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1

       침묵.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는 것 혹은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

         

       할 말이 있음에도 어떠한 사정이든, 자신의 고집이든 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할 때에는 침묵을 지킨다, 라고 한다.

         

         

       그렇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 죄명이 나오자마자,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젠장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레이단 탄튼, 이 정신병자야!

         

         

       일반적인 성범죄자가 되더라도 그 취급은 최악으로 치닫으며, 같은 범죄자끼리도 가장 질 낮은 사람으로 대우하는 경우가 많다고 소문을 들었었다.

         

         

       그런데.

         

       이 세계관 공공의 적인 외신을 강간 미수한 죄라고?

         

         

       아무리 외신이 아름다운 여자로 보인다고 해도 이상성욕도 정도가 있지!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성 관념을 가진 이로써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저기… 부, 분명 잘못된 걸 거예요. 잘 생각해봐요?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외신에게 무슨 힘으로 그런 짓을….아니 애초에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하냐고요?! 이거 모함, 모함이라고요!”

         

       “심각한 정신 착란이군.”

         

         

       정정 요청을 위해서 곰 인형 사내에게 항의하려 했으나, 곰 인형에겐 통하지 않았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 움직이려 했지만 백가면이 플라스틱 검을 내밀었다.

         

         

       “움직이지 마라. 죄인에게 변명의 여지는 없으니까.”

         

       “이딴 거.”

         

       “허, 당돌하군.”

         

         

       고작 플라스틱 검 아닌가. 억지로 돌파하려 했지만 눈앞에 떨어지는 장난감 도끼가 그런 생각을 앗아갔다.

         

       쿵.

         

         

       “우, 움직이지 말라고 했죠?”

         

         

       바닥을 내려찍은 모습을 보고 느꼈다.

         

       무서운 것을 없애 줄 뿐 아픔에 대해선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 그런 척했지만 내심 이 슈퍼 겁쟁이 모드에 의지했다.

         

       오히려 겁쟁이에게서 겁을 없애버렸기에 만용이 자라나게 하여버렸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된 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아니라는 눈빛으로 사냥꾼을 바라보았지만.

         

         

       “쯧.”

         

         

       전혀 내 말을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사냥꾼 이 자식아, 아니야, 아니라고!

         

         

       최후의 보루라는 심정으로 아가르타를 쳐다봤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두 눈이 딱 마주친다.

         

         

       씨익.

         

       그녀는 얼굴에 웃음기가 올라와 있었다.

         

       그것도 도적에 걸맞은 아주 꼴 받는 유형으로.

         

         

       “…큽.”

         

       “?”

         

       “알몸으로 날뛰는 게… 크흡, 차라리 더 양반으로 보이는데요? 푸흐흡.”

         

         

       아.

         

       자살할까.

         

         

       ‘레이단 탄튼’이라는 인물을 설정한 새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눈이 마주친다면 그날이 그 인간의 마지막 날일 것이다.

         

         

       “꺄악!”

         

       “움직이지 말라고 조금 전에 말했을 텐데.”

         

         

       백가면이 플라스틱 검으로 아가르타의 배를 살짝 누르자 치이익하고 살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 만으로 아가르타의 입은 곧장 닫혔다.

         

         

       “한 번만 더 말이 나온다면 그다음은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쭈글쭈글해진 아가르타를 보고 있으니 그래도 조금 한결 나았지만, 어디까지나 조금 나아진 것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며 이죽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시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지만.

         

         

       겨우 울분을 삭이고 있자니, 곰 인형 사내가 혐오감을 숨기지 않으면서 말했다.

         

         

       “감옥 내 생존자 없음. 현 시간부로 감옥은 폐쇄. 우리 기사단이 인계하여 인간 이하의 죄수들을 호송하도록 한다.”

         

       “아니…!”

         

       “이 이상 질문은 받지 않는다.”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청테이프 같은 걸로 우리의 손을 묶었다.

         

       힘을 주면 곧바로 찢어질 것 같았지만, 힘을 줘 봐도 풀리진 않았다.

         

       이것도 외신으로 만든 무언가인가?

         

         

       그렇게 우리는 수갑보다 허접한 청테이프로 저항도 그대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끌려가면서도 나의 죄명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하아.

         

       이게 쾌락 없는 책임이라고 하는 거구나.

         

       상상 이상으로 좆같네.

         

         

         

         

       #

         

         

         

         

       길을 잘 알고 있는 것인지, 기사단도 어둡게 보일 길일 텐데 랜턴 하나에 의지해 길을 잘 찾아갔다.

         

         

       눈치를 살피듯 아가르타와 사냥꾼을 보았다.

         

       아가르타는 여전히 놀릴 생각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나를 흘겼지만, 사냥꾼은 이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하아.

         

       골머리 아프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좀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분명 내 죄명 탓이겠지.

         

         

       스노우 캐슬 주인공이랑 관계가 멀어져 봤자 좋을 거 하나도 좋을 게 없는데.

         

         

       괜히 몽실몽실한 저 인형 대가리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게 다 저 곰 인형 새끼 때문이었다.

         

       왜 굳이 거기서 죄명을 읊고 난리야…!

