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1

       TRPG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동기부여다.

       

       플레이어에게는 강력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옆집 혜순이가 커다란 오징어한테 잡혀갔는데요── 라고 호소해봤자, 상식적으로 옆집 애가 괴물한테 잡혀갔으면 경찰을 부르지 왜 자신이 나서겠는가?

       

       혜순이가 도내 최상급 미녀에 플레이어와 달달하게 썸 타는 사이였으며, 경찰이 무능해서 출동할 기미가 안 보이는 상황 즈음 되어야 움직일 맘이 들락말락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숨의 위협만큼 확실한 동기부여가 없다. 짱 큰 괴물이 내 사지를 찢으려고 달려오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필사적이 된다.

       

       자, 2황자에게 즉석 세션을 열어주어야 하는 상황이다.

       

       대체 어떤 세션을 열 것이며 / 핵심 갈등은 무엇이며 / 동기부여는 어떻게 잡을 것인가.

       

       2황자의 방문 사실을 일주일 전에 알았다면 이것저것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뒷조사도 조금 해 보고, 성격에 맞춰서 세션의 분위기도 섬세하게 갈아냈겠지만⋯⋯ 갑작스러운 방문이다. 

       

       주문은 들어왔고, 손님한테 당장 요리를 내 가야 하는 타이밍.

       

       있는 재료부터 점검하자.

       

       판타지쪽 모델링은 대강 완료된 상황이다. 무협은 실전투입하려면 멀었고, 현대는 2황자에게 들이밀기에는 꺼려지는 부분이 있다. 왕자님이 현대에 가 봤자 식도락이나 즐기고 땡 아니겠는가.

       

       또한, 현대를 기반으로 했을 때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훈련된 서브컬쳐 독자들이라면 클리셰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갑자기 회중시계가 멈추면 그건 곧 죽는다는 뜻이고, ‘누구누구는 패배할 리가 없어! 최강이니까!’ 라는 식의 대사가 나오면 범부가 되거나 지거나 한다.

       

       그러니 척 하면 착 하고 아다리가 맞는다. 내가 세션에 미소녀를 등장시키면 ‘아 이 친구는 세션의 핵심 인물이 되겠구나~!’ 하고 이해해주고, 내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언급하면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 준다.

       

       하지만 2황자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 아닌가.

       

       직관적인 플롯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건 시간여행 각이다.”

       

       “시, 시간여해앵⋯⋯?”

       

       안마의자에 드러누운 마탑주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곳은 말하자면⋯⋯ 컨트롤 룸. 가상현실을 조작하는 가상현실 공간이다. 여기서 NPC를 움직이거나 나레이션을 읊거나 하는 것이다.

       

       나는 팝콘을 집어먹으면서 가상현실을 휙휙 조작했다. 우선은 2황자를 들어다가 외딴 숲에 던져넣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시간여행으로 가닥을 잡았으니 미래가 좋겠다 싶었다.

       

       마침 스팀펑크 미래도시 하나를 새끈하게 찍어둔 게 있었다. 마천루도 그렇고, 딱 보기만 해도 느낌이 오는 멋진 모델링이다. 도시 이름은 ‘나이트워치’다.

       

       외딴 숲 옆에 스팀펑크 도시를 붙여넣었다. 

       

       마천루가 높으니까 길을 찾기도 쉬울 거다. 2황자가 약간 시야가 트인 곳으로 가기만 해도, 하늘을 찌를 듯한 타워가 보일 테니까 숲을 빠져나가게 유도하는 것도 간단.

       

       마침 스팀펑크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었다.

       

       “마탑주님?”

       

       “웅?”

       

       “비공정 모델링좀 찍어주실래요. 10⋯⋯”

       

       “응?”

       

       “9⋯⋯ 8⋯⋯.”

       

       “???”

       

       “7⋯⋯.”

       

       마탑주 유나는 벌떡 일어나서 비공정 모델링을 깎기 시작했다. 역시 대마법사 아니랄까봐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내부는 무시하고 외부만 깎는 센스까지.

       

       급한 일은 짬처리를 시켜 놓고 모니터에 집중했다. 2황자가 나무 모델링을 보고 뭔가 집중하는 기색이길래, 어쩐지 혼잣말로 설명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당신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하네요. 주변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요?

       

       2황자 : “이 나무의 품종은 제국 수도 근방에서만 자생하는 종이다. 5대 황제의 생일을 기념하여 연금술사들에게 명령해 얻어 낸 것이지.”

       

       뭐라고.

       

       “이거 나무 모델링 마탑주님이 했죠.”

       

       “으아아 비공정 끝⋯⋯! 어, 어? 으응. 내가 했는데.”

       

       “이거 제국 수도 근방에서만 자란다는데요.”

       

       “응!”

       

       그러면 스팀펑크 미래도시 ‘나이트워치’를 쓸 수가 없잖아.

       나는 나무 모델링에 설명을 적어놓지 않은 마탑주에게 볼따구 마사지 형벌을 가했다.

