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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0

       역시 사람은 뭘 좀 먹어야 기운이 나는 법이다.

        

       배가 차고 머리가 조금 나른해지고 나서야 속이 조금 편해졌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과는 ‘뭐 어쩌라고’였다.

        

       그래.

        

       뭐 어쩌라고?

        

       갑자기 모르는 인간이 튀어나오는 걸 처음 겪어보는 것도 아니다. 이미 레나의 사례가 있으니까.

        

       황제가 나를 뭔가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애초에 황제는 이미 나한테 이것저것 시켜왔다. 대놓고 백작 암살을 명령하기도 했고, 아카데미가 아니라 전장에 보내려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피하게 만들어준 건 내 능력도 아니고 앨리스였다. 내 방에 있던 모르핀을 보고 분기탱천한 앨리스가 곧장 황제 앞으로 달려가 담판을 지은 결과다.

        

       능력의 한계? 그것도 언젠가는 찾아올 거였다. 솔직히 너무 사기스런 능력이긴 했어. 다른 소설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속의 회귀 능력자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이 굴러다녔다. 죽어야 시간이 돌아간다던가, 아니면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거나. 솔직히 내가 지나치게 꿀 빨았다고 해도 좋다.

        

       게다가…… 음, 적어도 지금까지 흘러온 상황을 생각하면 딱히 되돌려야 할 만큼 치명적인 실수도 없었고.

        

       그러니까,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나중에 그놈이 또 나타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지, 뭐.

        

       옛날에 한번 궁금해서 가본 곳의 심리상담사가 했던 말이 있다. ‘당장 해결하지 못 할 일로 고민하지 마라. 적어도 고민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라.’ 그렇다. 괜히 준비조차 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면서 머리 아파해 봐야 아무 의미 없다.

        

       “…….”

        

       앨리스가 나의 표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창밖으로는 끝도 없이 펼쳐진 나무들이 줄지어 행진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나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정말, 회복력 하나는 감탄 나온다니까.”

        

       “……제 얼굴에서 뭔가 보이십니까?”

        

       “응.”

        

       내 질문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지난번 전장에 다녀왔을 때도 그랬고, 혼자서 뚱하니 생각에 잠겨있다가 몇 시간 뒤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돌아오거든. 이번에도 그랬고. 아버지랑 만난 직후에는 엄청나게 충격받은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또 멀쩡하잖아.”

        

       “맞아. 아까 아침에 방에 올라갔을 때도 멍한 표정이었어.”

        

       내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레어가 덧붙였다.

        

       참고로 레오는 앨리스 옆자리에 엄청나게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같은 학생회 멤버였고, 그래서인지 종종 다 같이 차도 마시고 하면서 서서히 그 벽을 허물어가고 있었는데, 막상 어제 황제를 만나고 나서 앨리스와 내가 정말로 ‘황녀’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상기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내 시선이 레오한테 간 것을 보고 클레어가 레오를 조금 흘겨보았다. 괜히 그런 태도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거냐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조금 미안하네.

        

       “생각할 것이 많았으니까요.”

        

       “그래?”

        

       “…….”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앨리스도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물어보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음.”

        

       나의 물음에 앨리스는 잠깐 생각하더니,

        

       “안 물어볼래.”

        

       그렇게 딱 잘라서 대답했다.

        

       입을 다문 채 앨리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더니, 앨리스는 피식 웃었다.

        

       “왜 그러는지 궁금해?”

        

       “궁금합니다.”

        

       당연히 궁금했다.

        

       나는…… 나라면, 이런저런 방식으로 시간을 돌려가며 캐 물었을 테니까. 물론 그래도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면 포기했겠지만.

        

       이미 제국의 금서고까지 다 털어봤던 나였다. 예언에서 나의 존재가 명확하게 등장한 적 없다는 것까지 확인했으니까.

        

       물론 그건 개인적인 비밀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단서를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딱히, 별다른 이유는 없어.”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있던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정말이지, 숲은 질리지도 않고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달리며 중간중간 마을이라고 할만한 곳도, 도시라고 할 만한 곳도 보였지만, 모두 숲속에 파묻히듯 존재했다. 만약 이 세계관에 다른 종족이 있었다면 여기야말로 엘프들이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논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질문을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냥, 지금은 별로 물어보고 싶지 않아. 아니, 아마 앞으로도 내가 직접 물어보는 일은 없을 거야.”

        

       고개는 여전히 창문을 향한 채, 앨리스는 푸른 눈동자만 내 쪽으로 돌려서 나를 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네가 말해줄 때까지는.”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앨리스는…… 나에게 이미 자기 생각을 말했었다. 바니걸 복장으로 카지노에 잠입하기 전에. 게임에서는 그저 클레어에 대한 열등감이 섞였다는 이유만 나왔고, 사실상 서비스신을 제공하기 위한 이벤트 장면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게임과 이 세상 사이에 다른 것이 있다면, 게임의 캐릭터는 스토리를 위해 움직이고, 이곳의 사람들은 스스로 움직여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어딘가 후련한 표정이네.”

        

       “…….”

        

       앨리스가 또다시 내 머릿속을 읽은 것 같은 말을 해서, 나는 클레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클레어.”

        

       “어, 응!?”

        

       살짝 입을 벌린 채 앨리스와 내가 대화하던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클레어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갑자기 자기한테 말을 걸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제 표정에 그렇게 감정이 잘 나타납니까?”

