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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1

    희미한 조명이 내부를 밝히고 있는 첨단 실험실에는 점성이 있는 검은 점액으로 가득 찬 커다란 수조가 불길하게 자리 잡았다.

    검은 점액은 무겁고 불쾌한 냄새를 풍기며 공기 중에 스며들어 불길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연구소장은 그 섬뜩한 혼합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연구소장의 몸은 사정없이 찢어지고 뚫린 상처로 가득했는데, 그 안에서는 검게 썩어버린 장기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속 내용물이 비쳐 보이는 상처들은 수조 안에 가득 담긴 검은 액체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며 점점 그 틈을 메웠다.

    상처를 모두 치유한 소장이 수조에서 올라올 때, 그의 표정은 비장한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정도 준비라면 회색 사신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겠지.”

    마치 자신의 결의를 다시 확인하는 것 같은 결의가 담긴 혼잣말이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점액이 흘러내려 그가 지나간 흔적을 남겼다.

    철퍽철퍽.

    그 뒤를 따르듯이 찍힌 소장의 발자국.

    하지만 그 발자국 모양은 평범한 발자국 모양이 아니었다.

    익숙한 형태의 발자국 대신 뒤틀린 촉수 덩어리처럼 기괴하고 비정상적인 발자국이 남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오싹한 무늬가 각인되어 현실과 초현실적인 것이 뒤섞인 불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소장은 그대로 석유 냄새로 가득 찬 방을 나갔다.

    소장이 떠난 방에는 바닥과 벽에 기괴한 흔적들이 잔뜩 남았다.

    마치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뒤틀리는 것처럼 보이는 흔적.

    인간의 근본적인 무언가가 변질된 흔적.

    그 흔적들은 마치 인간과 오브젝트, 현실과 비현실의 금지된 문턱을 넘은 것을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

    와,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한때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었던 송파구 싱크홀을 찾아와 보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송파구 싱크홀 근처는 군인들만 잔뜩 돌아다니는 재미없는 곳이었는데, 어느새 재미있어 보이는 곳으로 변해있었다.

    나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 송파구 싱크홀에 잔뜩 모여 있다는 소식을 격리실 TV로 접하고 장작도 수집할 겸, 트리니티 연구소를 찾아가기 전에 몰래 놀러 나온 것이다.

    아마 세희 연구소에서는 나를 엄청나게 찾고 있지 않을까?

    히히.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고는 하지만 싱크홀에서 간헐적으로 오브젝트가 기어 올라오는 위험 지대인데도 관광객이 정말 많아 보였다.

    모여든 군중들의 감정들이 이 주변을 가득 메울 정도로 가득했다.

    호의.

    경외.

    긍정적인 에너지가 주변에 가득했다.

    관광객들이 향하는 곳은 싱크홀 근처에 유일하게 민간인이 들어갈 수 있는 시설.

    <회색 사신 송파구 기념관.>이었다. 

    격리실 TV에서 알려준 정보로는 당연히 이 기념관 설립은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었지만 결국 설립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었다.

    군인들의 눈을 피해서 ‘회색 사신’이 싸웠던 싱크홀 근처로 몰래 잠입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랬다고들 하던데, 정말일까?

    사소한 의문을 품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뚜방뚜방.

    유령화로 관광객이 늘어선 줄을 지나쳐서 기념관으로 들어섰다.

    회색 사신 기념관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맞닥뜨린 분수대에 조금 감탄이 나왔다.

    돌에 새겨진 자기 모습과 그 윤곽을 따라서 부드럽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볼 수 있는 사람이나 오브젝트는 드물겠지.

    물보라가 튀는 소리와 부드러운 멜로디가 공간을 평온함으로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마치 내가 조각상이 된 듯한 기묘한 느낌에 빠져서 멍하니 서 있는데, 동전이 튕기는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고개를 돌려 분수대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눈을 감은 그의 표정은 마치 기도하는 듯한 경건한 표정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무슨 행운의 분수 같은 취급인 건가?

    보통 동전을 던지는 분수는 그런 법이니까 말이다.

    그때 기도를 하는 사람으로부터 감정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숭배. 

    미약한 숭배의 감정과 삶의 좌절과 현실을 덜어줄 구세주에 대한 갈망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때 기념관 구석에서 이곳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대화가 들려왔다.

    총기를 세워서 들고 경비를 서고 있는 두 명의 군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정말,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

    분수대의 물소리와 주변 소음으로 인간이라면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

    “지금도 저 싱크홀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오브젝트가 올라와서 비상 터지는데, 여기서는 오브젝트를 찬양하는 기념관이라니.”

    “뭐, 그래도 기념관이 있는 편이 편하지 않아요? 전에는 차단선 넘어서 들어가 죽은 사람이 한 달에 한 번은 보였는데, 요즘은 없잖아요.”

