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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

       

         

         

         

        참으로 재수가 없게도 설산에는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린 숙여!”

         

        “…!”

         

         

        루시의 외침에 린은 바로 허리까지 앞으로 숙였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풍압이 그의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숙이지 않았다면 분명히 린은 허리째 일도양단되어 눈밭에 위아래 따로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전개는 DLC에 있지 않았는데!’

         

         

        그의 숨통을 조여오는 건 서큐버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일반인보다는 낫지만 영웅급은 못 되는 체력의 한계가 그를 숨가쁘게 만들었다.

         

        에팔테르가에서부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서큐버스가 루시의 일격을 맞고서 출입문을 뚫고 나가 반대편 가게에 처박혔을 때,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람과 경비병들이 몰려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여!”

         

        “경비병 나으리! 저기 사람이 갑자기 벽을 뚫고 날아갔습니다!”

         

        “으응? 넌 어제 그…?”

         

         

        재빨리 루시를 옷 속에 다시 숨기고 무구점을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린에게 쏠렸다.

         

        어젯밤에 그를 수색했던 경비병들과 눈이 마주친 린은 머리를 굴렸다.

         

        이상하다.

         

        게임에서는 서큐버스가 짐꾼을 유혹하는 건 맞지만 문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아 슬금슬금 뒷걸음질로 밖에 나올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숨바꼭질이 시작되며 마족에게 걸리지 않고 도시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고 설산 중반까지 왔을 때쯤부터 본격적인 추격전 미션으로 진입하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문을 가로막다가 분노한 루시가 배를 가격해서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데미지가 컸는지 먼지구름 사이로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서큐버스.

         

        린의 머리가 회전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경비병한테 잡혀 구속당해 아무것도 못하고 마족에게 앙갚음을 당할 수 있었다.

         

        좋아.

         

        린은 생각을 마쳤다.

         

        필승의 전략은 늘 하나다.

         

        선수필승.

         

        린은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몸을 덜덜 떨며 손가락질하고 난리를 쳤다.

         

         

        “마족! 마족이다아!!!!”

         

        “뭐라고?!”

         

        “어이 네놈! 그게 얼마나 중대한 건인지 알고 있겠지! 아무렇게나 지껄인 거면… 커허억!”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린을 심문하려던 경비병은 뒤에서 나타난 서큐버스에게 복부를 뚫렸다.

         

        붉은 선혈이 바닥을 적시고 마족은 그대로 경비병의 몸뚱이를 찢어버렸다.

         

        비현실적인 장면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너어…! 그냥 배불뚝이가 아니구나!”

         

         

        핏발 선 눈으로 린을 노려보며 서큐버스는 손톱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년은 뭐냐? 날 날려버릴 정도의 마력이라니. 숨은 용사라도 되는 거냐!”

         

         

        옷속에서 루시가 그의 복부를 툭툭 쳤다.

         

        덕분에 충격으로 굳었던 린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히익! 진짜 마족이다! 마족이다아!!! 봉화를 올려야 한다!!!!”

         

         

        뒤를 돌며 있는 힘껏 외쳤다.

         

        그 소리에 에팔테르가 주민들도 퍼뜩 정신이 들며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다.

         

         

        “마족이다!!”

         

        “봉화! 봉화를 올려!”

         

        “도망가 모두!!”

         

         

        패닉으로 혼란에 빠지자 서큐버스도 주춤거렸다.

         

        당장 저 둘을 쫓고 싶었지만 마족의 침공을 알리는 봉화가 올라가면 반나절도 안돼서 제도까지 소식이 닿게 되고 용사 파티에게도 전파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바로 마왕을 쓰러뜨린 인류 최강 전력들의 추격을 받게 된다.

         

        모욕을 준 쥐새끼들을 쫓을 것인가, 봉화를 막을 것인가

         

        진퇴양난의 상황.

         

        그런 와중에 서큐버스의 시야에 린이 포착되었다.

