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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

       신성사제 마야를 영입해 의무소에 배치했다. 기존 의사는 바로 해고했고 당장은 마야 1인 체제로.

       

       신성치료는 어지간한 거 아니고서야 즉석에서 바로 치료가 가능하며 특히나 신탁사제인 마야는 신성력이 보통이 아니라 혼자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전투학과 교육개선 프로젝트를 실행해 보자.

       

       가장 먼저 한 것은 각 교수들이 담당하는 과목의 교육훈련계획 최신본 검토.

       

       거의 모든 교수들은 교수답게 내 의도에 맞춰서 잘들 해주었고 문제는 암살 및 납치 과목인데.

       

       이건 일반교수가 아닌 교장 키르린이 겸하고 있는 과목. 암살과 납치는 다크엘프를 따라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과연 교장은 제대로 교육훈련계획을 최신화해서 가져올까. 아니면 내가 가야하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시커먼 무언가가 교수실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초콜릿 같은 부드러운 피부에 루비색 눈동자를 지닌 키르린이었다.

       

       “교장님. 무슨 일이세요?”

       “교육훈련계획 새로 만든 것을 보여 주려고.”

       

       손을 보니 결재판 사이에 서류가 꽂혀 있다. 흐음, 이거 의외인데. 첫인상으로는 끝까지 안 하고 버틸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여기 앉으세요. 봐드리겠습니다.”

       

       앉아 있던 의자를 양보하고 간이의자를 끌어다가 옆에 앉았다.

       

       키르린이 가져온 결재판을 펼쳐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양식을 잘 맞춘 것은 물론이고 글씨가 너무도 반듯하다. 도표는 또 어떻고.

       

       컴퓨터로 작업해서 프린팅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지? 혹시 대필가가 있는 건가?

       

       “저기 교장님. 이거 누가 썼습니까?”

       “미안하다…. 겉모습은 보지 말고 내용만 봐.”

       “설마 직접 쓰신 거예요?”

       “하아, 일일이 지적하지 마. 그래도 교장인데 일반교수처럼 대하지 말라고.”

       

       키르린을 빤히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이 검붉어졌다.

       

       “그게 아니라 너무 잘 써서 진짜 교장님이 쓰신 건가 싶어서 물어본 거였습니다.”

       “엑? 아, 아냐! 내가 썼어! 이걸 누굴 시키는데!”

       

       호오, 이거 의외네. 다크엘프들은 일족사회를 이루어 살기는 하지만 이렇게나 고도화된 서류작업이 일상인 수준은 아니다. 그래서 놀란 것이다.

       

       “그건 고정관념이야. 나는 종전 후에 황성의 지원으로 공립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거든. 그것 역시 황제 폐하의 성은이었지.”

       “정말로요? 아카데미 졸업자라고요? 다크엘프가? 아, 죄송.”

       “이게 진짜…! 설마 내가 밑도 끝도 없이 지연으로 여기 온 줄 알아?! 최소한의 자격은 갖췄다고!”

       “아아, 예. 알겠습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하하.”

       

       키르린의 분노를 웃어 넘기며 서류를 검토했다.

       

       “교장님. 여기 이 과정은 좀 더 빡세게 가죠. 납치는 암살보다 어렵잖아요.”

       “헛? 이것보다 더? 그러면 애들 다칠 수도 있는데….”

       “제가 말씀드렸죠? 안전제일은 곧 뭐다?”

       “그건….”

       

       가만히 키르린을 보니 키르린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교장해임….”

       “좋습니다. 여긴 이렇게 바꾸시고요. 계속 볼게요.”

       “그래….”

       

       그렇게 키르린의 암살납치 과목까지 해서 모든 과목의 교육훈련계획 최신본 검토가 끝났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저기, 내가 할 말이….”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당장 오늘 무장전투실습부터 지도를 좀 해야 해서요.”

       

       키르린을 남겨 놓고 서둘러 교수실을 나섰다.

       

       

       # # # # #

       

       

       “이게 무슨 소리야?”

       

       학과 게시판 앞에 몰려든 졸업반 아카데미생들이 웅성거렸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오늘 무장전투 수업 관련 공지.

       

       기존 집합장소인 제4강의실이 갑자기 야외대련장으로 변경이 되었다. 게다가 전부 아카데미 표준무장을 하라는 내용.

       

       지금까지 무장전투수업에서 무장을 한 것은 학기초에 교육용 무장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입어봤을 때가 전부. 이후로는 계속 이론수업 위주로 진행되어 단 한번도 무장을 입어본 적이 없다.

       

       “반장. 이거 어떻게 된 일일까?”

       

       아카데미생들의 시선이 뒤쪽에 팔짱을 끼고 있는 졸업반 반장 나이틀리에게로 쏠렸다.

