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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2

       나는 학창 시절에 대단한 추억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남들 학교 다니듯 평범하게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했다. 성적은 특별히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었고, 그래도 그럭저럭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자친구는 못 사귀었지만.

        

       나는 오타쿠였고, 친구들도 오타쿠였다. 친구끼리 모여서 어디 멀리 놀러 가거나 한 적은 없어도 함께 관련 행사에 몰려간다거나, 모은 돈으로 만화책을 사러 간다거나, 시험 끝나고 피시방에 몰려가거나 한 적은 있었다.

        

       그래, 분명히 내가 여기서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겪은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기억들이었다. 정확하게 날짜가 기억날 정도로 선명한 기억도 아니었고, 사실 그때 몰려다녔던 친구 중 마지막까지 연락하고 지내던 애들은 한 손에 꼽았다. 일부는 아예 얼굴이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같은 10대들이 다니는 학교이기 때문일까, 여기 다니다 보면 이상하게 그 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한동안은 작별이네요.”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샤를로트였다.

        

       시험 기간에 학교가 일찍 끝나는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찍 끝난 김에 우리는 곧장 모여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학교 바깥의 거리를 별로 할 것도 없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카페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고 파르페를 먹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웃고 떠들었다.

        

       분명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해는 금세 저 너머로 떨어져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루테티아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야죠. 저는 벨부르의 왕녀인걸요.”

        

       조금 아쉽다는 듯 말하는 앨리스에게 샤를로트가 옅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금방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방학은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으니까요.”

        

       한 달 조금 넘는 방학이었으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2학기가 시작하면 다시 만난다.

        

       하지만, 그 말을 다시 생각하자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쉽게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차라리 샤를로트가 벨부르의 왕녀가 아니라 벨부르 귀족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라면, 일 년에 며칠 정도는 론다리움으로 휴가를 올 수 있을지 모른다. 앨리스를 다시 만나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며칠 정도 묵다가 작별하고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반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앨리스도 샤를로트도 모두 각자의 황실과 왕실에서 무척 중요한 존재였다. 아직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앨리스는 차기 황제로 유력한 인물이었고, 샤를로트도 별다른 형제나 자매가 있지는 않았으니까.

        

       “…….”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앨리스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만약 이야기가 원작대로 흘러간다면, 이 둘은 적이 될 것이다. 물론 앨리스가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황제와 대적하면서 다시 화해하게 되긴 하지만,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았다.

        

       샤를로트는 그런 앨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럼, 방학 끝나고 뵙도록 하죠. 혹시 당신이 루테티아에 다시 방문하게 되면…… 그때는 벨부르의 음식이 제국의 음식보다 훨씬 더 맛있고 다양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드릴게요.”

        

       일부러 도발하듯 말하는 샤를로트를 보고 나서야 앨리스는 웃었다.

        

       그리고 샤를로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제국의 음식도 많이 발전하는 중이거든. 한 10년쯤 뒤에 다시 와 봐. 그때는 벨부르 사람이라도 쉽게 깎아내릴 수 없는 식사를 대접해줄 테니까.”

        

       샤를로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레나도 자치국으로 돌아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짐은 이미 싸 두었습니다.”

        

       내 질문에 레나가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레나는 이런 날씨에도 반 팔 차림이 아니었다. 뭐랄까, 그런 가벼운 복장을 하면 군인정신이 달아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레나가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여름에도 서늘한 지방에서 살았기에, 레나에게 있어 이 날씨는 견디기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도 목덜미가 조금 젖어있었다.

        

       “실력을 확실하게 키워서, 2학기 때는 황녀님의 발목을 잡지 않는 실력을 만들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6월에 레나를 빼두고 우리가 다른 던전을 갔던 것을 레나는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놓고 서운하다는 표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당연하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레나도 결코 성적이 낮은 애는 아닐 텐데 말이다.

        

       “그…….”

        

       이야기하던 레나가 조심스러운 소리를 내서, 나는 내심 조금 놀랐다. 레나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그러니까 남들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보이는 건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조금 우물쭈물하던 레나는, 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편지를, 해도 되겠습니까?”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솔직히, 레나가 나를 존경할만한 일을 한 적은 별로 없었다. 시기로 따지자면 레나 앞에서 훈련장을 뛰어다닌 것 정도밖에는 없었는데, 레나는 그 딱 한 번에 무척 강한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전장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나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 순간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거겠지. 내가 어떻게 싸우는지 직접 눈으로 본 셈이니까.

        

       “물론입니다.”

        

       내가 대답하자, 레나의 입꼬리가 조금 씰룩였다.

        

       *

        

       두 사람을 굳이 기차역까지 배웅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아카데미 방학 때문에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붐빌 테고, 거기에 황녀가 두 사람씩이나 나타나면 거의 마비가 될 테니까.