        

       “어…… 어어?”

        

       순간 나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는지 클레어는 잠깐 버벅대다가,

        

       “어, 아니? 가끔은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평상시에는 안 그렇다고 해야 할까…….”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말을 더듬으며 그렇게 말하는 클레어의 목소리를 듣고,

        

       “흐응.”

        

       앨리스가 콧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클레어의 미간에 주름이 팍 새겨졌다.

        

       “뭐야, 그 반응은?”

        

       살벌하다거나, 차갑다거나, 아무튼 진짜 악의가 담긴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조금 짜증 난 것 같은 목소리이기는 했다.

        

       “내 말 어딘가가 잘못됐어?”

        

       “아니, 잘못된 건 아니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못 하는 사람을 보면 조금 우월한 감정이 들기도 하는 법이잖아.”

        

       “뭐어!?”

        

       어…….

        

       저기, 클레어, 아무리 방음이 잘 안되는 20세기 기차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빽 소리를 지르면 주변 사람들이 죄다 이쪽을 쳐다보는데.

        

       게다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 더 쳐다보기 쉽고.

        

       아마 클레어를 보는 사람 중 대부분은 얼굴에 경악한 표정을 하고 있을 거다. 클레어가 누구와 자주 다니는지 잘 알고 있을 거고, 이유를 막론하고 그 함께 있는 존재 앞에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몹시 불경한 일이었으니까.

        

       황녀에게 남작가의 딸이 소리를 질렀다고 하면—

        

       가장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귀족의 반응을, 앨리스 옆자리의 레오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크, 클레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레오가 클레어를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했지만, 바로 옆자리도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쉽게 말리지는 못했다. 우리 사이에는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었으니까.

        

       게다가, 일어나려는 레오를 앨리스가 옆에서 잡고 있었다.

        

       레오는 그 사실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뭔가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는 있었지만……

        

       ……어, 미안.

        

       나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말이야.

        

       “너는 언니랑 오래 지냈잖아! 나도 너처럼 시간만 주어졌다면 분명히 너보다 훨씬 더 언니의 감정을 잘 읽을 수 있었을 거라고!”

        

       음…….

        

       아니, 그런 걸로 싸울 생각이면 아카데미에 가서 싸우면 안 되는 걸까? 차라리 싸울 거라면 목소리라도 조금 낮춰주던가.

        

       아니지, 그냥 아카데미 갈 때까지 좀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내 옆에서 그렇게 싸우면 내가 엄청나게 민망하잖아.

        

       지금도 간신히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있는 거라고.

        

       물론 앨리스는 그런 나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저거 분명히 내 표정을 알아본 거다.

        

       “글쎄, 어떨까. 너는 그래본 적이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 사실을 그렇게 확신할 수 있겠어?”

        

       “익……!”

        

       앨리스의 말에 클레어는 순간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가,

        

       “…….”

        

       후우, 하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하고 기품있는 자세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마치 조금 전에 소리 질렀던 순간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 태도는 그저 연기였을 뿐이다. 클레어의 투쟁심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언니.”

        

       그 증거로, 클레어는 자리에 앉자마자 내 쪽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네.”

        

       “내 얼굴을 똑바로 봐줘.”

        

       내 쪽으로 몸을 살짝 틀고 앉아 클레어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말없이 그렇게 해 주었다.

        

       클레어는 짙푸른 눈동자를 나에게 향했다. 앨리스나 클레어나 모두 푸른 눈동자였지만, 앨리스가 맑은 호수 같은 눈동자라면 클레어는 마치 블루홀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동자여서 이렇게 똑바로 바라보면 조금 무서웠다.

        

       “지금부터 학교 갈 때까지, 언니 표정 맞추는 연습을 할 거야.”

        

       “…….”

        

       나는 앨리스 쪽을 바라보았지만, 앨리스는 그저 가소롭다는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

        

       망했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김승우383 님, 후원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 덕분에 100만 조회수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글 쓰던 때 조회수가 0이나 1을 오가던 때도 있었어서, 이렇게 100만을 찍을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언제나 글 쓰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은 했는데, 사실 지금도 조회수가 그렇게 나왔다면 계속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싶네요. 제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독자 여러분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쭉, 독자 여러분을 위해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판나 님, 후원 감사합니다!

    100만이라는 조회수가 이렇게 직접 봐도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사실 예전같았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조회수입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더라도 조회수가 100을 찍어본 적이 별로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제 글을 읽어준다는 감각도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독자 여러분께서 저의 글을 읽어 주셔서 제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을 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거기 감사하기 위해서라도 이 글을 제대로 완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타는 최대한 빨리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KYYY 님, 후원 감사합니다!

    100만 축하 감사합니다! 100만이라는 조회수가 쉽게 찍히는 조회수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제 소설을 최신화까지 꾸준히 따라와 주셔야 겨우 찍을 수 있는 조회수죠. 1만명이라는 사람이 제 소설의 조회수를 100씩 올려주어야 겨우 찍을 수 있는 조회수입니다. 사실 저의 글을 그렇게 많은 분들이 읽어주신다는 것이 실감이 잘 가지 않습니다.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한지 2년 되어가는 사람이고, 돈을 받고 쓰기 시작한지는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앞으로도 꾸준히 발전하여 독자 여러분을 위해 글을 보여드릴 수 있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쓴 글에 그 수많은 독자 여러분께서 쓰신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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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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