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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

        

       만약 아청이 이공계 혹은 예체능을 전공했다면 살육의 충동과 죄악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미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청은 인문사회계열이었기 때문에, 지금 문풍당당 살아있었다!

         

       다만, 의예 혹은 법학을 전공했다면 아예 게임을 취미로 삼을 시간조차 없게 된다.

       처음부터 이 고생조차 할 이유가 없는 바-

       그러니 사람은 배워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프랑스 이즈 베이컨의 말이 곧 이러한 이치였다.

         

       “나쁜 놈은 사람이 아니니 사람취급을 할 필요가 없다. 맹자님이 말씀하셨거든. 그러니까 덤벼, 임마. 짐승이 앵겨야 사냥꾼도 재미를 보지.”

         

       노갈이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제대로 미친년한테 걸렸구나!

       딱 천하의 살인귀가 할 법한 발상이었다.

         

       노갈이 제 살 길을 궁리했다.

         

       도주는 가망이 없다.

       상대는 절세의 신법을 가졌거니와, 격공장으로 먼 상대를 타격할 수 있기도 했다.

         

       어떻게 도망을 친다 해도 문제였다.

       호위가 호위 대상을 두고 도망치면, 결국 죽을 때까지 쫓기게 될 판이었다.

       흑영회주는 자기 딸을 두고 도망친 호위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아내와 이제 열 살 난 아들 역시 참변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무찌르거나, 아니면 상대의 자비에 기댈 수밖에는 없었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는 두뇌가 전에 없던 집중력을 보인다.

       무림인이 생사를 가르는 전투 중에 벽을 깨고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경우가 벌어지는 이유였다.

         

       마침내 노갈의 두뇌는 수없는 미래 중에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길을 발견했다.

         

       고수들은 이상한 아량을 보이는 때가 많았다.

       ‘아닛, 네 절개가 참으로 훌륭하구나!’ 이런.

       물론, 그럴 확률은 만에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죽는다면 아내와 아들이라도 살려야 했다.

       흑영회주는 사파인이지만, 그래도 딸 대신 목숨을 바친 호위의 유족을 잘 챙겨줄 사람이었다.

         

       노갈이 비장한 각오를 굳혔다.

         

       “귀인께 제 목숨으로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저 하나로 이 악연을 끊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안타깝게도 아청은 이미 갈증의 한계를 넘었다.

       그간 너무 평화로웠고 어설프게 칼 없이 싸우는 바람에 피를 탐하는 흉성이 폭발했다.

         

       “싫은데.”

         

       손이 저절로 움직었다.

       길쭉하게 뻗은 손가락이 노갈의 울대를 우에서 좌로 할퀸다.

         

       손가락은 인체에서 가장 민감한 부위다.

         

       눈 깜박할 사이의 그 찰나를 백분의 일 느린 속도로 체감하기에 충분할 만치.

         

       무른 목의 가죽을 찢고 근육 속에 저항감 있게 파묻히는 이 질척함.

       탄력 있는 고무줄 같은 혈관을 손마디에 감아 걸으니 팽팽한 저항감이 한층 더해진다.

       그리고 나니 단단하게 닿는 울대뼈.

       모래를 퍼내듯 울대뼈를 움켜쥐듯 더 들어간다.

       손가락에 걸어둔 경동맥이 죽 늘어나며 빗장뼈를 넘어 어깨쯤을 지나고 나서야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툭 끓어진다.

         

       그제야 느려진 시간이 되돌아왔다.

       츄확, 뜯겨나간 대동맥이 거칠게 피를 뿜었다.

         

       마침내 얼굴에 훅 끼치는 향기로운 더운 피.

       그리고 동시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불타올랐다.

         

       척추로부터 손 발 머리 끝에 치민 질척한 벼락.

       빛들의 바다가 장엄하게 속삭이는 고요한 우주.

       206개의 뼈다귀와 힘줄과 근육과 25만리 핏줄이 소용돌이치며 하나로 뭉쳐.

       타오르는 불길 속 몽롱하게 만개하는 꽃밭.

       심장이 머리에 올라 뇌와 고막으로 맥동하는.

       일만의 목소리가 가성으로 어우러지는 합창.

       짜고 신. 매운 한숨. 달콤한 눈물 한 방울.

       ………

       ……

       …

         

       그리고는, 깨어난 잠과 같았다.

       어느 순간 깨어있음을 깨닫는 자연스러운 의식의 발아였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상쾌함이었다.

       푹 자고 일어난, 잠이 아쉽지 않은 개운함도.

       행복하게 끝을 맺은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충족감이 내면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한 정신과는 달리, 몸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어쩐지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무조건 알이 배기는 각이다.

         

       게다가 이건 또 뭐야?

       손이 무거워 들어보니, 손아귀에 감아쥔 머리채와 매달린 여인의 대가리가 보였다.

       

       “앗, 아가씨, 언제 머리만 남았어요? 불쌍하게도.”

         

       아무래도 잠시 이성을 잃었던 모양.

       개중에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모르겠다.

