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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2

     

    나는 월광궁 앞에 나가서 기사들이 열을 지어 모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카밀라 토벌을 위한 기사단 편성은 30분도 안 되어 완료됐다.

     

    본래 이만한 상황이면 헤이케도 기사들을 이끌고 왔겠지만, 지금 그녀는 국경 분쟁지대로 출장 중이라 황궁에 없었다.

     

    일단은 황비이다보니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는 황제의 의견도 있고 해서, 카밀라 토벌은 천황궁의 황제 친위대와 월광궁의 기사단으로 진행하게 됐다.

     

    “선생님, 함께 현장으로 향하십니까?”

     

    타냐가 내게 물었다.

     

    “가야지. 아셀라도 갈 모양이야.”

     

    “카밀라는 전 월광궁 소속이었으니까요. 직접 해결하실 생각일까요.”

     

    “아셀라는 싸울 생각이 가득하지 않겠어. 편성도 벌써 끝났네.”

     

    “그렇습니다. 적이 흑마술사인 만큼 최정예만 투입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호위하겠습니다.”

     

    “부탁해. 그래도 저쪽에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같이 싸워도 좋아.”

     

    내가 황제 친위대를 향해 눈짓했다.

     

    “천황궁의 친위대로군요. 카밀라는 저들을 주축으로 토벌한다 합니다.”

     

    “하나같이 실력자들이야. 소드마스터도 한 명 있어.”

     

    “친위대 단장, 대륙의 삼검 중 광검이라 불리는 지그문트 경 말씀이시군요.”

     

    친위대에서는 서른 명의 기사가 집결했다.

     

    그들을 지휘하는 풍채 좋은 중년 남자가 지그문트다.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기에 오리할콘 갑옷을 걸친 모습이었다.

     

    “관심 있지 않아? 이번 기회에 눈도장 한 번 찍어봐.”

     

    “음. 경지에 도달한 검사들만이 쓸 수 있다는 소드 오러에 대해서는 경험담을 듣고 싶긴 합니다.”

     

    “단장도 좀 연습하면 쓸 수 있지 않겠어?”

     

    “아직 그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아직이라고 했네? 자신 있나 봐.”

     

    내가 슬그머니 놀리니 타냐가 덤덤하게 받아쳤다.

     

    “언젠가는 도달해야죠.”

     

    “오우, 난 소드마스터 호위를 둔 의사가 되겠네? 엄청난 호사인걸.”

     

    대놓고 치켜올려주니 타냐가 살짝 빈정이 상했는지 콧방귀를 뀌었다.

     

    “농담이야. 단장의 가능성은 내가 제일 믿고 있어. 조금만 지나면 저 지그문트 경보다 훨씬 강해질걸.”

     

    “과한 기대로군요. 저는 제도 기사들과 다르게 체계적인 훈련도 못 받았습니다.”

     

    “하하, 나만 믿어. 내가 단장 건강검진도 매년 해주잖아. 체질이 달라 체질이.”

     

    “…놀리시는 게 아니라 정말 제가 소드마스터가 되리라 믿으시는 겁니까?”

     

    타냐가 고개를 갸웃해서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줬다.

     

    “내가 일 관련해서 농담하는 거 봤어? 진짜라니까.”

     

    “음… 선생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내 신뢰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타냐가 팔짱을 끼고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친위대 서른둘, 월광궁 스무 명이 참가합니다. 토진궁은 아직 이쪽의 움직임을 모를 테니 급습하는 작전입니다. 투항한다면 그걸로 좋겠지요.”

     

    “카밀라가 술수를 쓸 수도 있으니 주의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황녀님은 안 뵈어도 괜찮겠습니까?”

     

    “아셀라는 왜?”

     

    내가 반문하자 타냐가 진심 어린 충고를 해왔다.

     

    “아까 선생님과 싸우시기도 했고, 카밀라가 일단은 황녀님의 친모잖습니까. 생각이 복잡하시겠지요.”

     

    “그렇긴 해. 아셀라가 카밀라를 직접 토벌하는 건 나도 바라지 않아.”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

    No. 056 악녀의 증오 7% → 15%

    No. 088 악마숭배 11% → 33%

    No. 101 : 마력폭주 9% → 14%

    ……

    ―――――――――――

     

     

    전반적으로 아셀라의 악행으로 인해 발생하는 배드엔딩 확률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본래 역사에서 아셀라는 카밀라를 죽였어.’

     

    마력회로가 폭주해서 자의가 아니게 발생한 사건이었다 해도 충격은 컸겠지.

     

    지금 돌아보면 아셀라는 그때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아셀라는 패륜을 저지른 죄책감을 덮기 위해 더욱 악행을 저지른 게 아닐까.

     

    자신이 악인이라고 증명해야만 과거에 존속살해를 저지른 걸 합리화할 수 있으니까.

     

    ‘아셀라에게 양심이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었는데.’

     

    내가 알던 황제와 다른 행보도 종종 보여서 그런가, 요즘 들어 그녀를 대하는 내 태도도 조금은 물러졌다.

