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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2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눈.

         

       뽀드득.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서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서리는 자신을 밟은 이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추위로 남아 곁을 맴돌았고, 그로 인해 살결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이곳은 제국의 북서쪽 끝자락. 재앙의 파도를 막는 최전선이다.

         

       “계획에 필요한 갑주는 어떻게 했니? 들고 온 거 같진 않던데.”

         

       하아, 프란체는 새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털이 수북한 모피를 싸맸다.

         

       “엑시드에서 보내줬습니다.”

       “왜 따로 들고 오지 않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프란체를 가주로 만드는 일. 이번 계획은 내가 살아온 진 바렌베르크의 인생 중 피날레이자 핵심이기 때문에 완전 범죄를 저질러야 한다.

         

       괜히 누군가 목격했다가 알려지면 안 되잖나.

         

       “그러기야 하겠구나. 목격자가 있다면 제거해야 할 테니.”

         

       프란체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며 턱을 어루만졌다.

         

       “그래서, 시작은 어찌할 셈이니?”

       “우선 지켜볼 겁니다.”

       “지켜본다고?”

         

       나는 “예.”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방어선 구축이 완료되고, 마수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움직일 겁니다.”

         

       프란체의 의견이 통과되어 계획대로 제일 측면에 배치되었다. 작전은 방어에만 집중하고 내가 마수들을 처리할 때까지 버틴다고 한다.

         

       “그럼 케일은 혼자서 마수들을 처리해야 하니? 완전 사지로 내모는 건 좀 그런 거 같은데.”

         

       이 공녀님이 뭘 모르시네.

         

       “무력만 따지면 케일은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었죠. 최근에는 경지도 올라가 저를 제외하면 가장 강할 겁니다.”

         

       그때 케일은 흥분에 가득 찬 상태로 말했다. 자신은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이제 케일이 제국 최강자겠네.’

         

       초월자들은 혼자서 국가 전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수준이니 따로 취급하지 않고.

         

       “음, 그러면 따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예. 오히려 하필 이번에 와서 케일을 만나야 하는 마수들을 걱정하는 게 맞는 판단입니다.”

         

       프란체가 “푸훗.”하고 조소를 터트렸다.

         

       “이상한 농담도 잘 던지네.”

         

       운이 없어서 하필 케일을 만나야 하는 마수들이 안쓰러운 건 진짜였는데. 의도치 않게 웃겨버렸다.

         

       “크흠, 아무튼. 케일은 위험에 빠져도 문제없습니다. 순간 속도 하나만큼은 저를 따라올 정도니까요.”

         

       케일의 오러 성질은 전류. 순간적인 폭발력을 이용해 번개처럼 이동한다. 진각을 밟고 나서 이동한 소리가 뒤늦게 들려오는 이유도 성질과 관계있다.

         

       “그렇구나.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네.”

       “공녀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분이니 걱정하시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지도자로서의 제1 법칙.

         

       군주가 되는 자. 백성을 첫 번째로 기억하고 보살피라. 그래야만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으니.

         

       아쉽게도 많은 군주가 이 법칙을 모른다.

         

       내가 방금 지어냈기 때문이다.

         

       “그래, 일단은 알겠어. 나는 약속대로 후방에서 라데아와 있으면 되는 거지?”

         

       나는 “맞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본대가 후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케일이 합류할 겁니다. 그때 맞춰서 중앙, 본대 방어선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것으로 계획은 완성된다.

         

       “좋아, 알겠어. 일단 라데아가 도착하고 봐야겠네.”

         

       아직 라데아와 케일은 도착하지 않았다. 눈밭이 가득한 북부 끝자락인 만큼 말이 쉽게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계획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갑주는 어디에 있니? 내가 전해줄게.”

       “제3 보급고 뒤쪽에 어쌔신들이 지키고 있는 검은 마차에 있습니다.”

       “알겠어. 케일이 도착하면 갑주를 전해줄게.”

         

       나는 싱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검은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3 보급고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세 명의 어쌔신들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실력은 진퉁이네.’

         

       기척을 완전히 숨기고 있고, 실력 또한 어쌔신들 중에서 일류다.

         

       ‘셀다스 새끼, 신경 좀 써줬네.’

         

       이래서 거래처랑 관계를 돈독히 쌓아야 한다는 거다. 이것이 기업 운영의 기본이자 핵심.

         

       ‘뭐, 지금은 각설이니 됐고.’

         

       나는 조용히 마차 근처로 다가갔다.

         

       “…!”

       “…!”