         

         

        “상급: 그림자 따라가기(Lv.8)”

         

         

        짐꾼의 낭에서 스크롤을 꺼내 찢으며 스킬을 시전하자 빠르게 어둠 속으로 녹아버렸다.

         

        그러나 에팔테르가는 길에 항상 눈이 깔려있기에 발자국을 남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쥐새끼들이!”

         

         

        서큐버스는 스킬을 쓰는 걸 보자 확신했다.

         

        분명히 용사 파티원이거나 그 끄나풀일 거라고.

         

        그렇다면 어차피 자신의 존재는 용사 파티에게 완전히 발각된 거나 다름없었다.

         

        봉화보다 저들의 통신이 더 빠를 거라 판단한 서큐버스는 곧장 발자국을 쫓아 달려나갔다.

         

        이것이 숨바꼭질도 없이 바로 추격전에 들어가게 된 경위였다.

         

         

        “후우! 후우!”

         

         

         

        린은 죽을 맛이었다.

         

        방한도구도 못 챙겼다.

         

        미친듯이 달리느라 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게다가 달리고 있는 곳은 혹한 산맥의 설산 중 하나였다.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다음 맵에 진입한 상황이었다.

         

        쒸이이이잉-!

         

         

        “왼쪽에서 온다! 오른쪽으로 뛰어!”

         

         

        발레하듯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자 또 금속음이 공기를 찢으며 그가 있던 자리를 종으로 후려쳤다.

         

        루시의 기척 탐색이 아니었으면 몇 번이고 죽었다.

         

        모습을 지우는 상급 스킬을 쓰고도 속수무책에 까딱하면 저승행이니 짐꾼의 낭에 손을 뻗을 여유도 없었다.

         

         

        “젠장! 흐노니만 있었다면!”

         

         

        아니, 그냥 팔다리만이라도 제대로 붙어있었다면 저런 하급 마족 따위 자신의 선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덧없는 가정이었다.

         

         

        “지금이라도 서라! 얌전히 그 계집과 정기를 내놓으면 목숨만큼은 살려주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달리면서 고개를 돌린 린에게 자신을 바라보며 마주 달리고 있는 서큐버스가 있었다.

         

         

        “이제야 날 봐주는구나?”

         

         

        기겁하는 린의 어깨를 서큐버스의 기다란 손톱이 무자비하게 꿰뚫었다.

         

        그러나 아무리 짐꾼이라 하더라도 린 역시 용사 파티의 일원.

         

         

        “잡았다.”

         

         

        어깨 근육과 손으로 서큐버스를 단단히 붙들고 다른 손은 짐꾼의 낭을 뒤져 아주 얇은 유리병을 꺼낸 린은 그 손톱에 깨뜨렸다.

         

        치지지지직

         

         

        “꺄아아아아아악!”

         

         

        유리병에는 성수가 담겨 있었다.

         

        그것도 성녀 아르실의 기도로 만들어 낸 최고급 성수.

         

        손톱과 손에 묻은 성수가 마족의 팔을 불태우며 연기를 피어올렸다.

         

        서큐버스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린을 발로 차서 날렸다.

         

        나무에 등을 부딪치고 쓰러진 뒤 몇 바퀴를 구르며 뒹굴던 린은 갑자기 등과 바닥이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냐!”

         

         

        서큐버스에게 날려진 곳은 눈으로 살짝 덮여만 있던 절벽 위였다.

         

        낯설지 않은 부유감을 느끼며 린은 이를 악물었다.

         

         

        “네 노오옴!!”

         

         

        마족의 노성이 점차 멀어져갔다.

         

        린은 필사적으로 웅크려 복부에 있는 루시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퍼억!

         

         

        “끄윽…!”

         

         

        불행히도 린의 육체는 푹신한 눈이 아닌 검고 커다란 바위로 떨어져 부딪치고 말았다.