       전신 어디 한 군데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청이 급히 선업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딱 이 아가씨만 죽이고 정신을 차린 듯, 이전보다 아주 조금 늘어난 선업치가 보였다.

         

       아청이 머리를 툭 던져버리곤 머리를 북북 긁으며 말했다.

       

       “후, 너무 오랜만이라 그랬나…….”

         

       어쨌거나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선업은 선업대로 쌓고 기분은 기분대로 상당히 좋은 상태니 된 것 아닐까.

         

         

       —-

         

         

       다관 안으로 돌아가자 여기저기 술렁거리느라 난리였다.

       도련님들 세 명 역시 호들갑을 떨어대는 통에 아청이 간단히 설명했다.

         

       “어쩔 수 없었다니까. 잡아다가 팔다리 잘라 창관에 던져놓겠다는데, 그러세요 할 수는 없잖아.”

         

       말투는 오늘 아침 뭐 먹었는데 하는 식이었다.

       그 내용이 사뭇 흉악하여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게다가 온통 피칠갑을 하고서 턱 끝으로 핏방울을 똑똑 떨구며 와중이다.

         

       “괜찮아, 내 피 아니거든.”

       

       “누님, 일단 세수부터 좀 하셔야겠습니다. 여기 주인장, 미안한데 세숫물 좀 준비해 주시겠소?”

         

       주인은 다 필요 없고 그냥 나가줬으면 했다.

       하지만 피칠갑을 한 여인과 전신 근육이 올록볼록한 거한에게 대들 용기는 없었다.

         

       “좀 닦지.”

         

       팽대산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일부러 홀딱 뒤집어썼으니 손수건 한 장으로 될 양이 아니었다.

       손수건을 완전히 버려야 할 텐데, 선뜻 내미는 것을 보니 고맙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아, 넣어둬. 대충 닦으면 되지. 저기 많잖아.”

         

       아청이 다관 밖으로 나가, 떨어진 손수건을 주워 얼굴을 훔쳤다.

       얼굴도 좀 닦고 머리고 좀 짜고 하며 버리고 줍고 쓰고 버리고 하다 보니 축축함이 좀 가셨다.

         

       자리로 돌아오니 마침 물이 준비되어 쫙쫙 호쾌하게 얼굴에 물칠도 좀 했다.

         

       “……그래서, 이제 이야기 좀 하지.”

       

       “무슨 이야기?”

       

       “측간에 다녀온다더니 그 꼴로 나타나선, 무슨 이야기냐고?”

       

       “뭐야, 왜? 왜 갑자기 화났어?”

       

       “하, 누가? 내가?”

         

       팽대산의 반응이 사뭇 날카로웠다.

         

       아청은 무림 출도 이후로는 참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고, 굳이 대거리를 치며 마음 상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분노 멈춰!”

       

       “그딴 식으로 빠져나가려고……”

       

       “거기 아저씨도 멈춰! 지금 거기 갔다가 나중에 휘말려서 어떻게 돼도 내 책임 아니에요? 호기심은 뭐다? 호기심은 뭘 죽인다?”

         

       아청이 뒷문을 향해 외쳤다.

       슬그머니 뒷문 쪽으로 향하던 사내가 뭔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 되어 되돌아갔다.

         

       아청이 다시 다탁에 집중했다.

         

       “아니, 진짜 모르겠거든? 진정하고. 그냥 평범하게 시비가 좀 붙었고, 내가 이긴 거라니까. 검을 놓고 갔더니 만만하게 본 거지, 뭐.”

       

       “그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소린가?”

       

       “그럼 뭐 특별한 일이라고. 맨날 이러는데 뭘.”

         

       맨날 이러는데 뭘.

       팽대산은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청은 청년 고수다.

       청년 고수란 뚝 떨어져 내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또 그만한 환경에 놓여야만 젊은 청년 고수가 탄생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가문이 해 줄 수 있는 지원이라던가.

       아니면 목숨을 건 실전의 연속이 될 것이다.

         

       팽대산이 생각에 잠긴 사이, 아청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제갈이, 제갈이니까 무공 잘 알지?”

         

       사실 아직 잘 아는 사이가 아니고, 또 남녀 사이라서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고 눈치만 보던 사촌지간의 둘이었다.

       제갈이현이 부르는 말에 대답했다.

         

       “무공 말씀이십니까, 누님?”

       

       “어. 제일 쎈 수공은 뭐야?”

         

       아청이 노갈의 목을 날리던 때를 떠올렸다.

       손에 착 감기던 그 감촉. 최고였지.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수공 하나 익혀야겠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설명을 참지 못하고 끊지 못하는 제갈이현이 대답했다.

         

       “누님, 본래는 가장 강한 무공이 무엇이냐 물어도 곧바로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왜?”

       

       “무림에서는 수천 년 동안 그 이야기로 계속 다퉜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사내 둘 이상만 모이면 최강의 무공이 무엇이냐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그럼 제갈이 생각으로는?”