         

       기척을 완전히 없애고 다가가서 그런지 바짝 경계 태세가 된 어쌔신들. 나는 적당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진 바렌베르크다. 엑시드에서 온 어쌔신들이지? 잘 부탁한다.”

         

       그제야 경계 태세가 풀린 어쌔신들. 입도 뻥긋하지 않는 것이 정말 투철한 프로 정신이다.

         

       ‘컨셉일 수도 있어.’

         

       원래 어쌔신이라면 암살, 잠입, 첩자 역할이 핵심.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게 컨셉이겠지.

         

       “좀 기다리면 공녀님께서 오실 거야. 알고 있어.”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어쌔신들. 컨셉을 잘 지키는구나.

         

       ‘뭐, 됐고. 갑주나 입자.’

         

       검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두 개의 마네킹에 걸려있는 사슬 갑주와 칠흑의 갑주.

         

       ‘이건 언제 봐도 소름이 돋네.’

         

       광택이라도 난다면 모를까, 아무런 빛도 반사되지 않는다. 뭔가 다른 물질을 쓴 건가? 여러 의문이 든다마는…….

         

       ‘됐어, 일만 잘 처리하면 되지.’

         

       예정된 대로 갑주를 착용했다. 테두리에는 검붉은 색이, 다른 부분은 그저 검은색이다.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드는데.’

         

       기분은 별개로 치고. 의외로 착용감은 나쁘지 않다. 온몸을 둘러싼 판금 갑주인지라 많이 불편할 줄 알았는데.

         

       그 순간.

         

       두근!

         

       “?!”

         

       손이 덜덜 떨려오며 어깨에 진동이 온다.

         

       ‘뭐지?’

         

       뭔가 잘못되고 있다. 빨리 갑옷을 벗어야…….

         

       쿵! 별안간 심장을 비틀어 짜내는 듯한 고통이 몰려오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서리가 느껴졌다.

         

       “큭…! 커헉…!”

         

       그리고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

         

       「가는 건 너다, 진 바렌베르크.」

       「그래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킬킬, 방법은 너도 알고 있잖아?」

       「프란체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마법이 있잖아, 킬킬. 영…」

         

       음성이 끝나자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근데 마지막에 영? 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망할 초월 마법사가 작업을 쳐뒀군.”

         

       어쩐지 갑주가 좀 이상하다 싶었다. 설마 동기화를 시키는 마법을 심어뒀을 줄이야.

         

       ‘초월 마법사가 원하는 건 대체 뭐야?’

         

       직접 움직이면서까지 갑주에 마법을 심어뒀다. 덕분에 동기화가 심화하고, 이상한 정보까지 들었다.

         

       그간 고통에 눈이 멀어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만…….

         

       ‘이번 거로 확실히 알겠어.’

         

       진 바렌베르크는 프란체를 살리기 위해 회귀를 반복했지만,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그 결과로 진은 이동의 마법진을 새겼고, 프란체에게도 모종의 마법을 사용했다.

         

       ‘잘은 모르겠다만, 초월 마법사는 내 동기화를 기다리고 있군.’

         

       다행히도 동기화가 그리 심하게 되진 않았다. 잃어버린 기억도 딱히 없고. 그냥 진의 인격만 조금 들어온 수준이다.

         

       ‘큰일 날 뻔했어.’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데, 그간 계획하고 쌓아왔던 모든 게 물거품이 되면 의미가 없어질 뻔했다.

         

       ‘초월 마법사가 뭐 때문에 내 동기화를 기다리는 건지 모르겠다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역할을 끝마치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 사하라로 떠날 거다.

         

         

       * * *

         

         

       데카르트 공작가의 기사들과 공작령에서 징집된 병사들이 빼곡히 모인 중앙 본대.

         

       데카르트 공작이 외쳤다.

         

       “이번 재앙의 파도 작전을 설명하겠다!”

         

       넓은 눈밭에 모여 일제히 고개를 올려다보는 기사들과 병사들.

         

       “이번에는 굳이 토벌대를 만들지 않고 모든 전선을 방어에 집중하며 마수를 토벌할 것이다! 최전방으로 가는 건 진 바렌베르크뿐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전술과 작전에 의문을 가진 기사단과 병사들이었지만, 공작의 전언이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배치된 장소로!”

         

       척. 척. 기사들과 병사들이 이동하며 갑옷과 투구가 사납게 울었다. 그 위로는 각양각색으로 칠해진 깃발들까지.

         

       각 부대를 지칭하는 깃발이었다.

         

       “공작님.”

       “에덴.”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곧바로 가지.”

         

       공작 본대를 이끌고 중앙, 최전선에 섰다.