     

    ‘어쨌든 카밀라는 토벌해야 해.’

     

    88번 악마숭배 엔딩. 이건 제국에 숨어있던 흑마술사들이 마왕군에 홀려 대륙을 대상으로 초대형 흑마술을 시전해버린 사건이다.

     

    제도의 시민도 3할은 희생됐고, 나는 소환된 1품계 악마를 막다가 죽었었다.

     

    ‘카밀라가 흑마술사를 키우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제는 그녀의 제자라고 하는 궁정마법사들도 조금 의심스럽다.

     

    ‘아셀라가 아니라 황제 친위대가 토벌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이야.’

     

    나는 타냐의 조언대로 아셀라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아셀라는 마법예장으로 갈아입고 싸울 태세를 마친 상태였다.

     

    기사단장에게 명령을 내리는 그녀에게 내가 말을 걸었다.

     

    “황녀님, 직접 싸우실 생각이신지요.”

     

    아셀라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뒤로 묶은 긴 꽁지머리가 하늘을 날았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안 알려줘.”

     

    “엥, 외부 활동이라 저도 동행해야 해요.”

     

    “황궁 안인데 왜 외부 활동이야?”

     

    “전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군사 활동이니까요. 매뉴얼에 적혀 있어요.”

     

    내가 논리적으로 대답하니 아셀라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다가 한 마디 했다.

     

    “얄미워.”

     

    “그래 보이실 수 있죠.”

     

    “공자도 내 말 안 듣잖아. 나도 마음대로 할 거야.”

     

    “황녀님의 판단은 따르겠습니다만, 상대가 카밀라 전 황비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아셀라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에게 있어 카밀라는 평생 자신을 괴롭혀온 증오스러운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가족이다. 황제는 나이 차도 많은 데다 만나기도 힘들고, 형제들은 모두 적인 이 황궁이다.

     

    아셀라에겐 사실상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유일한 피붙이다. 카밀라의 목숨까지 빼앗아야 하는 현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겠지.

     

    “황녀님, 무리하지 마세요. 월광궁에서 기다리고 계셔도 괜찮습니다.”

     

    “…후우.”

     

    아셀라가 심호흡을 하고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녀의 표정은 단호해져 있었다.

     

    “각오는 됐어. 황실의 적을 물리치는 데 여유는 부리지 않을 생각이야.”

     

    목소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로 돌아왔지만 입술은 살짝 떨려온다.

     

    나는 지팡이를 쥔 그녀의 양손을 잡았다.

     

    “뭐, 뭐 해…!”

     

    손가락의 힘이 풀리도록 손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니 아셀라가 목 뒤를 잡힌 고양이처럼 조금 얌전해졌다.

     

    “기사들에게 맡기시고 뒤에서 지켜보세요. 그게 본디 군주의 역할 아니겠어요.”

     

    “…그래도.”

     

    “아셨죠?”

     

    아셀라가 고개를 숙이고는 반쯤 애환과 원망이 섞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치사해. 공자는 내 말도 하나도 안 들으면서, 나한테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고.”

     

    “들을 땐 잘 듣잖아요. 황녀님도 제 말을 잘 들어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죠.”

     

    “…공자도 오래 살 거야?”

     

    “당연하죠. 의사잖아요. 제 몸 하나는 제가 관리해야 하지 않겠어요.”

     

    진심이었다. 이번에는 배드엔딩에 죽을 일 없이 오래 살고 싶으니까.

     

    의사로서도 이제 궤도에 오른 느낌이고, 풍족하게 지내기 위해 가문에서 사업도 시작했다.

     

    죽는 날까지 최대한 즐겨서, 지금까지 반복했던 괴로운 시간들에 보상받고 싶다.

     

    “…알았어, 대신.”

     

    아셀라는 웬일로 순순히 납득해주며 조건을 하나 덧붙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시간 좀 내.”

     

    “물론, 명령이시라면요.”

     

    어라, 분위기를 타서 너무 쉽게 대답했나.

     

    아셀라가 요구하는 대가는 가볍게 볼 게 아니었는데.

     

    “그런데 뭐 하시려고요?”

     

    “외출 다녀오고 싶어. 전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후작가에서 둘이 몰래 카페에 다녀왔던 이야기구나.

     

    “그리고 지난번 대답도 듣고 싶어.”

     

    “지난번이라면.”

     

    “…공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 못 들었으니까.”

     

    지금도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는데.

     

    인류사 최악의 악녀, 철권통치의 폭군, 잔혹한 황금의 마녀.

     

    아무리 그녀를 자주 봐도 뇌리에 각인된 그녀에 대한 공포는 쉽게 지워지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트라우마 그 자체니까.

     

    마왕이나 사천왕이나, 야만족 족장이라든지. 날 한 번이라도 죽였던 존재들은 당연하지만 전부 껄끄럽다.

     

    ‘뭐, 그래도.’

     

    그때와 조금은 다른 느낌이긴 하지. 주치의로서 책임감이 있기도 하고.

