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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2

        사태를 정리한 마수들은 다시 원탁에 둘러앉았다.

         

        구천지대계는 조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베릴륨 차를 홀짝였다. 엘프들의 나라에서 은밀한 루트를 통해 공수해 온 최상품이다.

         

        “자, 그럼 슬슬 본제로 넘어가 볼까.”

         

        아카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비록 이번 회의를 주재한 것은 로즈마리였지만, 아카샤에게도 할 말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먼저 모임을 가지려고 했을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살리에르 영지에서 우리 언니를 만났어. 아무래도 기억을 되찾은 것 같아.”

        “호오.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니까?”

         

        아카샤는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좋아했다.

         

        “처음 만나자마자 이름부터 불러줬어! 아무리 못해도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야.”

         

        머릿속에선 이미 행복회로를 풀가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을 ‘관찰’하는 지긋지긋한 놀이는 이제 끝나고, 마왕군으로 화려하게 복귀. 자신과 함께 2군을 지휘하며 마왕님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한이 없겠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황홀경에 젖어 있는 이에게 일침을 날리는 부류가 어느 집단에나 존재한다.

         

        “여의 생각엔 아닌 것 같다만.”

        “…뭐.”

         

        상등품 베릴륨 홍차에 맛이 부족하다며 옐로케이크 가루를 타 마시던 요르문간드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네 언니가 여의 거처를 찾아왔었다. 자신이 가능한 선에서 부탁을 하나 들어줄 테니까, 여가 만들어내는 마석을 조금 나눠달라고 하더군.”

         

        요르문간드는 차에 각설탕 대신 폴로늄을 넣고는 손톱으로 휘휘 저었다.

         

        “…뭘 부탁했는데요?”

        “요호를 돌봐 달라는 정도의 단순한 과제였다. 그 과정에서 녀석은 편의를 위해 살리에르의 영지에 피해를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

         

        에테르는 요호족의 식량 확보와 안녕을 위해 그들의 약탈을 방관할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마왕군다운 행동이다.

         

        “녀석이 기억이 돌아와서 인간을 시험하거나 멸시하고 있었다면 그런 귀찮은 선택은 안 했겠지.”

         

        다른 구천지대계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와 함께 마왕을 섬겨왔던 요르문간드라면 알 수 있었다.

         

        “그 녀석은 항상 최단 시간에 최대 이익을 내는 행동만 골라서 한다. 우리와의 모든 추억을 잊었더라도 그 본능만은 변하지 않겠지.”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도, 엘프도, 수인이나 마수도 모두 이것만큼은 똑같다.

         

        요르문간드 자신만 하더라도 어떠한가. 정령이나 수인과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만사를 귀찮아해 산에 틀어박힌 몸이다. 로즈마리는 볼 때마다 인간 뒷담이나 까고 앉아있었고, 아카샤는 제 언니밖에 모르는 철부지다.

         

        “헛소리야.”

         

        그랬기에 아카샤는 요르문간드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쪽 말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어. 언니가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널 어떻게 찾아간 건데? 설마 네가 직접 찾아갔다는 괴상한 소리는 않겠지?”

         

        요르문간드의 거처는 피치블렌드 산의 최정상, 그중에서도 지형이 험준하기로 유명한 ‘낙룡봉’에 위치한다.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아무나 출입하려고 하지 않았고, 쉬이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이걸 두고 해명하려 하진 않는다. 요르문간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중성자로 그득한 차를 들이켰다.

         

        “거기까진 여도 잘 모르겠다.”

        “지금 장난해?” 

        “중요한 건 그리 자잘한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힘이다. 여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오래 살았다고 큰소리치기는….”

        “예전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그대는 쌍둥이 언니와는 조금 다르군. 적어도 연장자 대하는 법은 좀 배우거라.”

        “그러면 그쪽이 언닐 데려오든지.”

         

        그때까지 다른 구천지대계는 두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만 있었다. 5석은 흥미롭다는 듯 감탄사만 내뱉었고, 3석에게는 이러한 언쟁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나마 나설 만한 마수는 로즈마리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수인족 꼬맹이가 정보 흘린 거 아닌가?”

        “누구 말이더냐?”

        “그, 당신이 가끔가다 돌봐주는 키 요만한 꼬맹이 하나 있잖아요. 대체 뭘 먹고 자랐길래 나보다도 작은지 몰라.”

        “뭐 그럴 수도 있겠군.”

         

        여기서부턴 추측의 영역이었다. 확실하지 않은 만큼 마수들의 흥미는 급속도로 식어갔다. 이런 추론에 머리를 굴려가며 좋아하는 건 로즈마리 혼자뿐이었고, 나머지는 직접 움직여서 사태를 확인하는 편을 선호하던 까닭이다.

         

        “이번엔 내 차례지?” 

         

        로즈마리가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 이번에 이곳으로 동료를 불러 모은 그녀이니만큼 긴급히 할 말이 있었다.

         

        “놀라지 말고들 들으시라. 그 큰 언니가 아카데미에서 어느 엘프와 사귀고 있는 모양이야.”

        “……뭐?”

        “컵 내려놓고 차분히 들어. 그렇다는 소문이야.”

         

        아카샤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로즈마리의 보좌인 잭 블랜튼에게로 향했다.

         

        “오를레이앙, 그게 사실이냐?”

         

        오를레이앙은 블랜튼 공작의 진명(眞名)이다. 

         

        “그렇습니다.”

        “…자세히 얘기해 봐. ” 

         

        쌍둥이 여동생의 요청에 따라 로즈마리는 손수 보고 들은 것을 아카샤에게 이야기했다.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지루해하는 동료는 없었다. 아무래도 마수가 엘프와 연을 쌓는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카샤는 기어코 찻잔을 로즈마리의 머리 위로 던져버렸다.

