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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0

       퍼리와 수인은 엄연히 다르다.

        이건 전지의 비석에서 쓰여있을 만한 진리이자 일반인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상식이었지만 갤러리의 문물 대부분을 내가 배포한 이 세계에선 낯선 개념이었다.

        사람에게 동물 귀만 달려있는지 주둥이까지 튀어나와 있는지는 유저들에게 그리 중요치 않았다.

        인간과 다른 신체적 특징을 가진 생물들은 모조리 ‘마족’으로 규정하는 대륙에선 그냥 똑같은 험짤일 뿐.

       

        허나 오늘부로 발디니 가의 성에는 명확한 경계가 생겼다.

        내가 마법사들을 모아놓고 성의 지하에 있는 작전 회의실에서 둘의 차이에 대해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자, 만약 여러분의 여자친구가 저주를 받아 짐승으로 변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여기 1번부터 5번까지의 그림이 있는데 몇 번이 제일 좋은가요?”

        “으음…… 2번?”

        “3번까지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슬아슬하지만 합격이로군.”

        “가주님께서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네 발 달린 짐승에서 평범한 인간까지 총 다섯 개의 그림을 순서대로 칠판에 그려놓고 문제를 내자 척척 맞추는 학생들.

        개중에는 그냥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1번에 슬그머니 손을 드는 마법사들도 있었지만 인간에 가까운 4번이나 5번은 없었다.

       

        짐승인 척하는 사람과 사람인 척하는 짐승은 엄연히 다르다.

        이걸로 천변의 방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마족이나 다름없는 수인을 공격하는데 망설이는 이들은 더는 없겠지.

       

        “…….”

       

        뒤에서 팔짱 끼고 서 있는 세라의 표정이 4대 재앙보다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성을 탐색할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었다.

        발디니 가의 마법사들이 싸우는 동안 마지막 스테이지로 가는 문을 찾으면 굳이 저 많은 수인들과 드잡이질을 할 필요 없었다.

       

        용기백배한 마법사들이 밖으로 돌격하는 사이.

        나는 루벤에게 성 내부의 지도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는 적의 침공루트로 활용되는 만큼 절대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물건이지만 교보재로 사용했던 그림의 원본보다 가치가 높진 못했다.

        악의의 층에서처럼 만난 지 반나절도 안 돼서 내게 둘도 없는 호의를 가지게 된 그는 품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었다.

       

        “자네들이 성에서 찾는 물건이 있다고?”

        “물건이라기보다는 문입니다. 지도가 있다면 저희가 그것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와 아들의 ‘진정한 친구’인 자네라면 이걸 믿고 맡길 수 있지. 자, 받게나.”

        “어이쿠, 목소리를 낮춰 주시지요. 저는 감히 루벤 님께 그런 이름으로 불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아르투르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세라에게 들릴까 봐 하는 말이었지만 백가의 귀족 앞에서는 겸양한 태도로 비춰졌다.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린 그는 한 가지 정보를 주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지하감옥에서 이상한 보고가 올라왔네. 탈영했다 잡힌 병사 하나를 가둬놨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자네들이 찾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니 한 번 조사해 보게. 아, 괜찮다면 아르투르는 여기에 남기도록 하지. 본인이 저 수인 놈들을 직접 해치우겠다는 결심이 워낙 확고해서 말이야.”

       

        탑에서 보인 행동에 따라서 존재의 본질을 확립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아르투르가 얻게 될 이명은 ‘진정한 털박이’나 ‘극단적퍼리애호파’ 정도겠군.

        행보를 보아하니 내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분탕의 왕’을 빼앗기진 않을 것 같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세라가 돌아오자 우리는 곧바로 성의 지하로 향했다.

       

        — 쿵, 쿠웅……!

       

        벽과 천장을 타고 전투의 소음과 진동이 전해졌다.

        마리엘이 만들어낸 광구(光毬) 위로 돌가루가 떨어지자 지도를 잡고 있던 세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조금 전 대놓고 2번을 고른 아르투르에게 나가 죽으라며 으르렁대긴 했으나 막상 떨어지니 걱정되기는 하는 모양.

        등반의 실패는 둘째치고 천변의 방 안에서 죽는다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기에 더욱 그랬다.

       

        “역시 억지로라도 데려왔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다 같이 싸워서 안전을 확보한 뒤에 내려오던가.”

        “시간을 끌면 끌었지 저희가 본 숫자만으로 퇴치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발디니 가문 마법사들의 평균치 실력이라면 저희가 가세한다 한들 큰 도움이 안 되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오히려 상당히 전력을 보존한 셈이잖아요? 누구 덕에.”

        “그렇죠, 누구 덕에.”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샬롯과 엔이었다.

        두 사람이 비록 나에 대해 두려움과 적개심을 품고 있더라도 감히 능력만큼은 의심할 수 없었다.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정보를 긁어모아 스테이지를 빠르게 클리어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조언을 해줄 마가렛과 연락이 닿지 않는 시점부터 천변의 방을 통과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선택한 것이었다.

       

        아르투르에 대해서도 별걱정 하지 않았다.

        성에서 루벤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원이 온다고 했어.”

        “네? 지원이요?”

        “우리를 처음 봤을 때 말이야.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먼저 와서 다행이라고 말했잖아.”

