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12

       안타깝지만 당신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새벽 3시에 방문 앞에 놓인 샌드위치를 발견한 마리엘처럼.

       

        현실을 직시해 마리엘만이라도 살려 보내도록 만들려는 작전은 거의 성공한 듯 보였다.

        충격요법이 제대로 먹혀든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가주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제 그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스테이지를 통과해 41층으로 올라갈 수 있겠지.

        마지막에 와서 살짝 ‘분탕의 왕’답지 않은 행동을 해버렸지만 이 정도는 정상참작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1초가 1초같은 심정으로 판결을 기다린지 대략 5초쯤 지났을 때.

        홀크로프트의 가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헌데 경은 누구인가?”

        “네?”

        “내 눈이 이리 되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만 경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구려. 백작가의 식솔이 아닌 것 아닌지?”

       

        앗, 회의에 참석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거였나?

        생각해보면 외부인이 가문의 대소사에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었다.

        가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이 다시 아우성을 쳤다.

        깨진 검을 붕붕 휘두르고 식탁을 발로 차는 것이 기사보다는 술 취한 모험가에 가까운 행패였다.

       

        — 근본도 없는 놈이 감히 홀크로프트를 능멸하려 드는구나!

        — 황실에 목만 가져다 바칩시다!!

        — 더글러스! 더글러스 경을 데려와라!

        — 어디냐! 내 옆옆자리에 앉아있는 놈이로구나!

        — 아악! 나, 나는 가레스일세!

       

        나는 날아오는 검을 피해 재빨리 식탁 아래로 몸을 숨겼다. 

        앞이 안 보이는 기사들이 자기들끼리 주먹다짐을 시작하며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이제 어떡하지?

        그냥 설득은 포기하고 마리엘을 데리고 도망칠까?

       

        크림과 깨진 접시 조각이 나부끼는 전장 아래에서 생각을 정리하던 내게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마리엘의 것이었다.

        새하얀 드레스 자락에 감싸인 손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로브 안으로 파고들었다.

       

        슉!

       

        그 순간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프리나의 인형이 가위를 들고 매섭게 찔러왔으나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회피하며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불쌍하게 흙바닥을 뒹구는 인형을 주워 먼지를 터는 동안, 마리엘은 주머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가져갔다.

        시스테인 파크에서 내가 싸인해준 위치노트의 한 페이지였다.

       

        그것을 책상에 쿵 하고 내려놓으며 마리엘이 가주에게 말했다.

       

        “이자는 외부인이 아니어요……!”

        — 영애님?

        “제, 제 반려 비슷한, 크흠, 사이로 가문의 구성원이나 다름없는 남자인 것이에요.”

        “그게 정말이냐 아이야?”

        “네, 아버님. 여기 서로의 이름이 적힌 신고서가 있으니 확인해 보세요.”

        “흐으음…….”

       

        가주는 종이를 가져가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아 더듬거리는 그의 손가락이 백지에 피를 묻혀갈 때마다 하늘이 갈라지며 공간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몸을 일으켜 의자에 도로 앉자 마리엘이 내 손을 붙잡았다.

        묶어놓았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풀려 새벽처럼 빛나는 눈이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 혼인신고서를 읽던 가주가 이내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야. 이자가 정녕 가문이 사라져도 너를 지킬 수 있는 기사더냐?”

        “예?”

        “지금 이 땅의 주인인 내게 있어 그자의 영혼이 낯설지 않구나. 과거 이곳에 내려온 적이 있다는 뜻이렸다.”

       

        명계의 밑바닥에 당도했다는 의미는 이미 한 차례 소중한 이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뜻.

        진짜 명계가 아닌 천변의 방 안에서도 명부(名簿)에 적힌 이름은 유지되는 모양이었다.

       

        가주의 말에 마리엘의 손이 살짝 떨려왔다.

        그러나 이내 더욱 강한 힘으로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을 수 있어요.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렇구나. 허면 되었다.”

       

        가주가 몸을 일으키자 기사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식사의 끝을 알리는 종이 갈라진 하늘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댕, 대앵, 댕——.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의 끝이 다가오는구나.”

        “아버지…….”