         

        둔탁한 충격에 묵은 숨을 토해낸 린은 한동안 고통에 몸을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어딜 달아나려고! 네놈의 피냄새, 기억했다!”

         

         

        움직여라,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잡히는 순간 그 흉측한 년 눈앞에서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널 따먹고 죽여주마!”

         

         

        복부에 열기가 오른다.

         

        루시가 서큐버스의 도발에 분노하고 있었다.

         

        루시도 서큐버스도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사나운 눈보라와 고통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축지의 술이 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쉽게도 특급 등급을 넘어서는 궁극 스킬은 2개 이상 습득하기 힘들었다.

         

         

        “특급: 기척 차단(Lv.Max)”

         

        “특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Lv.Max)”

         

         

        그렇다고 특급이나 상급 스킬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낄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자신이 죽으면 루시를 회복시킬 수 없다.

         

        최소한의 역할은 해야만 했다.

         

        스크롤로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고, 눈에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무게까지 경량화했다.

         

        린은 숨을 참고 무릎을 들어올렸다.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 아직 1장도 클리어 못했다고!

         

         

        “커헉!”

         

        “린!”

         

         

        그러나 고개를 들자 목구멍에서 피를 토해냈다.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그에게 루시는 애원했다.

         

         

        “린, 그냥 날 놓고 도망쳐. 내가 용사라는 걸 알면 저년도 나한테만 신경 쓸 거야.”

         

        “절대로 그럴 수 없어….”

         

        “린!”

         

        “절대로 널 버리지 않아.”

         

        “왜? 대체 왜…?”

         

         

        네가 없으면 애초에 세상이 멸망한다니까.

         

        그러나 그런 이유 말고도 린은 여기서 루시를 버리기 싫었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오기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지난 여정의 어느 시점부터 늘 차분하기만 하던 그의 심정에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격한 감정이었다.

         

         

        “커흡! 컥!”

         

         

        기침이 계속 난다.

         

        피는 멈추지 않고 울컥울컥 잘도 역류한다.

         

        어디를 다쳤길래 속이 상한 걸까.

         

        머리가 어지럽다.

         

        시야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다시 고꾸라진 린.

         

        이젠 한계다.

         

         

        ‘그렇게 라도 내 곁에 있게 해줄게.’

         

         

        이젠 한계다.

         

         

        ‘넌 절대 그 이상 나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어.’

         

         

        이젠 한계다.

         

         

        ‘이 위치, 이 자리가 너의 한계야.’

         

         

        이게… 내 한계인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렴.’

         

         

        맞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나름 널 각별히 생각해서 그런 거란다.’

         

        “내가 한다면…!”

         

         

        인정 못한다.

         

         

        “내가 간다고 하면…!”

         

         

        너와 대등한 위치에서 다시 마주하겠다고 했었다.

         

         

        “해내는 거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큰 맥락에서는 게임 내용대로 착착 진행되었지만 디테일은 너무나도 다른 날이었다.

         

        거기에 본편이 진행되기도 전에 있었던, 이 죽어버린 마음마저 아리게 만드는 거지 같은 기억마저 떠올리고 말았다.

         

        참으로 이상한 날이었다.

         

        오늘따라 들끓는 이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몸을 일으킨다.

         

        고개를 들어 앞을 응시한다.

         

        입가가 피칠갑이 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벌려 차가운 공기를 머금었다.

         

         

        “하….”

         

         

        앞에 있는 무언가를 확인한 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가 없구만.”

         

         

        그답지 않은 빈정거림에도 루시 역시 말을 잃었다.

         

        뻥 뚫린 어두운 공간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동굴 입구 옆에는 헤일로가 있는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작은 비석이 있었다.

         

        여신의 문양이었다.

         

        이 동굴이 바로 루시를 치료할 엘릭서가 숨겨진 곳이었다.

         

         

        “찾았다.”

         

         

        그러나 이런 쓸데없이 아다리가 맞는 인도야말로 게임다운 구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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