         

       철판에 가시를 달아 바리게이트를 만들었다지만, 이는 수많은 마수 앞에서는 그저 겉치레에 불과하다.

         

       “각자 위치로!”

       ─위치로!

         

       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기사단과 병사들. 다윈 데카르트도 투구를 쓰고 검을 뽑았다.

         

       우웅…!

         

       붉은 오러가 온몸에 돌기 시작하자 살갗을 찢을 것 같은 추위도 사라졌다. 주변에 열기가 흩뿌려지며 눈이 녹기 시작했다.

         

       “하아…….”

         

       입가에서 뜨거운 김이 새어 나온다. 화염의 성질을 가진 오러.

         

       “후웁!”

         

       에덴도 옆에서 피의 성질을 가진 검붉은 오러를 활성화했다.

         

       그렇게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중심으로, 본대의 수비진이 구축되었다.

         

       그리고.

         

       두두두두두두──!

         

       땅의 울림과 동시에, 마치 눈사태라도 난 듯 저 멀리서 새하얀 폭풍이 몰려온다.

         

       재앙의 파도가 시작된 것이다.

         

       “온다!”

         

       척! 훈련된 병사와 기사들의 수비진형.

         

       커다란 방패를 든 기사들이 전열을 맡고, 창을 든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궁병들이 후방에서 공격한다.

         

       정석적인 수비 전술이다.

         

       “놈들이 거의 다 왔습니다!”

         

       공작가의 기사단장이 외쳤다.

         

       새하얀 폭풍에서 놈들이 모습을 보였다.

         

       이마에 나선형 뿔이 달린 늑대, 외눈을 가진 고블린, 대왕 코 트롤, 특대 개미, 거대 인면 쥐.

         

       “이번에는 종류가 다양하군.”

         

       공작이 칼자루를 세게 쥐었다.

         

       앞으로 300M… 200M… 100…….

         

       -키에에에에에엑!

         

       “다들 호흡 길게 들이마셔라!”

         

       콰앙──!

         

       마수들과 방패병들이 충돌했다. 그와 동시에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

         

       투두두두둑─!

         

       화살이 꽂힌 마수들은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진 바렌베르크만 오면 금방 정리된다! 버텨라!”

         

       앞에 사체들이 쌓여 쉽게 돌진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정도면 전선이 무너지지 않는다.

         

       “찔러!”

       “방패병 버텨라!”

       “교대 준비해!”

         

       방패 사이로 창을 찔러 넣어 근접한 마수를 죽이고, 벽을 쌓는다. 그 외에는 화살을 쏟아붓는다.

         

       ‘숫자는 줄어들 생각을 안 하지만, 버티는 건 문제없겠군.’

         

       수비 전술이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다. 이대로 진 바렌베르크가 측면에서부터 정리하면 큰 손해 없이 재앙의 파도를 막을 수 있을 터.

         

       “에덴, 준비해라.”

       “예.”

         

       공작은 기사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휘는 부탁하지. 지금부터 분산 작전에 들어간다.”

         

       척! 기사단장은 각 잡힌 경례와 동시에 우렁찬 목소리로 “예!”하고 대답했다.

         

       “가자, 에덴.”

       “예.”

         

       그렇게 측면으로 빠져 방어선을 넘었다. 지금부터 소드 마스터들의 시간.

         

       “흐읍…!”

         

       아무리 늙었어도 오러를 깨우친 소드 마스터다. 마수 정도야 별거 아닌 수준.

         

       스각! 스각!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다섯의 마수를 베었고, 두 번째의 검격으로 여섯의 마수를 베었다.

         

       공작의 검에는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에덴!”

         

       촤악! 핏빛으로 물든 검이 화려한 곡선을 그린다. 에덴 또한 공작과 마찬가지로 마수들을 썰어버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손해가 없겠군. 이대로 반대 쪽의 기사단과 합류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분산 작전을 시행하려던 그때.

         

       콰아앙─!

         

       별안간 굉음이 들려오더니 달려들던 마수들이 전부 토막 나 하늘을 유영했다.

         

       “무슨…?”

         

       철컹…. 철컹…. 음산하게 들려오는 갑옷의 우는 소리.

         

       공작과 에덴의 눈앞에, 칠흑의 갑주를 입은 기사가 등장했다.

         

       “…….”

         

       몸 주변에 두르고 있는 맑고 푸른 오러. 공작과 에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름 끼치는 칠흑의 갑주를 입은 인간형 마수.

         

       “저건 설마…!”

       “혹한의 망령입니다!”

         

       콰과과과─!

         

       대처할 틈도 없이 혹한의 망령이 휘두른 검격이 대지를 가르며 날아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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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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