     

    명확하게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황녀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아셀라는 몸을 틀어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단장이 그녀에게 보고했다.

     

    “출전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명령을 부탁드립니다.”

     

    아셀라가 기사들을 훑어보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자신있게 외쳤다.

     

    “본 군사행동은 흑마술사와의 전쟁이다.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다. 황실을 지키고 제국의 안녕에 충성하라.”

     

    그녀의 선언에 기사들이 눈매를 굳혔다.

     

    “월광궁 기사단, 출전하라.”

     

    우리는 토진궁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

     

     

     

    “전원, 정지하라.”

     

    선두를 앞서던 친위대장, 소드마스터 지그문트가 팔을 치켜들었다.

     

    월광궁에서 토진궁은 대략 30분 거리다. 우리는 토진궁으로 들어서는 정문 앞에 섰다.

     

    최정예 기사 오십이 진을 친다. 아셀라는 황제와 함께 후방에서 사령탑 역할을 한다.

     

    나는 아셀라의 옆에 앰브로시아 및 황제의 호위병과 함께 조용히 서 있었다.

     

    “토진궁의 대답은 없는가?”

     

    지그문트의 물음에 부하가 고개를 저었다.

     

    토진궁 담 안쪽엔 돌아다니는 시종이나 정원사 한 명도 없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진입 직전, 황명으로 투항하라는 전서구가 날아갔다.

     

    대답이 없다는 건 불복하겠다는 뜻이다.

     

    “진입하겠다.”

     

    친위대가 신속하게 움직인다. 제국 최고의 베테랑다운 완벽한 포진이었다.

     

    그들이 토진궁 본궁에 도착해 중앙 현관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바닥에서 검은 마나가 꿈틀대더니 이내 지면을 타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흑마술이다, 피해라!”

    “크윽!”

     

    기사들이 빠르게 반응했지만 몇 명이 몸에 적중당했다.

     

    그들의 신체가 순식간에 썩어들어간다.

     

    “윽, 당했다!”

    “치유사!”

     

    황제의 부주치의 하나를 포함한 천황궁 치유사들이 바로 부상자들을 끌고 나와 주문을 시전했다.

     

    끝을 모르고 솟아오른 검은 기운은 곧 토진궁 전체를 돔 형태로 단단하게 뒤덮었다.

     

    “저것이 흑마술인가.”

     

    그 광경을 지켜본 황제가 눈을 부라렸다.

     

    “전쟁을 할 생각인가, 카밀라.”

     

    앰브로시아가 황제에게 간언했다.

     

    “위험한 주문으로 보입니다. 폐하, 혹여나 접촉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앰브로시아, 저것이 무슨 주문인지 알고 있는가?”

     

    “으음, 종류까지는…”

     

    치유에서는 경지에 오른 앰브로시아라도 흑마술사와 싸울 일은 없었으니 모를 게 당연했다.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트베르크, 자네는 알고 있는가?”

     

    “결계라 하는 종류입니다.”

     

    “결계?”

     

    “예. 내부에 진입하는 생명체를 녹여서 생명력을 마나로 치환합니다. 즉발형이고 강력한 걸 보니 5위계는 되겠습니다.”

     

    앰브로시아가 혀를 찼다.

     

    “위험하군. 그래서 접촉한 기사들의 피부가 썩은 것인가.”

     

    “카밀라는 저 안에 있겠는가?”

     

    황제가 내게 물어서 정중히 대답했다.

     

    “결계는 술자가 안에 있어야만 작동합니다. 틀림없다 생각합니다.”

     

    “생명을 녹인다 하였지. 카밀라 외의 다른 궁원들은 어찌 되었겠는가.”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함부로 생명을 빼앗는 잔혹한 태도에, 황제가 차갑게 분노를 비추었다.

     

    “돌파할 방법을 제안하라. 해주사들이 해제할 순 없겠는가.”

     

    “결계는 저주 계열이 아니라서 해주사들의 영역은 아닙니다. 다만, 신성주문 중에 쓸만한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정화주문입니다. 결계는 정화로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자매님, 혹시 사용할 줄 아십니까?”

     

    앰브로시아가 나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3위계 정도라면 쓸 수 있소.”

     

    “좋습니다. 그럼 보조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도 정화를 쓸 줄 아시오? 이단심문관들이나 쓰는 희귀한 주문으로 알았소만.”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대답했다.

     

    “조금 조예가 있습니다. 4위계 정도는 가능합니다.”

     

    “4위계! 그리 높은 경지의 신성주문을 쓰신단 말이오?”

     

    앰브로시아가 작은 비버처럼 깜짝 놀라서는 상기된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소녀가 고트베르크와 함께하면 결계를 돌파할 수 있겠사옵니다.”

     

    황제가 나를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탁하겠다, 고트베르크.”

     

    옛날 생각 나네.

     

    나는 씨익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등장인물 정리코너를 아주 살짝 업데이트 했습니다.
    앞으로 등장할 인물의 예고가 약간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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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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