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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

     

    “압축, 강화, 압축, 강화, 압축, 강화.”

     

    방으로 돌아온 나는 우선 장미약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여러 개를 동시에 복용해도 효과가 중첩되진 않는다.

    최대 체력이 늘어나진 않는다는 의미다. 디버프의 상쇄만 가능하다.

     

    “어차피 최대치까지 치료하는 게 한계고.”

     

    평소 잠이나 푹 자서 잘 채워놓는 수밖에.

     

    아플 때 가장 좋은 치료법.

    푹 자고, 푹 쉬기.

     

    환자가 이 두 가지를 안 하면 어떤 명의가 신약을 처방해도 소용이 없다.

     

    “쓰읍, 아무리 그래도 맛이 너무 없는데.”

     

    고대 악마들이 사는 공허차원 지옥반도에서 만든 진흙경단 맛이다.

     

    무슨 말이냐면, 역겹다.

     

    “이걸 매일 네다섯 개씩 먹기는 좀.”

     

    다른 방법이 없을까 상태창의 스킬을 유심히 살펴본다.

     

    “어, 혹시 이거 되나?”

     

    눈에 띈 스킬은 연금술의 [합성 E]였다.

     

    장미약을 왼쪽에 놓고 주머니에서 대충 잡힌 사탕을 꺼내 오른쪽에 놓았다.

     

    막대사탕, 벌꿀로 만들어진 고급품이다.

     

    “장미약의 효과와 사탕의 단맛을 합성해볼까. 단순한 물질이니 될지도 모르겠어.”

     

    손을 뻗어 합성을 시전한다.

     

    이제는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주문진이 그려지고 마나가 딱딱 자리를 찾아간다.

     

    ―화악!

     

    하얀 빛이 일고, 곧 결과물이 나왔다.

     

     

    ―――――――――――

     

    강화된 장미 벌꿀 사탕 (연성, 합성됨)

     

    섭취 시 효과 : 내출혈에 의해 감소한 체력이 6시간에 걸쳐 0.3 치료됨

     

    상당히 달콤합니다!

     

    ―――――――――――

     

     

    “이거지.”

     

    벌꿀 사탕을 하나 입에 문다.

    진득한 달콤함이 머리 끝까지 퍼지니 감각 하나하나가 살아나는 기분이다.

     

    살아있다, 살아있어.

     

    사탕은 몇 개라도 먹을 수 있지.

    물론 충치는 조심해야 한다.

     

    “스케일링 스킬은 안 나오나?”

     

    충치 예방에는 그만한 게 없는데 말이야.

    시원하니 기분도 좋고.

     

    사탕을 합성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깨달았다.

     

    아셀라와 뒷마당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었다.

     

    “늦으면 또 난리가 날 게 뻔하니.”

     

    나는 코트와 모자를 챙겨 방을 나섰다.

     

     

     

    ***

     

     

     

    별관은 비교적 시종이 적다. 시버스만 피하면 시끄러울 일은 없었기에 조용히 방을 나올 수 있었다.

     

    아셀라는 장미밭에는 없었다.

    애초에 장미밭은 중년 남자의 정수리처럼 좀 휑해 보였는데, 내가 밤새 신나게 따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남은 양이 충분하지만 시버스를 시켜서 추가로 재배하라고 해야겠다.

     

    아셀라는 아직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 순찰을 도는 기사들이 보였다.

    슬그머니 버드나무 숲으로 몸을 숨겼다.

     

    “늦었구나.”

     

    “아오 씨 깜짝이야.”

     

    어느새 아셀라가 옆에 서 있었다. 기척을 숨기는 마법이라도 썼나 보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정말이지 이 여자는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아셀라는 찰랑거리는 금발을 숨길 수 있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허리춤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저 안 늦었는데요.”

     

    “나보다 늦었으면 늦은 게 아니겠니. 빨리 가자.”

