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보수는 짭짤하겠군.”
“헤헤, 보수만 받으면 저희도 금위환향 할 수 있는 겁니까?”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금의환향이다.”
“앗, 그렇군요!”
‘무식하군.’
그는 출항 준비를 서두르는 부하들을 배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요구한 대로 해남검문에 꽤나 큰 피해도 입혔으니, 추가 보수도 받을 수 있겠군.’
그는 시선을 천천히 돌려 약탈한 물건을 싣는 왜구들을 바라보았다. 왜구들은 마치 축제를 기대하는 사람들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
몇시간 전까지 사람들을 도륙하던 살인마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
“…”
그는 말없이 왜구들을 바라보다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슬슬 이놈들도 쓸모가 다했군.’
얼마 전 그들의 두목을 단칼에 베어내고 왜구의 우두머리가 된 그는 보수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독식하면 그 많은 보수를 전부 챙길 수 있는데 굳이 나눌 필요가 뭐란 말인가? 실력 있는 검객이라 해도 그 또한 약탈자.
약탈자가 자신의 몫을 나누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
‘보수를 받으면 전부 베어버리고 중원인으로 위장해서 적당히 자리를 잡아야겠군.’
마음 같아서는 고향인 동영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는 돌아갈 수 없는 몸이었다.
그는 도망자 신세였으므로.
살인을 즐기는 살인귀는 전쟁이 밥 먹듯이 일어나는 고향에서조차 배척받았다.
‘아니면…서장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사람을 벨 수 있다면 어디든 나쁘지 않다.’
서역인의 살을 베는 감촉은 어떨까. 살인귀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미래 설계를 차근차근 세우고 있던 도중이었다.
그의 몸이 기울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발을 디디고 있던 배가 기울어졌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그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일-”
“두목님!”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뭐?”
“약탈한 재물이 아랫 창고에 있는데 어떡할깝쇼?!”
왜구들은 다급한 얼굴로 두목에게 물었다. 두목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짜증을 담아 소리쳤다.
“그걸 말을 해야 아나! 최대한 빨리 빼내라! 가라앉기 전에 최대한 많이 빼내란 말이다!”
“예이! 애들아! 빨리빨리 움직여라! 재물을 빼내!”
‘배는 바꾸면 돼!’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만 몇 대인가.
그 배들 중 몇 대를 골라타면 그만이었다.
‘거친 풍랑에도 멀쩡했던 배에 구멍이라니, 어째서 이런 일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이번 일을 시작하기 전에 보수까지 했던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큰 파손이 있었다고?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배에서 뛰어내려 이미 반쯤 기울어져 회생 불가 상태의 배를 관찰했다.
선체의 삼분지 일이 물에 잠겼기에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예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지는 않을 터.
그는 관찰 끝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부자연스럽군.”
“예?”
“부자연스럽게 가라앉는다는 이야기다. 작은 파손으로 가라앉는 게 아니야. 이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으려면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는 거다.”
“그, 그럼…”
“주변을 경계해라! 해남검문은 수공에도 능하다고 알려졌으니 배에 수작질을 부린 게 틀림없다!”
“재, 재물은…”
“물고기밥이 되고 싶나?”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약탈한 재물을 싣고 해남도를 떠나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타고 온 배가 가라앉은 바람에 모든 계획이 산산이 조각났다.
그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인원을 나누어 타야 할뿐더러, 그렇게 되면 남은 재물을 나눠서 실어야 했다. 그리고 나눠서 실은 재물을 보고…눈이 돌아간 부하들이 합류할 생각을 할까?
갑옷을 입은 무사, 야스오는 이를 갈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수공을 펼쳤다면 아직 일부는 바닷속에 있을 터…’
그는 차츰차츰 무기를 들고 주변을 경계하는 부하들을 훑어보곤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하고 날카로운 검명이 혼란이 찾아온 항구에 울려 퍼졌다.
“같잖은 수작을 부리다니…”
‘이대로 바로 배를 타고 도망치려 해도 놈들이 수공으로 방해할 터. 놈들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이곳을 떠야 한다.’
계산을 마친 그가 검을 들고 소리쳤다.
“근처에 해남검문의 쥐새끼들이 숨어있으니 경계를 철저히 해라!”
그의 외침에 왜구들의 얼굴에 긴장이 달렸다. 그들의 수장은 어쨌든, 그들은 대부분 삼류 언저리인 왜구에 불과했다. 해남검문의 무인과 마주치면 무조건 죽는다는 뜻.
직전의 승리도 상인으로 위장한 마교의 세작을 통해 기습에 적절한 지형을 선점한 채 화살로 멀리서 공격했기에 망정이지, 그런 기습적인 작전이 없다면 이길 가능성은…
“으악!”
항구에 처절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자연스럽게 왜구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어디야?
도대체 어디냐고?
“미, 미노루가 죽었습니다!”
살해당한 왜구의 근처에 있던 왜구가 덜덜 떨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서, 당장이라도 무기를 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 기세였다.
