에 사제의 시선이 꽂혔다. 나는 그에게 웃으며 물었다.

        ​

        “혹시 대주교님을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

        “지, 지금 저를 돈으로 매수하시려는 겁니까? 저는 오직 주님께만 복종하는 황금십자교의 사제입니다!”

        ​

        “설마요. 그저 제 신실함을 조금 보여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

        그렇게 말하며, 나는 주머니를 조금 열어 내부를 살짝 보여주었다.

        ​

        황금빛 영롱한 금화의 자태에 사제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그는 내 신실함을 바로 이해했는지 나를 곧장 대주교가 묵는 건물로 안내해주었다.

        ​

        “여기입니다.”

        ​

        “굉장히 화려하군요.”

        ​

        “아하하….”

        ​

        사제는 내 말에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그, 그럼 저는 대주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

        나를 응접실로 안내한 사제가 방을 나갔다. 대주교가 오는 것을 기다리며 어째선지 살짝 가벼워진 주머니를 옆에 두고 방 안을 살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물론이고, 식기부터 가구까지 무엇 하나 보석이나 귀금속이 쓰이지 않은 것이 없는 사치스러운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

        이게 성당의 부속시설이라니. 역시 뭐가 됐든 수도에 자리 잡고 봐야 하는 건가. 하긴, 수도에 자리 잡은 대주교좌 성당이라니, 돈이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

        어지간한 귀족가에서도 보기 어려운 사치에 감탄하고 있으니 나갔던 사제가 돌아왔다.

        ​

        “대주교님께서 오셨습니까?”

        ​

        “어, 그것이, 대주교님께서 지금 거동이 조금 어려우신 터라….”

        ​

        횡설수설하며 말하는 그 모습에 나는 위화감을 감지했다.

        ​

        이거, 뭔가 있다. 그 뭔가가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사람들에게 대놓고 드러내기 좀 그런 뭔가가 이 저택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이런 건수를 놓치면 괴물 사냥꾼의 이명이 울었다.

        ​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에게 다가갔다.

        ​

        “아니, 세상에! 대주교님께서 거동이 어려우시다니! 분명 뭔가 사건이 터진 것이로군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서 안내해 주시지요.”

        ​

        “아,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이건 대주교님께서 앓고 계신 질환 탓에 종종 일어나는 일인지라-”

        ​

        “이럴 수가! 심지어 질병이라니! 제가 빨리 의료원으로 데려다 드려야겠습니다.”

        ​

        그렇게 외치며 사제의 양어깨를 손으로 꽉 붙잡았다.

        ​

        그러니까, 헛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안내나 해.

        ​

        그런 의미를 담아 강하게 노려보자 사제는 딸꾹질을 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이쪽입니다!”

        ​

        그를 따라 위층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나는 매우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

        코를 찌르는 알코올의 냄새가 2층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제는 덜덜 떨며 어느 방문 앞에 멈춰섰다.

        ​

        안에서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곧장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하.”

        ​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

        “으에엥? 너넌 또 누구냐….”

        ​

        방 안의 광경은 처참했다. 십수 명의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누가 봐도 미사용 술이라기엔 지나치게 고가로 보이는 술병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안주로 먹은 것들의 잔재가 사방팔방에 흩어져 있었다.

        ​

        “넌 누구냐니까아아….”

        ​

        그리고, 대주교가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만취한 상태로 한 가닥 정신을 붙든 채 겨우 버티고 있었다.

        ​

        그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거의 슬라임처럼 미끄러져 내려가 허리만 걸치고 누워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래야 겨우 시선이 맞았다.

        ​

        그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

        “나 황궁에서 나온 사람인데.”

        ​

        “헉.”

        ​

        순식간에 취기가 달아난 얼굴로 대주교가 눈을 부릅떴다.

        ​

        나도 모르게 입가가 히죽 늘어났다.

        ​

        그날, 나는 아주 성능 좋은 명분 생성용 생체머신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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