       

       “제 생각에는 수공은 그다지 좋은 무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

       

       “그야 수공은 본래 굉장히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검만으로도 상대를 상하게 하는 감촉이 싫다고 하는 판에, 아예 맨손으로 할퀴고 베며 살을 잡아 뜯어내는 무공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좋은 거 아닌가?

       아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시대가 맞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자꾸 딴소리 할래? 뭐가 제일 쎄냐니까.”

       

       “그건 말입니다. 다행히 수공에 한해서는 최강의 무공을 꼽는 데에 무림인 모두가 한데 입을 모을 겁니다. 그건 바로.”

         

       제갈이현은 숙련된 떠버리의 태도로 말을 끊고, 차를 한 모금 마시려고 했다.

       그러다가 옆에서 찌를 듯이 노려보는 팽대산의 시선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나 할 말 있으니 빨리 끝내라는 눈빛이었다.

       제갈이현이 빠르게 마무리를 지었다.

         

       “최강의 수공은 소수마공입니다.”

       

       “소수마공?”

       

       “앗! 목이 너무 마릅니다, 갑자기!”

         

       제갈이현이 딴짓을 했다.

       그 원인을 아는 아청이 상대를 바꿨다.

         

       “않이, 왜 우리 제갈이 기를 죽이고 그래요?”

       

       “한가하게 무공 이야기나 하고 있을 땐가? 지금 그 꼴을 하고서?”

       

       “그야,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아청은 참지 않을 뿐, 수레 앞의 사마귀처럼 굴 생각은 없었다.

       절정 후기고 뭐고 고수고 나발이고 혼자서 문파 하나를 상대할 수 없다는 정도는 안다.

       예전에 몇 번 쫓겨본 적도 있었다.

         

       “흑영회라고, 꽤 큰 문파 맞지?”

       

       “……그놈들이 흑영회 놈들이었나?”

       

       “사칭이 아니면.”

         

       팽대산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낙양에는 세 개의 큰 세력이 있었다.

       채씨세가, 주귀방과 흑영회.

       채씨세가는 대장군을 대대로 역임하는 명문가고, 주귀방과 흑영회는 사파 성향의 문파였다.

         

       아무리 관부의 힘이 약해졌다고 해도, 장군검을 쥐고 병권을 휘두르는 가문이다.

       낙양 대부분의 이권을 쥔 실질적인 현령이었다.

         

       채씨세가가 대장군의 체면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 음지의 이권을 주귀방과 흑영회가 둘로 갈라먹었다.

         

       “대낮에 당당하게 인신매매를 시도하니까, 뭐. 보통 놈들이 아니겠거니 했지 뭐.”

       

       “그걸 알면서도 건드렸다고? 아니, 애초에 네 정도 실력에 굳이 드잡이질을 할 필요가 있었나?”

         

       흑영회가 미치지 않고서야 절정 후기의 무인을 납치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무위를 보이기만 했어도 될 일을 굳이 피를 보며 해결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아청이 당당하게 보증했다.

         

       “나는 시비는 안 피해. 그리고 나쁜 놈이 시비를 걸면 더 그래. 사나이는 도망치지 않는 법.”

         

       진짜 미친 여자인가?

       순간 팽대산의 머리에 스치는 것이 하나.

       젠장, 쳐 보라 했더니 진짜로 치던 여자였지.

         

       “생각이란 걸 조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하고 살면 안 되나? 대체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째야지, 뭐.”

         

       도망친다는 소리였다.

       방금 직전에 사나이가 어쩌구, 아. 사나이는.

       팽대산의 맥이 탁 풀렸다.

         

       “도망을 치시겠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분분한 낙화!”

       

       “그놈의 헛소리! 좀 진지할 수는 없나!”

         

       팽대산이 언성을 높였다.

       아청이 대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짜식, 정이 좀 들었다고 큰소리는.

         

       “미안, 초선루였나? 담에 만나면 그때 쏘고.”

       

       “애초에 그 조금만 참았으면……”

       

       “뭐, 천년만년 같이 살 것도 아니고. 한 보름? 그 정도 일찍 헤어지는 건데 뭐.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또 보는 거고.”

         

       아청의 말에, 팽대산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용성으로 가는 표행에 따로 합류했을 뿐, 모레 출발하면 대충 그쯤 후에는 어차피 헤어질 사이였다.

       생각해보니 붙잡을 이유가, 없지 않나?

       팽대산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아씨, 짐 다 상단에 있는데. 맞네, 상 표두님한테도 탈주하게 돼서 죄송하다고 전해드리고. 소대협, 그리고 제갈이도 나중에 봐.”

       

       “소저도 몸 보중하시오.”

       

       “예, 누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아청이 다관 밖으로 나섰다.

         

       막상 어디 갈 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 갈 데가 있어서 무림에 오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렇게나 아무 데나 닿는 인생.

       강도도 좀 잡고 산적도 좀 잡고, 소수마공이라는 새로운 목표도 생겼겠다.

         

       아청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표지 뽑았읍니다 아주 마음에 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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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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