       

       “으부부부부.”

       

       

       그래, 스팀펑크 미래도시 ‘나이트워치’를 쓸 수는 있다.

       

       플레이어가 저렇게 멋진 추리를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 알 빠 아니야~’ 하고, 아무튼 제국 수도 대신에 다른 도시 세워짐. 하고 넘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내 TRPG 작법과는 천만년 떨어진 행위다.

       

       플레이어가 추리를 했으면, 그리고 그게 말이 된다면, 그건 진실이어야 한다. 추리를 했는데 틀리면 기분이 나쁘지 않은가! 나는 2황자가 돌아보기 전에 마천루부터 날렸다.

       

       야심찬 미래도시 ‘나이트워치’를 싹 밀어버리고, 급하게 제국 수도 모델링을 불러와서 가져다가 붙였다. 그리고 미래 시간대라는 암시를 이곳저곳에 넣었다.

       

       성벽에 기스도 좀 내고, 건물에 의미 없는 시계태엽과 증기기관도 박고.

       

       “⋯⋯이러면 마천루가 없으니까, 도시로 유도를 못 하네?”

       

       “으부우우.”

       

       “마탑주님, 비공정 출격! 여기서 띄워서 도시까지 쭉 항해하게!”

       

       

       수상할 정도로 이동속도가 느린 비공정으로 2황자를 유도했다. 그리고 여기, 이 순간이 환상마법의 효과를 발휘할 때다.

       

       실제로 숲을 이동한 시간은 5분이지만, 느끼기는 어쩐지 한 시간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시간 인지 감속’. a.k.a 군대 훈련소 역장. 이걸로 스킵은 스킵대로 하면서 리얼리티는 알뜰하게 챙긴다.

       

       5분간 제국 수도 모델링을 가공하는 것도 마쳤다. 제국 깃발을 대신할 문장도 뚝딱 찍어냈다. 다른 왕국 문장 세 개를 대충 섞으니까 그럴듯하더라.

       

       그저 미래의 제국을 탐방하는 걸로는 위기감이 없다.

       

       위기, 중요하다. 서스펜스와 액션이 없으면 아무래도 맛이 심심하지 않은가. 마탑주에게 한국 구경 시켜줄 때에도 사건을 넣을까 말까 고민했던 나다.

       

       위기. 위기. 위기⋯⋯.

       

       “마탑주님, 제국 하면 떠오르는 거 몇 가지만 말해봐요.”

       

       “보레서 소가락 노코 마하지?”

       

       “아.”

       

       놔줬다. 

       

       “노예제, 군사강국, 황실이 적극적으로 귀족들이랑 피를 섞음 정도?”

       

       “오케이.”

       

       그럼 신분역전세계로 간다.

       

       황족 혈통을 상징하는 금발을 노예로 내리자. NPC들을 조종해서 ‘와⋯⋯ 금발? 노예인가?’ 하는 시선을 쏘아냈다. 처음 받아보는 시선에 2황자의 표정이 후끈했다.

       

       2황자가 검문 대기열을 기다리는 동안 플룻을 착착 정리했다. 메인 테마, 신분역전세계. 그리고⋯⋯ 성공담? 이 좋겠다.

       

       이미 많은 것을 거머쥐고 태어난 사람 아닌가. 밑바닥에서 올라가는 경험은 해 본 적 없겠지. 맨 아래에서 맨 위로 올라가는 그 카타르시스를 맛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아래로 처박아야 한다.

       

       

       – “정지. 신원을 밝혀라. 주인님은 어디 계시지?”

       

       – “노예가 아니면, 뭐, 노리개라도 된다는 소린가? 더러운 금발을 갖고, 아직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새끼가 있다니.”

       

       – “노예 새끼가 재수없게⋯⋯. 네 주인의 권위가 네 것이라고 착각하는 거냐? 얼마나 높으신 분인지는 몰라도, 너는, 그냥, 운 좋은 노예 새끼라고. 알아들어?”

       

       

       말로 그냥 옴팡지게 때렸다. 그리고 화룡점정.

       검지 손가락으로 이마 꾹꾹 누르기.

       

       회사에서 이걸 당했을 때 주먹이 날아갈 뻔 했다. 이세계에도 효과는 발군이었는지, 2황자는 우렁차게 커밍아웃을 했다.

       

       2황자 : “예의를 갖춰라, 경비병! 나는 제국의 둘째 황자, 이리드 크라운이다-!”

       

       

       고민했다. 불쾌함과 유쾌함의 밸런스는 절묘해야 한다.

       

       고구마 -> 사이다 전략을 쓰겠답시고, 플레이어 캐릭터의 일가친척부터 친구에 연인까지 싹 다 죽여버리고 시작하면 안 된다. 그러다가 분노한 플레이어에게 주먹을 맞을 수가 있다.

       

       플레이어가 진짜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만 긁고, 그 뒤에 즉각 사이다를 투하해야 전략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끼 이상의 욕설은 안 썼다.

       

       조금만 더 긁자. 조금만.