       

       나이틀리는 오만한 황금색 눈동자로 게시판의 공지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글자를 읽을 줄 모르나? 지금부터 제대로 굴리겠다는 뜻이겠지.”

       

       그 말에 아카데미생들이 서로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혹시 그 수석교수가?”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무장이나 챙겨. 설마 저 표준무장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은 없겠지?”

       

       나이틀리가 몸을 돌려 가버리자 그녀를 추종하는 몇 명의 학생들이 황급히 뒤를 쫓았다.

       

       “저기, 나이틀리. 내가 무장을 챙길까?”

       

       막 기숙사로 들어가자 추종자 한 명이 굽실거렸다. 같은 동기생이면서도 마치 영애와 시종처럼.

       

       “꺼져.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 그럼 이따 봐.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이틀리가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추종자들이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잠시 후 허리를 펴는 추종자들의 얼굴에는 증오심과 혐오감이 가득하다.

       

       “재수없는 년.”   

       “지가 공작 딸이지 공작인가.”

       “정략결혼하기 싫어서 아카데미로 도망친 주제에.”

       “조용히 해. 들을라. 우리도 가서 준비하자.”

       

       추종자들이 떠난 후, 나이틀리는 천천히 문에서 몸을 뗐다. 버러지 같은 것들.

       비웃을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기에 나이틀리는 무표정하게 옷장 문을 열고 무장을 꺼냈다.

       

       귀족원의 유력가문 중 하나인 톨루즈 공작가. 본래 제국을 호령하던 실세 중의 실세였으나 4년 전쟁 후 그 위세가 다소 약해졌다.

       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전한 선대 공작이 이렇다 할 전공를 세우지 못한 데다 심지어 끌고 나간 사병대의 절반 이상을 잃었기 때문. 귀족 출신 지휘관들이 늘 그렇듯 말이다.

       

       그래서 2황녀를 필두로 하는 전후실세, 즉 4년전쟁 때 승승장구한 일반출신 사령관들에게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 상태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는 말이 있듯이 여전히 공작가의 힘은 막강해서 어지간한 하위귀족들은 감히 공작과 대화조차 섞지 못할 정도다.

       

       나이틀리는 이러한 톨루즈 공작가의 삼녀로 작위를 물려받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고 다른 오빠들처럼 가문의 재산을 활용해 사업을 벌이거나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리고 애초에 나이틀리는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왜냐면 나이틀리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장래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특임요원. 제국 감찰대와 첩보부 등에서 활동하는 바로 그 비밀요원이다.

       

       그녀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나 4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생환한 둘째 오빠에게 전장에서 활약한 특임대들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었다.

       거기서도 오직 마왕을 죽이기 위해 결성된 특수임무요원들의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나이틀리는 가장 좋아했다.

       그 존재조차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베일에 가려진 특임대. 그것은 새장 속 귀족영애에게는 너무도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특임요원이 될 수 있는 길은 알 방도가 없었고 나이틀리는 성년이 되기도 전에 이미 정략결혼의 상대까지 정해진 상태.

       그러다 제국 특수임무 아카데미가 창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이틀리는 그대로 저택을 빠져 나와 아카데미로 도망쳤다.

       

       나이틀리는 이대로 졸업 후에 제국 감찰대나 첩보부에 들어갈 생각. 거기서 혼기를 넘길 때까지 버티다 보면 아버지도 정략결혼을 포기하겠지.

       

       그런데 한 가지 변수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아카데미 교장 키르린이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교장은 특임요원의 가장 중요한 소양인 전투학과 수업들을 모조리 축소해 버렸고 그래서 특임요원이 되어 정략혼을 피한다는 나이틀린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했다.

       

       이러다 이도저도 아닌 수준으로 졸업하면 정말 곤란한데. 새로운 전투수석교수가 와서 이것저것 바꾸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과연….

       

       지금껏 하지 않던 무장을 하고 야외훈련장으로 집합하라는 건 분명 새로 온 전투수석교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종합전투훈련장에서 마법교수를 불러다가 그 난리를 쳤는데 무장전투수업이라고 변화가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어디 책상머리에서 펜대나 굴리던 샌님이 실전경험도 없이 나대는 거라면 나이틀리 입장에서는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일단은, 가보자. 가서 확인해 보는 거야. 과연 어떤 식으로 할 건지 굉장히 궁금하네.

       

       갑옷을 갖춰 입은 나이틀리는 목검을 꺼내 들었다.

       다른 아카데미생의 것과는 달리 표면이 흠집으로 뒤덮혀 있었다. 심지어 이것도 부러져서 새로 받은 두 번째 표준무장이다.

       

       추종자들은 이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이틀리는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싸그리 무시하고 홀로 기숙사를 나섰다.