     

    그리 말하고 아셀라는 주변 눈치를 살폈다.

     

    “굳이 몰래 나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호위를 대동하면 재미가 없잖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싶거든.”

     

    “있는 그대로요?”

     

    “제국민들의 평소 모습은 볼 기회가 없어.”

     

    “볼 필요도 없잖습니까.”

     

    “언젠가 내가 옥좌에 앉았을 때 누가 받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

     

    아셀라는 대단한 소리를 덤덤하게 말했다.

     

    황제의 자리에 앉을 생각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지금 알았다.

     

    “꼭 되어야 합니까? 황제.”

     

    아셀라가 나를 무섭게 쏘아본다.

     

     

    [No. 056 : 악녀의 증오 7% → 12%]

    [변동됨]

     

     

    ‘얘한테는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지금 질문은 지뢰였다.

    아셀라가 코웃음을 쳤다.

     

    “황가의 피를 잇는 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목표야. 공자, 내 혼약자니까 경솔한 발언은 삼가도록 해.”

     

    “조심하겠습니다.”

     

    “그럼 안내해.”

     

    나는 앞장서서 별관 뒷마당과 저택 경계를 둘러싼 담장으로 향했다.

     

    담장 가운데에 뻥 뚫린 개구멍이 있다.

    저택 부지를 돌며 미리 봐두었던 곳이다.

     

    “여기로 넘어가시죠.”

     

    “여길?”

     

    아셀라가 머뭇거렸다.

    고귀하신 황족이라 지저분한 개구멍은 거슬리시는 모양이다.

     

    “간단합니다. 잠깐만 몸을 숙이면 됩니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허리를 낮춰 담장 아래로 머리부터 파고 들어간다.

     

    마왕성 잠입할 땐 이보다 악조건도 많았다. 여기는 궁전이나 다름없다.

     

    “어이쿠.”

     

    문제가 생겼다. 가슴팍에서 꽉 끼었는지 더 전진할 수가 없었다.

     

    보기엔 넓어 보였는데. 내가 이용하던 구멍이 아닌가?

     

    “황녀님, 좀 도와주실래요.”

     

    “싫어.”

     

    아셀라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럴 줄 알았어.

     

    “나를 그런 곳에 밀어 넣으려고 그랬어?”

     

    “오해입니다. 진짜로요.”

     

    아셀라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지금 배드엔딩 확률이 마구 올라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데.

     

    “황녀님? 거기 계시죠? 황녀님?”

     

    어째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 게 불안이 점점 커져갔다.

     

    …숨죽여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한데.

     

    내 착각이겠지.

     

    조금 있으니 후두둑.

    담장 벽돌이 무너져내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셀라가 마법을 쓴 것이었다.

     

    나는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아셀라는 그런 나를 보며 악마같이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잘됐네. 어디 가서 후작가의 영식으로 보이진 않겠다.”

     

    “…과찬이십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침을 몇 번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기침은 디버프였나.

     

    그걸 확인할 틈도 없이, 조금 문제가 생겨버렸다.

     

    “어라, 오라버니?”

     

    네리아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셀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는다. 긴장한 네리아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맡겨주시죠.”

     

    내가 네리아에게 가 허리를 숙이고 말을 걸었다.

     

    “안녕, 네리아. 산책하던 중이었어?”

     

    “아, 네. 오라버니는 황녀님과… 밖에 나가시는 중이셔요?”

     

    나는 네리아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갔다.

     

    “쉿. 비밀로 해야 해.”

     

    “비밀….”

     

    “일몰까진 돌아올 거야. 자, 비밀 지켜주면 이거 줄게.”

     

    주머니에서 벌꿀 사탕을 꺼내 네리아의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그걸 보자 네리아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네, 비밀로 할게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귀족가의 영애답게 드레스를 살짝 잡아 품격있게 인사하는 네리아.

     

    내 여동생이지만 정말 의젓하다.

     

    “달콤해요!”