       

       – “너희 제국인들이 노예처럼 빌빌 기어가며 살게 된 원인이, 바로 영락제(零落帝) 이리드다!”

       

       흥미로운 설정 아닌가? 미래의 자신이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는 건.

       

       그리고 이건 뒷설정이지만 영락제니 뭐니 하는 것은 ‘왕국 연합’의 음해다. 흑마법사랑 결탁한 왕국 연합이 제국 점령 후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

       

       

       “⋯⋯⋯⋯.”

       

       “어, 저, 저기. 2황자님 표정, 죽은 생선처럼 됐는데⋯⋯?!”

       

       “엇, 어엇.”

       

       “괘, 괜찮은 거 맞아?!”

       

       아니, 안 괜찮다. 좆됐다.

       이렇게까지 상처를 줄 생각이 아니었다!

       

       프라이드가 높은 타입이라고 생각해서 확 긁었는데, 겉보기에 비해서 생각보다 자존감이 낮은 타입이었나⋯⋯? 이건 미스다. 간만에 TRPG라고 너무 성급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픽션이에요, 황자님. 이거 픽션입니다⋯⋯.”

       

       이게 모두 환상이고, 게임일 뿐이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 

       하지만 직접 말을 하는 건 그다지 아름다운 방법이 아니다.

       

       NPC로 2황자를 두들겨 패면서 통각 수치를 쭉 낮췄다.

       

       아마 투닥투닥 두드리는 정도의 느낌만 날 것이다.

       

       보아라, 이상하지 않은가? 몽둥이로 때리는데 그냥 툭툭 치는 느낌만 난다니까? 말이 안 되지? 이렇듯 간접적으로 이게 픽션이라는 걸 알려줬다. 

       

       

       -당신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졌습니다. 우르르 몰려온 경비병들이 당신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건 고통이 아닌 수많은 ‘왜?’ 였습니다.

       

       아니, 충격 받아서 안 아픈 게 아니라, 진짜 안 아픈 거야.

       진짜 안 아픈 거라니까! 철제 몽둥이로 패는데 잡생각이 어떻게 들겠냐고.

       

       안 되겠다. 급하게 나데나데 작전을 실행해야겠다.

       

       ===============================================================

       

       이 새끼 이벤트를 그냥 존나 잘 피한다.

       

       어떤 긍지 높은 퇴역 군인이 2황자의 눈빛을 보고 거두어가는 이벤트 => 등장시킨 퇴역 군인을 보자마자 2황자가 런해서 실패.

       

       돈이라도 주워서 맛있는 거 먹으라고, 2황자 앞에 빵빵한 지갑을 소환한 이벤트 => 안에 위치추적 마법이 있을까봐 두려워하며 지나쳐서 실패.

       

       ‘무료 빵집 이벤트’라며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빵을 나눠주는 이벤트 => 자기한테는 바게트로 팰 게 분명하다며 런해서 실패.

       

       길목마다 돈 많고 마음이 빵빵한 귀부인을 배치해서 2황자를 이것저것 지원해주는 이벤트 => 갑자기 벽을 넘고 달아나서 실패.

       

       “일부런가?”

       

       혹시 스스로 그냥 고통이 받고 싶었나?

       환상 마법인 거 뻔히 간파하면서 나를 놀리기 위해 준비한 이벤트를 다 피해놓는 건가?

       

       하지만 죽상인 표정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후.”

       

       비장의 수를, 쓸 수밖에.

       

       미소녀를 쓴다.

       

       보이 밋츠 걸은 유구한 전통의 클리셰이며, 파괴력이 높다.

       

       서민 감성이 살아있는 여관집 서빙 미소녀다. 

       물양동이 스폰. 물벼락을 내리고⋯⋯.

       

       – “미, 미안해요! 사람이 있는 줄은 몰라서⋯⋯.”

       

       자, 미소녀의 실수다. 이제 축축하게 젖은 2황자에게 미안하다면서 달다구리한 이벤트를 일으키⋯⋯ 저 새끼 또 튄다!

       

       급하게 설정을 추가한다. 사실 여관집 서빙 미소녀가 아니다.

       여관집 서빙 미소녀로 위장한 레지스탕스 미소녀다. 신체 스펙을 쭉 높인다.

       

       벽면 배관으로 미끄러지며 낙하하게 했다.

       

       이 수의 신묘함을 눈치챘는가?

       

       

       분홍 아령도 못 들 것 같은 여린 미소녀가 사실은 3층에서 낙하할 정도로 담대한 갭모에.

       

       에 더하여,

       

       나풀거리는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청순한 외모와는 반대로 무척 어른스러운 속옷까지!

       

       이건 완벽하다. 빨리 위를 올려다봐라. 올려다보고 전율해라 2황자 이리드! 내가 영혼을 담아 깎아낸 속옷 모델링이다⋯⋯!

       

       “악!”

       

       왜 고개를 돌리냐고⋯⋯!

       

       나는 답답하고 억울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탑주는 한심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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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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