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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1

       “걱정 말고 이젠 학업에 전념할 준비를 하세요!”

         

       고학년을 돌려보낸 파스텔은 문을 닫았다.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흑발 소녀를 홱 돌아봤다.

         

       “엘리! 엘리! 들었어? 크래프트 상단의 신규 사업이야! 신기술에 전 재산을 걸었다가 패가망신한 공학부를 구하는 정의로운 사업!”

         

       아카데미라면 역시 학업의 열정에 불타야 하는 거지!

         

       공학부를 살리고 면학 분위기를 고취할 뿌듯한 작업이었다.

         

       “파산한 상단을 인수하게?”

       “응응! 그래야 지분 투자했다가 폭삭 망해버린 선배님들도 구하고 마석 연료 사업도 인계받지! 아니다!”

         

       파스텔은 양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았다. 하얀 치맛자락이 펼쳐졌다.

         

       “본래는 상단 측에서 마석 연료를 구매해 줬던 거니 우리가 그 상단이 돼버리면 연료 사업을 기존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되는구나! 그러면, 거래처를 만들면 될 거야! 건축 골렘을 쓰는 마계 상단들은 많을 테니까 우리가 연료를 공급해 주는 거지!”

         

       빙글빙글 빙글빙글.

         

       마계 발전에 몰두하는 상단들을 위해 정당한 가격에 연료를 공급해 주다니. 최소 생활 수준을 높여 빈민층을 구하는 선량한 행동인 거야.

         

       파스텔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뿌듯해졌다. 회전을 멈추고 앞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뽑았다.

         

       들어 올리자 광택이 반짝였다.

         

       만년필 친구!

         

       “잉크를 찍어 써야 한다는 깃펜의 번거로움을 해결한 기술 발전! 그 정점에 있을 철도를 부설해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겠어!”

         

       엘리가 조용히 응시했다.

         

       “정말 마족과 인간은 딱히 구분 안 하는구나.”

       “뭐가?”

         

       애초에 귀 뾰족한 정도밖에 외형 차이가 없잖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엘리가 선배님이 놓고 간 문서들을 취합했다. 제국은행이 매물로 내놓은 상단이 예상 가격 항목을 살피더니 건네줬다.

         

       “돈은 있어?”

         

       오잉.

         

       파스텔은 매물 가격을 바라봤다.

         

       0이 수두룩하다.

         

       분홍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돈이 없어!”

         

       으아아.

         

       생각해 보니 나 지금 돈이 없어!

         

       보유 자산에 신용까지 싹싹 긁어모아 선량한 무역품으로 바뀐 뒤 마계행 비공정에 실어 보냈다구!

         

       “엘리이! 나 돈이 없어어!”

         

       머리를 부여잡았다. 절망하며 머리를 흔들자 악마님이 작게 양갈래로 묶어준 분홍 머리카락이 파닥였다.

         

       절망.

         

       절마앙.

         

       이대로 순수공학부가 파산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가.

         

       분홍 머리카락이 엘리를 찰싹 쳤다.

         

       엘리는 볼을 문지르더니 상대가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받지 않게 된 문서를 책상에 놓았다.

         

       “너무 유동자산까지 사업에 쓰지 마. 그러다 흑자 도산해.”

       “조언 고마워어!”

         

       하지만 공학부의 앞날이 어두워진 현실에 절망한 파스텔을 살려내긴 역부족.

         

       누군가 돈 좀 빌려주세요……!

         

       노크 소리가 났다.

         

       으에.

         

       파스텔은 절망절망을 멈추고 문을 돌아봤다. 서둘러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엘리가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했다.

         

       “총장님, 무슨 일이라도?”

       “큰일은 아니고 사적 방문일세. 크래프트 각하께선 계시는, 오 있군! 후배! 내가 왔네!”

         

       호레이스 교수 아니 총장이 들어왔다. 총장 대행에 선출되며 마법사 로브를 바꿨는지 명품 느낌이 물씬 나는 고급진 로브를 걸친 모습이었다.

         

       “총장님!”

         

       파스텔은 표정이 밝아졌다.

         

       “허허! 총장이라니!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됐던가? 이거 섭섭하네만.”