     

    그러면서 벌써 사탕을 까먹고 천진난만하게 좋아하는 모습은 어린아이 같아서 귀엽고.

     

    아셀라가 반만 닮으면 참 좋을 텐데.

     

     

    네리아의 정수리를 톡톡 두드려주고 돌려보냈다.

    아셀라에게 돌아간다.

     

    “잘 처리했습니다. 마저 출발하시지요.”

     

    “여동생과 사이 좋아?”

     

    “갑자기 그게 궁금하세요? 그냥 뭐.”

     

    “나한테 줄 사탕은 없어?”

     

    갑자기 웬 사탕.

     

    장미약은 내가 먹어야 한다. 내 분량이다.

    네리아에게야 입막음용으로 줬지. 지난번에 좋아하기도 했고.

     

    그리고 아셀라는 시버스가 가져다준 사탕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없는데요.”

     

    내 대답에 아셀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혹시나 줄 생각이면 버려버릴 테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란 소리였어. 가자.”

     

    아셀라가 몸을 홱 틀고는 뚫린 구멍을 통해 성큼성큼 담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

     

     

    [No. 056 : 악녀의 증오 12% → 14%]

    [변동됨]

     

    [No. 077 : 질투의 화신 2% → 7%]

    [변동됨]

     

     

    ‘이건 또 왜 올라갔어?’

     

    갑자기 붉은 글자가 점등해서 확인하니 배드엔딩 하나가 뜬금없이 확률이 늘었다.

     

    ‘이게 뭐더라. 아셀라한테 불타 죽었던 건 기억나. 화형이었지.’

     

    용군단보다 악질이었다.

    그건 순식간에 끝났는데 이건 발끝부터 잘근잘근 태워 죽였었다.

     

    ‘이유가 아마….’

     

    아셀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척했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아셀라가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착각했었던가.

     

    그리고 내가 배신했다고 자기 혼자 맘대로 단정짓고는 깔끔하게 불태웠다.

     

    ‘그게 지금 오른다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

     

    아셀라의 옆자리는 사시사철이었다.

     

     

     

    ***

     

     

     

    “활기가 있는 거리구나.”

     

    다행히 영지에 내려온 후 아셀라의 기분은 어느 정도 풀어져 보였다.

     

    “제도와 다르게 회색이 많네.”

     

    아셀라의 말대로 후작령의 건물은 대부분 회색 벽돌로 지어졌다.

     

    치유사 명가인 고트베르크의 영지지만 종교적 색채가 짙지는 않다.

     

    소도시 규모의 상점가 거리는 어느 평범한 지역과 여다를 바 없다.

    북부의 희귀한 마물을 토벌하러 온 모험가 파티도 종종 돌아다닌다.

     

    “화강암이 많이 나는 지역이지요. 북부는 처음 와보셨나요?”

     

    “길거리를 처음 나와봤어.”

     

    “그러셨군요.”

     

    “저거, 먹어보고 싶어.”

     

    아셀라가 한 상점을 가리켰다. 북부의 명물인 버터 커피를 팔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분께 카페인은 수면장애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황녀님은 아직 성장기시니 건강상태를 고려하면…”

     

    “딱딱한 소리는 주치의가 되고 나서 말해.”

     

    일방적인 통보 후에 카페로 총총 걸어가는 아셀라.

     

    내버려 두면 사고를 칠 게 분명하니 빠르게 뒤를 쫓았다.

     

    테라스석에 앉으니 금방 주인이 나와 주문을 받았다.

     

    “두 분이시군요. 주문은 뭘로 하십니까?”

     

    “버터 커피 두 잔. 디카페인도 있나?”

     

    “디카페… 그런 메뉴는 없습니다만.”

     

    카페인이라는 단어를 쓴 내가 잘못했다.

     

    “그냥 줘. 나머지는 팁으로.”

     

    값으로 5실버를 지불했다. 주인이 만족하며 물러갔다.