         

       내 설정이 이렇든, 저렇든 저 녀석이 말하지만 않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고.

         

         

       “드디어 출구군.”

         

       “이 감옥은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너무 넓은 것 같아요….”

         

       “하필이면 외신이 왜 여기서 나와서는…!”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기사단들은 자기네들끼리 잡담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아무 힘도 없는 내가 뭘 하리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길을 걷다 보니 앞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가면 여인의 말마따나 이제 밖으로 나가게 되는 거겠지.

         

         

       그렇게 밖으로 나가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할 정도로 아주 신비한 광경이었다.

         

         

       탁 트인 공간으로 하여금 느껴지는 해방감과, 마치 봄을 연상시키는 푸르면서도 색감 있는 나무들이 마을들 사이사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심에는 석제 벽돌로 만들어진 아주 높은 기둥이 있었고, 그 위로 아지랑이가 지듯 열기와 함께 불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외신의 간섭에 망가져 버린 이 다크 판타지 세상을 스노우 캐슬이라고 부르는 이유.

         

         

       그것은 세상을 멸망시키는 눈보라 속에서도 하염없이 타오르는 성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뚝 선 탑을 지칭하기를 장작, 그리고 그 위에 타오르는 불길을 화로, 라고 명칭 하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저 꼭대기에 황녀가 있다고 했던가?

         

       커뮤니티에서 보았던 설정들을 떠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이 게임을 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가 생각났다.

         

         

       성벽 너머, 몰아치는 눈보라가 영지에 다다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과 세상을 얼려버릴 눈보라가 마치 서로 뒤엉킨다.

         

       얼음과 불의 조화는 극명한 대비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얽히고 있었다.

         

         

       이 세상은 외신에게 멸망하고 있다 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장관에 눈은 계속 하늘을 향했다.

         

       그 모습이 백가면의 눈에 띄었고 가면 안에서 긁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 착란이 맞긴 하나 보군.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있는 해악이자 외신 간섭을 일으킨 원인에게 감탄하다니.”

         

         

       그녀가 뭐라 비꼬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가 스노우 캐슬을 시작하고자 마음먹었던 이유가 게임에서 이 모습을 아주 높은 그래픽으로 묘사했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이 세계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게이머의 입장에서 이 눈은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다웠으니까.

         

       그래서 이 장관을 실제로 보게 된 것이 영광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 모습을 눈에 더 담아두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음?”

         

         

       눈보라 치는 곳을 자세히 보고 있으니, 설산 너머에 또 다른 영지가 있는지 성벽 같은 게 쳐져 있었고 그 안에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엇인지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찡그리자, 초점이 맞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웬만한 성보다도 훨씬 큰 키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거인의 형상.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거대한 설산보다 더 크게 우뚝 선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천천히 들여다보자 여인의 모습으로 화하기 시작했고 어느 새부턴가 그것이 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입을 움직여 뭐라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가 내 뒷머리를 붙잡으며 당겨버렸다.

         

         

       “아아악!”

         

         

       머리카락이 뜯길 것만 같은 통증을 느끼며 그쪽을 쳐다보자, 백가면이 화가 잔뜩 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신 착란이라고는 했지만, 자기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다니!”

         

         

       갑자기 일갈하는 그녀를 보며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어주고 있자, 오히려 표정이 더욱 험악해지는 것이 아닌가.

         

         

       “론단의 철칙 3번째. 설산 너머에 보이는 거대한 무언가를 바라보지 마라, 경외하지 마라, 기도하지 마라.”

         

         

       아니, 미친.

         

       그딴 철칙도 있었어?

         

         

       내가 먼저 물어보기도 전에 가면 여인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저것을 보면 내장에서부터 얼어붙어서 그대로 얼음 석상이 되어버린다.

         

       설마 자신의 죄목이 밝혀진 것에 수치심이 들어 자살이라도 하려던 셈이었나? 멍청한 녀석!”

         

         

       …아니,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는다고?

         

       저게 대체 뭔데.

         

       스노우 캐슬에 관한 지식은 단편적이어서 나무에 비유한다면 가지 부분만 알지 정작 중요한 기둥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어차피 대답해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위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진 않으세요?”

         

         

       그런 와중에도 은근슬쩍 아가르타가 속삭이며 나를 걱정해주었다.

         

         

       “뭐, 감시자를 상대했던 걸 생각하면 괜찮을 것 같지만요.”

         

         

       저런 한결같음이 그나마 정신적인 위안이 된다고 한다면 내 마음이 조금 슬퍼질 것 같기에 꾹 참기로 했다.

         

       그렇게 우린 론단의 중심으로 향했다.

       

       


           


Dark Fantasy: Super Coward Mode

Dark Fantasy: Super Coward Mode

슈퍼 겁쟁이 모드 다크 판타지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The super cowardly me installed Super Coward Mode, and the terrifying extraterrestrials started to look cute. “Eating the flesh of an extraterrestrial deity? You’re not human! Ew!” “Even withstanding mental manipulation? What kind of monster are you!” “Enslaving an extraterrestrial deity? You must be out of your mind.” …And then, the reactions around me becam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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