         

        쨍그랑!

         

        “그 새끼 당장 잡아서 데려와.” 

        “진정해 언니. 나도 지금 못 믿어서 확인 중에 있거든. 여기 블랜튼이 계속 그럴 거 같다고 해서 지금 아리송한 상태야.”

        “그러면 처음부터 말을 하지 말라고!”

        “알아만 두라고. 말 안 하고 있다가 나중에 일이 커지면 나만 욕먹을 거 아냐?”

         

        마왕군이 제국에 비해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이유에는 이러한 회의 덕택이다. 각 군 수뇌부가 틈만 나면 모여 정보를 교류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유연한 대처 능력을 보여준다.

         

        지금의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 루머라도 보고한다. 특히 ‘스코프’가 있는 로즈마리의 정보는 그 출처가 소문에 기인한 것일지라도 꽤 정확도가 높았다.

         

        아카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안 되겠다. 정확히 판명날 때까지 네가 그 새끼 좀 마킹하고 있어.”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어? 로드스톤이 수도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잠자코 있겠다고.”

        “그거 들어왔어.”

        “뭐…?”

         

        아카샤는 살리에르 영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되짚었다. 저택 창문을 깨부수고 들어갔던 건 제외하고.

         

        “8석이 내준 태풍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성공적이었어. 잘나신 1석께서 굳이 움직여 주시지 않아도 도서관이 그 자체로 침수되는 바람에 잠시 틸레트로 봉인석을 옮기기로 결정했거든.”

        “허, 여기서 또 여를 걸고 넘어지….”

        “아카데미 내부에 불의 로드스톤이 들어오는 건 사실상 확정이야. 아무래도 살리에르령 박물관의 유지보수가 끝나기 전까지 반년간은 수도에 남아있겠지.”

         

        마왕님을 부활시키는 열쇠 중 하나가 자신의 관할 구역으로 들어온다는 갑작스러운 호외에 로즈마리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좋아…. 아주 좋아.”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 

         

         

        안젤리카는 버멜에게 맡기고, 나는 동아리 부실을 나와 이사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도중 많은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 4학년 선배의 머리통을 깨버린 걸 로테와 프레이에게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루머를 퍼뜨리고 있는 문예부 애들은 저렇게 그냥 놓아둬도 되는 건지, 수소폭탄의 다음 단계는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오늘 저녁은 뭐 먹어야 할지…. 기타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고민은 이사장과 관련한 건이다.

         

        “어서 들어오세요.”

         

        수도로 돌아오면 자길 보러 오라는 로베스피에르 이사장의 말이 있었다. 그는 내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겠지. 이 사람을 포함하여 수많은 귀족이 내 다음 학기 등록금을 대신 내 줬다는 사실을.

         

        “전에 얘기했던 플레어의 소형화는 잘 되고 있나요?”

         

        아뇨.

         

        “어느 정도는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시작하려고요.

         

        “좋아요. 완성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것만이 화계마도의 유일한 희망이니까요.”

         

        이사장은 저번에 헤를라인 선생님 등과 함께 가졌던 밀담에서 플레어 스크롤의 소형화를 주문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전선의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플레어라는 마도에 호의를 가지게 된 평범한 화계마도사로밖에 안 보인다.

         

        실상은 다르다.

         

        로베스피에르가 말하는 ‘소형화’의 기준은 전쟁에서 말하는 ‘소형화’와는 말뜻이 다르다. 여기에서 소형화는 ‘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스크롤을 만들어달라’라는 뜻이었다.

         

        쉽게 말해 암살용.

         

        이 사람, 나라를 갈아엎을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수강신청은 하셨나요?”

        “내일 학관에 가서 해야죠.”

         

        길게 있으면 또 누가 오해할지도 모른다. 어쩐지 버멜이랑 붙어다닌 이후로 남자와 단둘이서 방에 있는 것 자체가 언짢아졌다. 나는 필요한 말만 딱 하고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수강신청을 하러 학관 건물에 들렀다.

         

        이 세계에는 PC라는 것이 없다 보니 모두 한곳에 모여 수강신청을 해야 했다. 로르웰 선배의 말을 듣기로는, 방학 끝물마다 소위 ‘꿀강’을 들으려고 모이는 학생들 때문에 고역이라고.

         

        1학년은 그런 거 없다. 지구의 대학처럼 전공필수 위주로 주워듣고 나면 시간도 수강학점도 모자라진다. 전체 1등을 먹은 나는 남들보다 6학점을 더 들을 수 있었지만, 여기서까지 헤르미X느 메타를 타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 대학은 혼자 공부하는 공간. 교수보단 조교가, 조교보단 도서관에 있는 전공서가 더 믿음직스러운 법이다.

         

        1학년이 신청하는 기간이다 보니 학관은 그다지 북적거리지는 않았다. 

         

        수강신청을 하러 온 아이들 역시 1학년이 다수였다. 나는 종족이 종족이다 보니 한 번 본 얼굴은 웬만해선 외웠다. 데이지, 하샬례, 클로에, 리에라, 맥스웰, 에른스트…. 다들 깊은 대화는 안 했어도 한 번쯤 인사는 해 봤던 얼굴들이다.

         

        모르는 얼굴은…. 재수강인가?

         

        신경쓸 건 없겠지. 그냥 넘어가려 하던 찰나였다.

         

        “안녕하세요.”

         

        짙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한쪽에서 불쑥 튀어나오더니, 다짜고짜 인사를 건네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몸을 피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제가 수강신청은 처음인데요… 잠깐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남색 머리칼을 한 여자아이는 똘망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보며 수강신청 종이를 내밀었다.

         

        얜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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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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