    투덜거리는 병사에게 다른 병사가 실용적인 관점에서의 반대 의견을 더했다.

    “하, 그거야 그렇지. 그래도 요즘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여기 입장료가 10만 원이 넘는데 오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양천구 호수처럼 회색 사신도 정신 오염 능력 있는 것 아니냐?”

    “그거야 곧 밝혀지지 않을까요? 트리니티에서 ‘회색 사신’ 분석한다고 하던데, 트리니티는 믿을만하죠.”

    “그러면 좋겠네.”

    그것을 마지막으로 군인 두 명의 대화는 끝이 났다.

    갑자기 튀어나온 트리니티의 이름은 내 흥미를 꽤 자극했다.

    생각보다 내가 트리니티로 간다는 소식이 많이 퍼졌구나. 

    트리니티도 유명하고, 특급 오브젝트인 나도 유명하니까 시너지가 일어난 것 같네.

    그래서 그런지 이번 트리니티 연구소에 방문이 더욱 기대되었다.

    분수대의 잔잔한 물소리를 지나 기념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구경하는 전시물이 보였다.

    이 전시물들은 바닥 일부를 잘라내서 굳힌 것처럼 보이는 전시물들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공룡 발자국 화석을 전시해 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표지판에는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황당한 것이 쓰여있었다.

    <회색 사신의 발자국.>

    진흙을 밟아서 생긴 발자국을 모종의 처리를 해서 굳힌 전시물이었다.

    조그마한 발자국을 보면서 황당해하는 동안, 관객들이 하는 대화의 일부가 들려왔다.

    “설마 저게 그건가. 손뼉 치고 발로 콩 밟았던 거?”

    “표지판을 보니까 그게 맞는 거 같은데?”

    수많은 관람객이 강제로 화석으로 만든 내 발자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대화 소리와 카메라 셔터음. 

    내 발자국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 

    장작은 잔뜩 들어와서 좋기는 하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회색 사신 기념관을 떠났다.

    ***

    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핫초코의 바다 위에 떠있는 쿠키의 섬에서 황금 사신들과 푸른 사신들의 은밀한 정보 교류가 이뤄지고 있었다.

    말할 수는 없지만 손짓과 발짓을 하면서 설명하는 모습은 마치 학예회를 하는 유치원생들처럼 어딘가 어설프면서 귀여웠다.

    사실 생각이 짧은 황금 사신의 보디랭귀지만으로는 부족했지만, 사신들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그 부분을 충분히 메워주었다.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황금 사신들은 이야기꾼 역할을 맡았다.

    그들의 몸짓과 생생한 감정은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모험을 그려냈다.

    푸른 사신들은 호기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푹 눌러쓴 모자 너머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양손을 벌려서 커다란 오브젝트와 싸웠던 일을 묘사하고.

    폴짝폴짝 뛰면서 즐겁게 춤을 췄던 일도 묘사하면서 막내인 푸른 사신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황금 사신들의 그런 움직임들은 마치 춤사위처럼 황금 사신들의 경험을 매혹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황금 사신들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좀 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들의 창조주, 회색 사신에 대한 이야기.

    인간을 향한 악의로 가득한 검은 점액과 회색 사신의 나쁜 장난에 대한 이야기였다.

    막내인 푸른 사신도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였다.

    푸른 사신들도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마치 ‘엄마가 그럴 리가 없어!’라고 하는 어린아이의 고집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황금 사신들의 진실로 가득 찬 감정에 서서히 마음을 돌리기 시작해서, 결국 푸른 사신은 그 사실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미니 사신들 사이에서 영감의 불꽃이 타올랐다.

    미니 사신들은 재미있는 장난의 계획을 세우고 조율하기 시작했다.

    함께 의견을 나누는 미니 사신들의 모습에서 장난기 가득한 음모가 느껴졌다.

    ***

    아직 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세희 연구소 정문 앞.

    연구소의 정문 앞은 잔뜩 긴장한 트리니티 소속 직원들 때문인지 약간 긴장된 분위기였다.

    정문 앞에는 세희 연구소 사람들이 약간 불안감이 섞인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중무장한 보호복을 입은 트리니티 연구소 요원들이 긴장감이 섞인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분위기와 복장의 대비가 중앙 연구소로 이관될 때를 떠올리게 했다.

    트리니티 연구소 요원들의 보호복에서는 검은 점액의 진한 악취가 느껴지고 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트리니티 연구소가 검은 점액을 만들어 내는 원흉으로 보였다.

    검은 점액이라.

    왠지 황금 사신에게 ‘실수’를 할 순간이 올 것만 같은 느낌이 오는걸.

    히히.

    나는 살포시 미소를 베어 물고, 트리니티 연구소 차량 쪽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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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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