       

       

       # # # # #

       

       

       야외훈련장에 모인 아카데미생들은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무제한 대련이요?!”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습니까, 교수님!”

       

       반발하는 아카데미생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제네브 교수는 무뚝뚝하게 대진표를 읊었다.

       

       이번 무장전투수업의 내용은 ‘무제한 대련’. 말이 무제한 대련이지 토너먼트 형식으로 대진표를 타고 올라가는 방식.

       최후의 1인은 50점의 가산점이 주어지며 교수와 대련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보이는 기량의 수준에 따라 추가 점수 부여.

       

       가산점 50점은 엄청나게 큰 보상이긴 하지만 지금껏 이론수업만 해놓고 이제와서 무슨….

       분명 제네브 교수 뒤에서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저 전투수석교수의 발상이렷다.

       

       그런데 그 옆에 서있는 여자아이는 누구지? 복장을 봐서는 사제 같은데. 혹시 이번에 새로 의무소에 왔다는 그 사제? 저렇게 어리다고?

       

       아카데미생들이 이런저런 추측과 귓속말을 나누는 내내 제네브 교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진표를 모두 통보. 곧바로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련은 엉망이었다. 입학 후 실제로 칼을 휘두르고 그 칼로 사람을 때린 적이 거의 없는 아이들이었기에 무슨 유치원생들 운동회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나마 나은 아이는 있었다.

       금발금안의 여자애가 시종일관 이렇다 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는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때려 눕히고 있었다.

       상대가 워낙 수준이 낮은 것도 있지만 자세히 보니 여자애의 칼부림이 심상치 않다. 뭐랄까, 적어도 기본은 굉장히 탄탄하다고 해야 하나.

       

       “제네브. 쟤는 뭐냐?”

       “여기 졸업반의 반장입니다.”

       

       어디 보자. 이름이 나이틀리 톨루즈? 톨루즈라면 설마 그 톨루즈 공작가의 그 톨루즈?

       

       “맞습니다. 따로 혼자 여기 훈련장에 와서 허수아비를 상대로 매일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호오, 그래. 귀족가의 딸이 참 신기하네.”

       

       제네브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나이틀리라는 여자애는 세 명을 연달아 패배시키고는 우리 쪽을 돌아봤다.

       

       “교수님. 다 끝났는데요.”

       

       이제 보니 이미 나이틀리 혼자 남은 상황. 제네브가 목검 하나를 꺼내 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이틀리 학생. 가산점 50점 부여한다. 그리고 본 교수와의 대련을….”

       “아니요. 교수님 말고요.”

       

       나이틀리가 목검으로 제네브 뒤에 서있는 나를 겨눴다.

       

       “저분하고 한번 해보고 싶은데요.”

       “엥? 나하고 하고 싶다고? 왜?”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

       

       나이틀리가 대답했다.

       

       “갑자기 수업이 틀어진 건 분명 수석교수님의 입김 때문인 건 맞는데, 뭘 알면서 이렇게 하시는 건지 아니면 그냥 부임초기의 열정으로 무리수를 두시는 건지 알고 싶어서요.”

       

       그 당돌한 태도에 제네브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수석교수님. 톨루즈 공작의 딸입니다.”

       “알아알아. 그런데 저렇게 나오는 것을 어떻게 안 받아 주냐.”

       “죽으면 안 됩니다.”

       “알았다고. 안 죽여.”

       

       목검을 건네 받아 나이틀리 앞에 나아가 서며 물었다.

       

       “네 말은즉, 내가 과연 이런 짓거리를 할 정도의 자격이 되는지 증명을 해보이라는 거 아니야? 그렇지?”

       “맞아요.”

       “그럼 원하는 대로 덤벼 봐라. 한 합을 버티면 가산점 300점, 두 합을 버티면 500점이다.”

       

       내 선언에 여기저기서 숨 넘어가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정도 가산점이면 시험을 보지 않고도 만점, 앞으로 출석 절반을 빼먹어도 만점이다.

       

       “뭐해? 안 오고?”

       

       목검을 휙휙 돌려 거꾸로 쥐자 나이틀리가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 # # # #

       

       

       바닥에 뻗어 코피를 흘리며 나이틀리는 저만치에 떨어진 부러진 목검을 쳐다봤다.

       

       윽, 엑, 억.

       전투수석과의 대련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희멀건한 샌님처럼 생겼는데, 목검을 이상하게 쥐길래 역시나 아무런 경험도 없는 책상머리 교수인 줄 알았는데.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일시적으로 시야가 암전되는 순간 나이틀리는 깨달았다. 저 교수는 인간의 범주가 아니다.

       

       둘째 오빠에게 들었던 베일에 가려진 소문의 마왕사살 특임대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확실히 미친 인간임은 틀림없다.

       저 교수,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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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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