     

    아셀라는 그동안 계속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특별할 것도 없건만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한다.

     

    하긴 내게도 보기 드문 광경이긴 하다.

    전쟁 중엔 마을을 들릴 땐 있었어도 이렇게 여유롭게 쉴 순 없었으니.

     

    “아름다운 아가씨, 꽃 사실래요?”

     

    아셀라에게 다가와 꽃을 들이미는 아이들이 있었다. 행색으로 보아 빈민가에서 지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애들은 몇 푼 주고 쫓아내야 문제가 없다. 너무 많이 주면 친구를 데려오니 그것대로 문제다.

     

    주머니에서 쿠퍼를 찾으려는데 아이의 감탄이 들렸다.

     

    “우와!”

     

    웬걸. 아셀라가 이미 아이들에게 꽃을 받아들고 값을 지불한 후였다.

     

    문제는 아셀라가 넘겨준 게 금화였다는 점이었다.

    금화 한 개는 어지간한 평민이 2주일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돈이다.

     

    ‘아이고.’

     

    금전 감각이 없어도 아예 없었다.

    청문회에서 빵 한 조각에 얼마냐고 질문받으면 대답 못 하고 영영 조리돌림 당할 높으신 분이었다.

     

    아이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좋아라 뛰어간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황녀님, 자리를 옮기죠.”

     

    아이들에게서 받은 꽃을 이리저리 돌려 관찰하던 아셀라가 나를 재릿 노려본다.

     

    “왜? 아직 커피도 안 나왔어.”

     

    “너무 많은 돈을 주셨습니다. 곧 귀찮은 일이 생길 겁니다.”

     

    “귀찮은 일이라. 어마마마도 똑같은 소리를 하셨지. 평민에게 친절히 굴지 말라고.”

     

    아셀라가 나를 돌아본다.

     

    “내가 잘못했어?”

     

    그녀의 홍채에서 황금빛 마나가 빙글, 반 바퀴 회전했다.

     

    시스템창에 글자가 반짝인다.

     

     

    [No. 021 : 평민의 죄 5% → 7%]

     

     

    배드엔딩 확률이 증가했다.

    잘 대답해야 할 순간이었다.

     

     

    이 상황과 아셀라의 사고를 유추하던 찰나.

     

    “거기, 아가씨.”

     

    어느새 덩치 큰 남자 셋이 우리에게 다가와 있었다.

     

    “돈 좀 빌리고 싶은데.”

     

    그들 중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낮은 톤으로 읊조렸다.

     

    즉시 상황을 파악한다.

     

    방금 아셀라에게서 금화를 받아간 빈민가 어린이들. 그들과는 관계없어 보인다.

     

    근처에서 아셀라가 금화를 꺼내는 장면을 보고 접근했음이 틀림없었다.

     

    놈들의 상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

    뭔지 안다.

     

    ‘슈프레 상단의 말단이군.’

     

    생각보다 치안이 안 좋은 동네였다.

    내 영지에서 겨우 상단놈들이 깡패질을 하고 다녀?

     

    남자들이 입을 열었다.

     

    “돈 좀 빌리자고. 좀 쓸 데가 있거든.”

     

    아셀라가 목을 빳빳하게 들고 남자들을 노려본다.

     

    벌레를 발견한 듯, 눈에 멸시가 들어찬다.

     

     

    [No. 021 : 평민의 죄 7% → 25%]

     

     

    확률이 점점 올라간다.

    동요가 없어 보이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이거 원.

     

    “손님, 커피 나왔습….”

     

    ―쨍그랑!

     

    나는 주인장이 가져온 커피잔을 받아 즉시 바닥에 집어 던져 깨버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남자들이 흠칫 놀라며 내게 집중한다.

     

    내가 외쳤다.

     

    “지금 누구 앞에서 협잡질이야 개자식아?”

     

    망나니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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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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