        

       샤를로트는 귀빈석에 타고, 레나는 비교적 타는 사람이 적은 북부행 기차를 타고 가지만 결국 타는 역은 같다. 큰일이 벌어질 일이 별로 없는 아카데미 근처라면 모를까, 신원을 특정할 수 없는 일반인들이 가득한 곳에 황녀가 가려면 호위를 주렁주렁 달고 가야 한다.

        

       비행선은 아직 민간용으로 사용되지 않고, 여객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상용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쉽지만 우리는 아카데미 안에서 미리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저도 가볼게요.”

        

       미아 크로우필드는 여전히 다소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어. 덕분에 도움도 많이 받았고.”

        

       “아, 아니에요…….”

        

       앨리스의 말에 미아 크로우필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

        

       내 쪽을 바라보며 다소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손에 지팡이가 들려있지는 않았다.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학생들이 무기를 손에 쥐고 아카데미 부지 안을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지팡이 끝에서 빛나고 있을 푸른 보석은 내가 준 것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지금 시점까지도 얻지 못할 보석이네.

        

       그렇게 생각하면,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나는 미아 크로우필드에게 똑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는 잠깐 황송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얼른 뒤로 돌아서서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버렸다.

        

       “아, 나랑은 굳이 인사 나누지 않아도 돼.”

        

       조금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가벼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제이크가 있었다.

        

       옆에는 충직한 메이드도 함께.

        

       “우리는 하루 정도 더 머물고 나갈 예정이거든.”

        

       황녀가 둘씩이나 있는데도 너무 가볍게 움직이는 자기 집안 도련님을 로티가 흘겨보았지만, 제이크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사는 해야지.”

        

       앨리스가 말했다.

        

       “우리도 오늘 나갈 생각이니까.”

        

       “아, 그래?”

        

       어차피 같은 제도 안이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지 않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제이크에게 앨리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어차피 같은 제도 안이니까 할 일은 빨리빨리 끝내버리는 게 편하지. 그리고 우리가 먼저 빠져도 짐은 한동안 그대로 둬도 상관없잖아?”

        

       어차피 빼는 것도 우리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가?”

        

       제이크는 아마도 로티와 하루라도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남는 거겠지만.

        

       “그럼, 미리 인사 나눠야겠네. 그동안 수고했다. 2학기 때 또 보자고.”

        

       “2학기 때는 조금은 더 무게감 있는 남자가 되어서 오도록 해.”

        

       앨리스의 말에 제이크는 그저 유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

        

       “그, 그럼…….”

        

       레오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레이스 가의 차기 가주로서, 두 황녀님을 저희 영지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

        

       그리고 그런 레오를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앨리스가 말했다.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어. 아무리 귀족 간이라고 해도 서로 친분이 있으면 그냥 대충 말로만 하기도 하니까.”

        

       “그, 그렇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존댓말은…… 아니다.”

        

       앨리스가 한숨을 푹 쉬고, 클레어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 그래도 그렇게 격식 차린 초대를 받긴 했으니.”

        

       앨리스는 조금 장난스러운 표정이 되어, 레오 쪽으로 서서 양손으로 스커트 끝을 살짝 짚으며 말했다.

        

       “그 초대에 기쁘게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리 한쪽을 살짝 뒤로 빼고, 고개는 숙이지 않은 채 무릎만 살짝 굽혀 멋지게 예를 표했다.

        

       레오의 얼굴이 더 붉어진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에어프라이 님, 후원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 덕분에 이렇게 백만 조회수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이 숫자가 낯설게 느껴지네요. 이렇게 많은 분들께서 저의 소설을 읽어주신다는 것이 아직도 신기하게만 느껴집니다. 어린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작가라는 꿈을 이루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런 여러분의 기대에 걸맞는 소설을 쓸 수 있도록 언제나 노력하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들어 독자 여러분 덕분에 글 쓰는 것도, 그리고 살아가는 것도 너무나 즐겁습니다. 부디 제가 느끼는 즐거움이 여러분께도 제대로 전달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후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독자 여러분께서 추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소설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트렌치홀 님, 후원 감사합니다!

    신작에 대해서는 생각해둔 플롯은 있기는 하지만, 연재시기는 그렇게 가깝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지금 쓰고 있는 이 소설에 집중하여 완결을 낸 뒤, 1주일에서 2주일 정도는 쉬고 글을 쓰려고 생각중입니다. 매일같이 2화씩 쓰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은 아니지만, 쉬지 않고 그렇게 쓰니 조금은 쉬고 싶은 생각도 들어서요. 그렇다고 이 소설이 한달 내로 완결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서, 그 이야기도 마저 끝내려면 시간이 더 걸리지 않을까 생각중입니다. 차기작은 일전에도 말씀드렸듯 중세(?)판타지 세계관의 백합입니다. 아마 하렘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 소설을 쓰는 날이 온다면 그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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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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