        “슬퍼하지 말거라. ‘시계탑의 주인’이 과거에 얽매여 걸음을 멈춰선 안 되느니라.”

       

        시계탑의 주인.

        마리엘이 갖고 있는 신비에 걸맞은 이명이라 할 수 있었다.

        탑이 점지해준 이름은 절대 물러서지 않는 홀크로프트의 가훈과 맞물려 그녀를 더욱 높은 곳까지 인도하겠지.

        보아하니 마지막 보스답게 이명을 말해주는 듯한데, 나는 혼인 신고서를 돌려받는 마리엘 옆에 슬쩍 껴서 물었다.

       

        “제게 해주실 말은 따로 없으십니까?”

        “경은 아직도 거기 있나? 그만 가게.”

        “이래 봬도 마리엘과 한 몸처럼 각별한 사이입니다. 새벽마다 손수 샌드위치를 만들어줄 정도로요.”

        “우웩.”

       

        옆에서 헛구역질을 해대는 마리엘을 무시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분탕의 왕’이나 ‘가면 무도회의 주인’.

        정 안 되면 조금 급이 떨어지더라도 ‘2군 벤치 고닉’ 정도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가주는 고개를 저으며 마치 산책을 하듯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내가 다르게 부르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무슨 뜻이죠?”

        “경은 오래 전에 이미 또 다른 존재의 본질이 새겨진 이름을 받았네.”

       

        또 다른 존재의 본질.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탑이 내게 어떤 이명을 주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는 주는 것이 아니라 ‘확정하는 것’이었다.

        내게 준 이들은 따로 있었으니까.

       

        클락 데스몬드(Clark Desmond).

        본래 이 세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내게는 없었어야 하는 이 이름은 동료들이 하나씩 지어준 것이었다.

       

        “‘클락’.”

        “예.”

        “이곳이 아니라 바깥에서 명계의 마지막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 찾고자 하는 이는 있었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허면 이상하군. 만약 살아있었다면 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고, 죽었다면 문을 연 시점에서 자네는 명계의 왕에게 영혼을 빼앗겼을 것인데.”

       

        섬광은 나를 ‘클락’이라고 불렀다.

        탁상시계와 발음이 비슷하다며 놀리는 건 덤이었다.

        모험가 생활을 하는 내내 이름의 의미를 되새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가 떠나고 난 뒤로는 매일 생각해왔다.

       

        “아직 살아있는 거겠죠.”

       

        그리고 나를 그렇게 불렀던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죽음도 시간을 붙잡아 둘 수는 없을 테니까.”

       

       

       

        *

       

        실프 공략대의 제 32차 천변의 방 공략 완료!

        중층에 새로운 마법사들이 합류한 것에 세간은 떠들썩했다.

       

        특히 이번 공략대의 성공은 불가능해 보였던 맴버로 단 첫 번째 시도만에, 그것도 본대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해냈다는 점에서 많은 마법사들이 관심을 가졌다.

        몇몇 공략대에서는 구성원들을 자신들의 팀으로 영입하기 위해 발빠르게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러나 이번 공략을 기획하고 성공시킨 장본인, 마가렛에게는 골치아픈 일이 남아 있었다.

        모든 공략 내용은 추후 공략대의 전략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꼼꼼한 기록과 보고가 필수였는데 그 과정이 여간 어렵기 때문이었다.

       

        천변의 방에 입장하자마자 연락이 뚝 끊어진 것도 그렇고, 첫 번째 스테이지부터 등장한 절대 상대 불가능한 보스의 존재나 새로운 마족 이야기를 어디까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었다.

        심지어 그들을 막기 위해 찾아온 지원군들은 ‘비늘이 미끈매끈한 파충류인간’들이었다는데, 기술하면서도 공략대원들이 단체로 약이라도 한 사발 들이킨 게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공략 성공으로부터 닷새.

        오직 증언만으로 세부 내용을 채워야 했기에 면담이 필수였으나 가장 중요한 한 사람과는 아직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41층의 의료소에 누워있는 클락.

        듣자하니 명계의 문을 열었다는데, 그 반동 때문인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공략대원의 부상이나 사망은 공략대의 책임이었기에, 마가렛은 부랴부랴 소명자료를 준비했다.