       “아앗! 죄송해요, 선배님! 여기 앉으세요! 엘리! 늘 마시던 거로!”

         

       파스텔은 문서로 살짝 난잡한 자리를 정리했다. 호레이스 총장이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와 다르게 오늘날이 좋더군. 산책 겸 순회를 갔다 오는 길일세. 후배도 이런 실내에 갇혀 지내지 말고 햇볕을 맞으며 산책하는 게 어떻겠나.”

       “그러면 좋겠지만 학생을 위하는 제 열정만큼은 식지 않는걸요. 당장 방금도 순수공학과의 곤혹스러운 상황을 상담한 차예요.”

       “그거 말인가? 나도 들었네. 과를 지원해 주던 상단이 파산했다지?”

       “역시 선배님! 항상 학생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시는군요!”

         

       유능하셔!

         

       “암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친구가 많은 후배보다 더하겠나! 본인은 따라가지 못할 친화력일세!”

         

       요번에 친구친구들을 모아 새로 만든 감찰부에 대한 언급.

         

       “아앗! 그런가요?! 아하하!”

         

       서로 화목하게 웃음을 나눴다.

         

       그러다 호레이스 총장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헌데 마침 그 일로 찾아온 걸세.”

         

       오잉.

         

       “근래 대기 중 마기 농도가 높아지며 하늘 생물의 서식지가 변화되고 하늘길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 그 일로 무역에 종사하던 상단들이 큰 타격을 받았었네. 그런데 이번 제국은행까지 신용을 하락 조정하자 결국 못 버티고 부도난 상단이 많아.”

         

       허억.

         

       심각한 사안.

         

       사적 방문이라 하셨는데 진지한 일이었다.

         

       공적 일을 사적으로 생각하시는 훌륭한 총장님.

         

       “그러면 하늘섬 행정부에서 빠른 조치를 안 해주면 하늘섬 경제가 흔들리겠네요? 거래처 간의 연쇄 부도에 대규모 실업자가 발생하고 치안 악화까지 닥치며 악성 밀무역이 활성화되는.”

         

       그 하늘섬 행정부는 해산된 하늘섬 총독부의 자리를 이어받은 하늘섬 아카데미고.

         

       순수공학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어.

         

       “예산안을 살펴보니 그간 총장직이 공석인 상태로 지내며 권한이 없어 유보된 예산이 많더군. 그 자금을 돌려 주요 상단을 구해주면 될 거 같네.”

       “다행이네요!”

         

       휴우.

         

       “헌데 이대로 지원해 주기엔 너무 꺼림칙하네만. 상단주가 상단 경영을 잘못해 놓고도 그대로 자리를 보전하다니! 그러면 나중에 또 그럴 거 아닌가! 그땐 또 구제해 줘야 하나? 허어!”

         

       호레이스 총장이 뭔가 연기 톤으로 말했다.

         

       “학생회는 어찌 생각하는가?”

         

       파스텔은 의도를 모르겠어서 묘로롱~ 했다.

         

       “경영 실패자가 계속 자리 보전을 하는 건 좀 찝찝하긴 하죠? 리스크도 있고.”

       “그렇구만!”

         

       호레이스 총장이 방긋 웃었다.

         

       “그래서 하늘섬 예산으로 부도난 주요 상단을 구제하는 한편 경영자는 믿을만한 자로 바꿀 생각이네!”

         

       믿을만한 경영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

         

       허억.

         

       파스텔은 볼이 발그레해졌다.

         

       “이런 우연이! 순수공학과를 지원해 주던 상단을 제가 오직 선의만으로 살리려 했거든요! 그래서 철두철미한 계획을 이미 다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쪼끔 사소한 문제가 있었을 뿐 실행 직전이었는데!”

         

       돈이 없다는 정말 사소한 문제였다.

         

       “그런데 마침 행정부에서 이미 인수 계획을 세웠고 경영 적임자를 찾을 필요까지 생겼다니!”

         

       누가 보면 짜고 치는 줄 알겠어!

         

       억울해애!

         

       사실 사양하면 그만이지만 파스텔은 이미 억울해질 준비가 됐다.

         

       억울함 전문가 파스텔……!

         

       호레이스 총장이 한층 방긋 웃었다. 사적으로 얘기한 건데 공적으로도 좋은 선택이라 두 배로 좋다는 표정이었다.

