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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3

        틸레트 아카데미의 재학생 수는 생각보다 적다.

         

        한 학년에 300명에서 400명 남짓한 수준.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동급생의 얼굴을 외우는 것쯤이야 쉬웠다.

         

        실제로 발이 넓은 친구들은 술자리 몇 번 다니는 것만으로도 한 학년의 이름을 전부 외워버린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길 가다가 재학생을 만났을 때 ‘아, 쟤는 1학년이었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는 단순히 내가 금안족이기 때문이었다.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었거니와, 종족이 종족이다 보니 다른 사람 눈에는 신기하게 보일 것이다. 그 탓에 학기 초에는 회랑을 오가면서 모르는 사람과 통성명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마법을 못 쓴다는 이유만으로 1천 년 넘게 천대받아온 금안족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만난 학생 대부분은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차석으로 입학해서 그런 걸지도.

         

        그냥 금안족이 아니고, 틸레트의 특별반에 입학한 금안족이니까 대우가 다를 수도 있겠다. 어느 시대건 좋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은 대체로 좋은 대접을 받기 마련이니까.

         

        물론 순수하게 금안족을 멸시하거나 차별하는 이들도 있었다.

         

        클리온 황자를 비롯하며 ‘마법도 못 쓰는 종족 주제에’라는 폭언을 내뱉는 녀석들도 심심찮게 만나봤다. 시간상의 이유로 대부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지만, 그게 쫄아서 도망가는 건 줄 알고 선을 넘어버리는 족속들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공학용 캘리퍼스의 그윽한 맛을 보여주었고, 합법적으로 골통을 깨부수는 찰진 감각을 음미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곤 하였다.

         

        좋든 싫든, 그런 식으로 안면을 튼 재학생의 수는 어언 500명. 

         

        “제가 수강신청은 처음인데, 잠깐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 수많은 학생의 얼굴 중에서, 이 소녀의 얼굴은 내 메모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지?

         

        “수강신청이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소녀는 바다와도 같은 색감의 눈동자를 똘망똘망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이번 학기만 다니게 되었거든요.”

        “교환학생 같은 건가요?”

        “아…. 네!”

         

        아닌 것 같은데.

         

        수강신청 자체는 열 살 먹은 꼬맹이도 눈치만 있다면 혼자서 보고 할 정도로 쉽다. 듣고 싶은 과목 적어서 데스크에 내면 끝이니까.

         

        틸레트에 교환학생 올 정도로 똑똑한 학생이면 그걸 모르진 않을 테고….

         

        옛날부터 여러 사람의 무수한 구라를 몸소 듣고 경험해 본 나로서는 직감만으로 알 수 있다. 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럴 땐 깊게 관여하지 않고 떠나는 게 상책이다.

         

        “저 앞에 붙은 벽보 보이시죠? 저기서 듣고 싶은 과목을 교수자 이름과 함께 작성해서 안내 데스크에 제출하면 돼요.”

        “오…. 언니는 무슨 과목 들을 건데요?”

         

        맥락 없이 툭 치고 들어온 말에 잠깐 정신줄을 놓았다.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하는데.

         

        “…그냥 기초과목 위주로 들을 생각이에요.”

        “그렇구나. 그러면 저도 똑같은 걸로 들어도 되나요?”

        “예….” 

         

        소녀는 수강신청 종이와 펜을 받아온 뒤 내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내가 적는 과목을 그대로 따라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 적으면 되는 거 맞죠?” 

         

        그녀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며 배시시 웃는다. 등허리까지 곧게 뻗은 연람색 머릿결이 찰랑거렸다. 살리에르 영지에 있을 때 맡았던 입욕제와 흡사한 향이 진풍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꽤 고급스러운 린스를 쓰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금안족이나 하이엘프 뺨칠 외모의 소유자다.

         

        “맞죠?”

        “네.”

         

        아, 재수도 없지. 어제의 안젤리카에 이어 오늘은 얘와 부대끼게 생겼구나.

         

        여러모로 수상한 아이다. 날 쳐다볼 때마다 실실 웃어대는 점이라든가, 고작 수강신청하러 오는 데 궁중 사교회에서나 입을 법한 드레스를 하고 왔다든가.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아니면 이런 엉뚱한 점이라든가.

         

        “…마음대로 하세요.”

         

        짜증이 나긴 해도 안젤리카처럼 쥐어패고 싶어질 정도로 거슬리진 않았다는 게 그나마 나은 점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아주 싫진 않았다.

         

        “수강신청 도와줘서 고마워요, 언니.”

         

       왜 들고 다니는 건지 갑자기 품에서 부채를 꺼내 입을 가리는 소녀. 그녀가 쿡쿡 웃는다. 만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악녀 같은 몸동작에 헛웃음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제가 답례로 차라도 한 잔 대접할게요.”

        “아뇨, 전 괜찮…….”

        “마침 요 근처에 괜찮은 디저트 카페를 하나 알고 있거든요. 분명 언니의 입맛에도 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 

         

        …디저트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경계에 있는 한 명의 물리학도로서 진지하게 고찰해 보자.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이사장에게 등록금과 연구비를 지원받는 대신 소형 플레어를 개발하는 것도 해야 하고, 버멜과 정보를 주고받을 새로운 방법도 생각해 봐야 한다. 또 마왕이 부활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열핵폭탄의 개발에도 신경을 써야 하며,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가능한 많은 마도를 틸레트에서 익혀 둬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는 스트레스라는 대가가 따른다. 한 가지 일을 완료하면 그만큼 심적으로 지치게 될 것이다.