        그것을 건넨 대상은 그의 침대 옆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인이었다.

       

        “정보 2과의 시엔 과장님 맞으신가요?”

        “네.”

        “여기 나머지 인원들의 증언을 취합해 제작한 공략 보고서입니다. 기밀로 분류된 내용까지 전부 표기된 원본입니다.”

        “줘보세요.”

       

        시엔이 무심한 표정으로 종이를 넘길 때마다 목이 바짝 말라왔다.

        마탑 최고의 정보기관, 그것도 백가나 순혈 가문의 조사를 주로 한다는 정보 2과가 배정되었다는 건 일반 마법사들에겐 두려운 일이었다.

       

        다행인 것은 클락의 상태가 그리 위중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중요한 인물이니만큼 공략대 측에서도 굉장히 신경을 써서 건강을 체크 중이었다.

       

        “이명을 얻으면서 마력의 그릇이 넓어진 부작용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전체적으로 호전되었고, 빠른 시일 내에 눈을 뜰 겁니다.”

        “알겠어요.”

        “이건 기억의 회복을 돕는 포션인데 본래 상층 공략에 사용하려고 준비해둔 물건입니다. 혹시 천변의 방 후유증에 시달리더라도 이것만 마신다면…….”

        “네, 걱정 말고 거기 두고 가세요.”

       

        고의가 없다는 걸 알겠으니 됐다는 건가, 아니면 원리원칙대로 처리할 테니 걱정해도 소용 없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는 시엔을 보고 마가렛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라’는 말을 들었는데 가지 않을 순 없다.

        정보부의 에이스란 그 정도의 위상을 가진 실력자였다.

       

        그녀가 사라진 뒤 시엔은 의자에 앉아 마저 보고서를 읽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자료가 없음에도 최대한 면밀하게 작성했음이 느껴졌다.

        목격자가 한 명밖에 없는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혼인 서약서’나 ‘가문에서 인정받은 결혼’같은 말이 나오는 건 거슬렸지만 나중에 M양을 따로 추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보고서에 기록된 소지품과 구멍난 로브를 정리하던 찰나, 침대에 누워있던 클락이 눈을 떴다.

       

        “으음, 여기는……?”

        “클락, 너 괜찮아!?”

       

        곧 깨어날 거라고 하더니 이렇게 빠를 줄이야.

        시엔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주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일단 조금 전 나간 마가렛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 먼저였다.

       

        침대 옆에 놓인 수정구로 향하던 그녀의 손은 클락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대로 멈추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중층에 가면 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조사가 떨어져서 와 봤더니 보고서에 네 이름이 올라와 있는데 뭔가 잘못된 줄 알고 한참이나…….”

        “누구, 시죠?”

        “응?”

        “혹시 저랑 아는 사이신가요?”

       

        일어나자마자 위치노트부터 찾았을 평소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슴처럼 순박한 눈망울을 또르르 굴리는 모습.

        천변의 방 공략에 실패한 마법사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일시적인 기억의 소실이었다.

       

        “나, 나 기억 못 해?”

        “죄송합니다. 머리에 온통 안개가 낀 것 같아서.”

        “아니, 사과할 일은 아니지만서도…… 맞다, 잠시만 기다려.”

       

        꽤 많이 보고된 사실이며 마가렛이 비싼 포션까지 준비해 뒀기에 손쉽게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써야지.

        조금 전 탁자 위에 놓아둔 포션을 집어올린 시엔은 뚜껑을 열었다.

       

        이것만 마시면 클락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까지 알던 모습 그대로.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기억 못 하다니, 죄송스럽네요. 혹시 저와 어떤 관계였는지 말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

        “저, 손에 들고 있는 게 흐르고 있는데…….”

        “여자친구.”

        “네?”

       

        쓰지 말자.

       

       

       “네, 네 애인이라고.”

       

       

        사고의 흐름이 끊어진 순간, 시엔은 자신도 모르게 포션을 바닥에 부으며 생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결혼식에 다녀오느라 시간이 촉박했네요.

    이번에도 작가의 결혼식은 아니었습니다.

    오타는 내일 한 번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

[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

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