         

       “허허! 이런 우연이! 이미 경영할 준비를 해놓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니! 그것도 한 상단을 훌륭히 이끌던 경력자가 아니던가!”

       “제가 말하긴 그렇지만…….”

         

       파스텔은 민망해하며 몸을 꼬았다.

         

       “파스텔은 훌륭한 선택이죠!”

         

       놀랍게도 진짜!

         

       “적극 공감하네! 이거 다른 후보는 고려할 필요도 없겠구만! 허허허!”

       “그렇네요! 아하하!”

         

       파스텔은 어떠한 이견도 없이 밀실 인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 사감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유능한 결정이었다.

         

       얼마 뒤 총장이 떠났다.

         

       화목한 분위기가 진정됐다.

         

       파스텔은 소파에 앉아 볼을 감쌌다. 발그레해진 볼로 몸을 비비 꼬았다.

         

       “이힝, 이힝.”

         

       나는 계획한 적도 없는데에.

         

       이럴 생각은 하나도 없었는데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버렸고오.

         

       남들이 어떻게 볼까.

         

       “으아아! 억울해애!”

         

       근데 진짜 억울하긴 하다.

         

       난 진짜 아무 생각 없었는데!

         

       파스텔은 생각하다 보니 진짜진짜 억울해졌다.

         

       “엘리이! 난 진짜진짜진짜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진짜가 무려 3번 들어간 진심이라구!”

         

       이 정도면 진짜 친구와 진짜진짜진짜 친구의 차이야!

         

       허억.

         

       진짜진짜진짜 친구래.

         

       완전 슈퍼 울트라 친구인 듯.

         

       “돈 없던 문제가 해결됐네.”

         

       엘리가 밀실 협의서를 탁탁 정리해 줬다.

         

       “주요 상단에 철도 사업까지 하면 아무리 크래프트 상단을 동원한다 해도 학생회 업무가 너무 많아지겠어.”

       “응? 그런가?”

         

       하긴 그렇기도 하다.

         

       슬슬 학생회 인원을 늘릴까.

         

       경제사범으로서 쪼끔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 수족 늘리기가 곤란했지만 이젠 당당한 권력자가 됐으니까!

         

       파스텔은 마음속 친구 랭킹에서 적당한 인원을 골라냈다.

         

       레너드는 첫인상 때문에 살짝 마이너스긴 해도 눈치는 좋아 적절한 인사였지만, 비밀 감찰부 부장으로 이미 임명했으니…….

         

       “그리하여 학생회에 가입하게 된 멜리사와 앨시어입니다! 모두 환영해! 환영! 환영!”

         

       파스텔은 기존 학생회 앞에서 멜리사와 앨시어를 소개했다.

         

       멜리사가 가슴에 손을 얹고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멜리사 캐머롯이에요. 파스텔이 부탁해서 학생회에 들어오게 됐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캐머롯에 벨라몬트네.”

         

       솔직히 혼자서 사무 업무를 다 하던 엘리가 흡족해했다.

         

       “훌륭한 인력이야.”

         

       응응!

         

       파스텔은 얼떨떨해하는 더스틴에게 다가갔다.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더스틴이 움찔움찔했다.

         

       “막내 탈출이야! 축하해! 앞으로 선배로서 적당한 잡무는 후배들에게 떠넘겨도 좋아!”

       “어? 떠넘겨?”

         

       멜리사가 고개 숙였다.

         

       “선배님, 부족한 몸이니 지도 편달 부탁드려요.”

         

       그냥 남작가의 차남일 뿐인 더스틴은 남부 군벌의 겸손에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이 됐다.

         

       시선이 바로 옆의 은발 소녀를 향했다. 앨시어가 물끄러미 마주 보더니 한마디 했다.

         

       “약해.”

         

       더스틴은 두 배로 부담스러워했다. 시선이 부담스러운 타칭 후배들을 피해 파스텔로 향했다. 구원을 바라는 눈길이었다.

         

       어차피 더스틴은 여전히 현장직이라 교통 정리할 생각 없는 파스텔은 해맑게 웃었다.

         

       “사이좋게 지내!”

         

       응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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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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