        “그러고 보니…….”

        “같이 싸워줄 사람이 있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저 위는 그들에게 맡기고 마지막 스테이지를 통과하는 게 우선이야.”

       

        루벤이 불렀다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곳은 아르투르의 심상이 구현된 장소지만 알게 모르게 다른 팀원들의 무의식도 조금씩 섞여 있을 테니까.

        다행히 세라는 안도한 기색이었고, 손의 떨림도 멈추었다.

        글레시아 학파의 문하생 대표인 그녀는 대미궁 때부터 내 실력을 봐온 마법사였다.

       

        “비록 내가 발디니 가문의 마법사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그 녀석이 말려들긴 했지만…….”

        “아, 아뇨! 괘념치 마세요……! 걔는 원래 이상했는데 증세가 더 심해진 것뿐이고 거기서는 별다른 수도 없었으니까…….”

        “중층에 올라가면 그 이상한 취향을 고칠 방법을 물색해보자.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그 ‘친구’인지 뭔지를 찾는 것도 도와줄게.”

        “제가 봤던 사람 중에 그 취미를 공유할만한 인간은 마법사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진행하는 관리인밖에 없던 것이에요.”

       

        어허, 나쁜 음해.

        나는 아르투르와 퍼리와 관련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털박이 게시판 개설을 허락해주거나 퍼리 컨벤션에 대한 정보를 은근슬쩍 흘린다거나.

        야심한 새벽 파딱들의 눈을 피해 버려진 게시판에서 ‘B랭크 접근제한 폴더’에 격리되어 있던 ‘수상하리만치많은돈을지불한커미션모음집’을 그에게 넘겨준 기억 따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요.”

        “…….”

       

        마리엘의 의구심을 단칼에 잘라버린 나는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에 표시된 지하감옥에 도착했다.

       

       

       

        *

        오는 길에 보이는 문은 모조리 열어봤지만 마지막 스테이지로 향하는 입구는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이곳에서도 찾지 못한다면 그때는 진짜로 성을 샅샅이 뒤져야 할 판이었다.

       

        당장 성이 존폐의 위기에 놓여서인지 감옥 안에 죄수는 한 명도 없었다.

        간수나 경비도 존재하지 않아 캐묵은 먼지 냄새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일단 감방문을 하나씩 열어보죠. 왼쪽 통로부터 인원을 나눠서…….”

        “찾은 것이에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마리엘의 머리카락이 부자연스럽게 나풀거리더니, 이내 감옥 안의 먼지가 일어 코를 간지럽혔다.

        신비를 이용해 혼자서 탐색을 끝마친 것.

        이번만큼은 시간이 곧 생명이었으니 옳은 판단이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한 감방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딱 봐도 수상하네요.”

        “그렇죠? 다른 곳은 다 철창인데 여기만 그냥 문이라니.”

        “거기다 크기도 보통이 아닌데요? 성문을 떼어다 붙여놨다고 해도 믿겠어요.”

        “이거 열 수는 있을까요?”

        “노력해봤지만 실패한 것이에요.”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감옥의 한쪽 벽을 완전히 잠식하고 있는 거대한 석문.

        누가 봐도 이런 곳에 있을 법한 크기가 아니었기에 여기가 확실해 보였다.

        마리엘의 말에 따르면 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 걸음 뒤에서 네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창을 꺼내 들고 앞으로 나섰다.

       

        “비켜봐요.”

        “관리인?”

       

        문의 아치와 형태가 어디선가 봤던 것처럼 익숙했다.

        범상치 않은 크기나 양쪽으로 당겨서 여는 구조, 가장자리에 울퉁불퉁하게 돋아난 장식품의 흔적까지 내 기억에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창끝으로 문의 가장 높은 중심부를 조심스럽게 긁어냈다.

        덮여 있던 돌조각이 후두둑 떨어지자 안쪽에서 세로로 찢어진 동공을 연상캐하는 진홍색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꺄악!?”

        “저, 저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친 팀원들을 무시하고 나는 주변부를 마저 긁어냈다.

        지하 감옥에 쓰이던 기존의 석재들이 떨어져 나가자 그 아래에서 본래 문을 이루고 있던 묵빛의 기묘한 광석들이 번들거리는 빛깔을 되찾았다.

       

        사슬과 덩굴손, 꽃잎과 칼날, 뿌리처럼 박힌 다리와 가지처럼 뻗은 손이 새겨진 끔찍한 예술품과도 같은 모습.

        가장자리에는 한때 대륙에서 가장 위대했던 다섯 검사가 조각되어 있다.

       

        “마리엘.”

        “네?”

        “홀크로프트가 뭐랑 싸워서 졌다고 했죠?”

        “지, 지다뇨! 프루소냐 대평원 전투는 은익 기사단의 압도적인 승리로 여섯 번째 명계의 문이 열리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음, 왜 지금껏 마지막 스테이지에 입장하지 못했는지 알겠군.

       

        이건 명계의 문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기와 편도염으로 지옥을 맛보다 돌아왔습니다.
    병원에서 목을 안 써야 빨리 낫는다고 들었는데 말하는 게 일인지라 2주가 넘게 걸렸네요.

    기다려주시고, 또 후원해주신 독자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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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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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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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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