“적은? 적은 발견하지 못했나!”
“네…네! 못 했습니다-”
“아악!”
두 번째 희생자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반대쪽. 목을 꿰뚫린 왜구가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렸다.
흙으로 된 바닥이 시체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왜구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공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크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비명이 새끼를 까듯 숫자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기이하게도 왜구들의 비명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커지기만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몸에 남은 것은 검상이 아닌, 온몸이 천천히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었으니까.
분근착골(分筋錯骨).
포로를 고문할 때 쓰는 수법이 전장에 등장했다.
“귀, 귀신이다! 귀신이야!”
“죽여줘! 차라리 죽여줘어어어어어어!”
“전부 닥쳐! 닥치란 말이다!”
‘젠장! 비명소리 때문에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어!’
근골이 천천히 뒤틀리는 고통을 어떻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야스오의 외침이 무색하게, 해남검문의 무인들이 펼치는 기습에 바닥을 뒹구는 왜구들의 목소리가 항구를 쩌렁쩌렁 울렸다.
“난, 난 더 못해!”
“마사오!”
겁에 질린 왜구 중 하나가 무기를 내던지고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물속이라면 안전하겠지 하는 안일한 사고의 발로였다.
허나 그것을 두고 볼 야스오가 아니었다. 검광이 번뜩이고, 비명과 함께 마사오의 몸이 바닥에 엎어졌다.
야스오의 검에서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야스오는 부하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도망치면 내 손에 죽는다! 맞서 싸워!”
분위기를 수습하려 내공까지 담아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공포에 질린 부하들의 귀에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작은 배를 타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 터.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검을 지팡이 삼아 기대어 서 있는 남성의 존재를 발견했다. 바다를 등지고 선 남자. 달빛에 그의 금발이 반짝였다.
“이야, 중원에서 사무라이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색목인?”
“역시 여기선 서양인이 너무 눈에 띄나.”
윌리엄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빙빙 돌리며 몸을 풀었다. 슬슬 몸을 쓸 시간이 다가오니 그 전에 근육을 유연하게 풀어두려는 준비. 야스오는 긴장한 얼굴로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넌 누구냐?”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어떻게 동영의 말을? 도대체 넌 누구냐!”
“내가 말한다고 네가 알 것 같지는 않은데. 서역에서 찾아온 기사라고 말하면 알아듣나?”
‘기사?’
당연하게도 야스오는 알아듣지 못했다. 평생 동영과 중원을 떠돌아다닌 그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륙의 존재를 알 리가 없었으니까.
“네 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이쯤 되면 전부 눈치챌 때 되지 않았나? 생각보다 멍청하네? 선발대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땐 꽤 교활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윌리엄은 일부러 야스오의 속을 박박 긁으며 눈을 돌려 전황을 체크했다.
‘왜구들은 거의 다 처리됐군.’
늦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검기로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고, 뭍으로 돌아와 복잡하게 얽힌 항구의 지형을 활용해 왜구의 수를 조금씩 줄인다는 작전.
그 심플한 작전 위에 윌리엄은 한 가지 수를 더 얹었다.
공포.
소수가 다수를 가장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
윌리엄은 해남검문의 무인들에게 최대한 고통스럽게 왜구들을 죽이도록 주문했다. 가능하면 분근착골을 동원해서.
평소라면 고통스럽게 죽이라는 말에 꺼림칙함을 느꼈겠지만, 복수심에 눈이 돌아간 해남검문의 제자들은 거리낌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해남검문의 무인들은 그의 주문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분근착골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사소한 실수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곤 했지만, 분근착골이 성공할 때까지 시도하면 그만.
그렇게 항구는 비명으로 가득 찬 지옥으로 변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재뿌려지기 싫었으면 이 일에 참가하지 말았어야지. 마교의 똥개야.”
“너, 그걸 어떻-”
‘이런!’
평정심을 잃은 그는 간단한 유도신문에 당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이미 자기 입으로 마교로부터 의뢰받았음을 실토하고 만 상황.
야스오는 낭패한 표정으로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윌리엄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자, 나를 이기면 보내주지.”
“…정말인가?”
“너한테 선택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는 경공을 배우지 않아 작정하고 도망친다면 따라잡지 못하겠지만, 야스오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야스오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증오에 물든 눈동자를 애써 무시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가 살아나갈 길은 그뿐이었으므로.
그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고,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카무라 야스오. 결투를 신청하겠다!”
수많은 피를 머금은 그의 검이 눈앞의 색목인을 향해 겨누어졌다.
“윌리엄 마셜. 결투를 받아주지.”
윌리엄의 검 손잡이가 머리 옆까지 올라갔다. 동시에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검 끝을 야스오를 향해 겨눈다.
적을 향해 뿔을 겨눈 황소 같은 모습.
옥스 가드(Ox guard).
공방일체의 자세가 달밤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수가 다수를 상대할 땐 모랄빵을 유도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죠.
기사들이 즐겨쓰는 전술이기도 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