         

       그런 마당인데, 조금의 시간을 할애하는 대가로 스트레스 지수를 낮출 수 있다면 이득 아닐까.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루왁 커피랑 3층짜리 파르페도 있거든요. 한 번 가서 보실래요?” 

         

        소녀는 팔을 끌어당기며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었다. 동글동글한 고양이상 얼굴에 미소를 더하니 심리적으로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건 기브 엔 테이크다. 내가 이 아이를 도와줬으니까 조금 정도는 얻어먹어도 괜찮겠지.

         

       뭣하면 차액만큼 내가 내도 되고 말이다.

       

         

        ** 

         

         

        …그리 생각했던 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주문하신 내역 모두 합쳐서 금화 50장 되겠습니다.”

         

        지금 와 있는 가게의 이름은 ‘옐로케이크 메디안’, 눈앞의 소녀에게 듣자 하니 수도 뒷골목에 숨겨진 디저트 맛집이라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종업원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섰다.

         

        금화 쉰 장이라고? 미쳤나?

         

        얼빠진 표정으로 여종업원을 쳐다보니 그녀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호갱님?’이라는 표정으로 나와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먼저 나온 무알코올 칵테일을 쭙쭙 빨아먹으며 황홀경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시키지도 않았는데 돈이 왕창 깨져버렸다. 비록 내가 낼 건 아니었지만, 이러면 이 소녀에게 있어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게 아닐까. 

         

        “죄송해요, 손님. 요새 물가가 너무 많이 올라서요…. 저희도 이렇게까지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 적자가 날 수밖에 없어요….”

         

        흑사병이 터지기 전부터 제국 경제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경제학을 깊게 공부해보지 않았더라도 이게 인플레이션 내지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라는 것쯤은 안다. 내가 이쪽 분야에는 교양 수준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라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

         

        “괜찮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품 안에서 반짝거리는 동전 쉰 장을 꺼내어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어림짐작해도 50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종업원은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아마 나도 이 종업원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이러나저러나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절대다수가 평민이고, 나 또한 아직은 평민의 신분이니 말이다. 저 사람이나 나나 금전 감각은 비슷하다는 얘기다.

         

        “후흐,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디까지나 제가 쏘는 거니까요.”  

         

        이거, 오히려 이쪽에서 빚을 지는 꼴 아닌가. 

         

        이 소녀가 귀족이라는 것쯤은 확실히 알겠다. 아니면 어디 일국의 왕녀라도 되거나.

         

        “아무래도 이상한데. 나라 경제가 이러면 다들 긴축하려고 하지 않나?”

         

        나는 어느새 소녀에게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눈앞의 소녀가 하도 말을 놓아달라고 사정사정해서 맞춰주고 있는 것뿐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존대로 돌리고 싶다.

         

        “서민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전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예요.”

        “아무리 그래도 현금을 이렇게나 많이 들고 다니는 건….”

        “원래도 여기 올 생각으로 들고 왔어요.”

       “이만한 거금을 나한테 써도 되겠어?” 

        “글쎄, 괜찮다니까요. 오히려 이런 때에 저 같은 사람들이 돈을 시장에 많이 풀어줘야 하는 법이랍니다. 그래야 나라 경제가 돌아가지 않겠어요?”

         

        분명히 농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농담처럼 안 들린다. 오히려 가벼운 언행 뒤에 어떤 저의가 깔린 듯하다.

         

        마치 나에게서 무언가를 가늠하려 하는 듯한….

         

        “그건 아니지.”

        “흐음.”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거기까지만 말했다. 부연 설명은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랑 언쟁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주문하신 파르페 나왔습니다.” 

        “정말 먹어도 되는 거야?”

        “네, 얼마든지요. 빚 지우는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양껏 드셔주세요.” 

         

        야호.

         

        기쁜 마음으로 유리컵 상단에 놓인 반쪽짜리 딸기를 포크로 콕 집었다. 그걸 입에 가져가려던 찰나, 눈앞의 소녀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언니, 우리 둘이 통성명도 안 했네요. 언니는 혹시 제가 누구인지 알아보겠어요?”

        “알아 본다니…?”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아니?” 

         

        그렇게 말하니 기시감이 없는 건 아닌데, 이런 건 대부분 뇌가 겪는 환상에 불과하다. 뭔가 그럴 것 같으면 꼭 아니더라. 전공 공부하면서 여러 번 느꼈던 사실이다.

         

        “흐음, 그래요. 저는 언니를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것 같아서 친숙하게 느꼈는데.”

         

        이상한 기운이 들어 순간 고개를 쳐들었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생각해 보자.

       

        4년을 수도에 처박혀서 산 제국 유일의 금안족에게 ‘몇 번이나 봐서 친숙하다’라고?

         

        포크로 생크림을 한 움큼 파내어 입에 넣기 전에 살펴보았다. 인간의 눈으로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옥색 미립자들이 크림에 묻어있었다. 베릴륨 결정이다.

         

        마지막으로 이 카페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옐로케이크 메디안’.

         

        “허어.”

         

       이제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눈앞의 이 아이는 누구인지 윤곽이 그려졌다.

       

        예전에 버멜이 말해줬던 대로다.

         

        2학기는 쉽게 넘어가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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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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