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13

       같은 서울이라고 하더라도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꽤 오랜 시간을 차나 지하철 안에 있어야 하듯, 제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제도가 현대 지구의 선진국 수도처럼 ‘메갈로폴리스’라고 불릴 정도로 비대해지지는 않았다. 기술력이나 복지 수준 모두 20세기 초반 그대로였으니, 중세에 비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인류가 평균수명 70세를 달성한 것 또한 아니었다.

        

       공식 조사 결과 제국 인구는 1억 1천만이 조금 넘었다. 공업지대에서 마구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수많은 사생아와 고아들을 생각하면 실질적인 인구는 그것보다는 조금 많을 것이다.

        

       제도의 인구는 이제 막 밀집되기 시작하여 7백만이 조금 넘었다. 이 세계 기준으로는 압도적인 크기의 대도시였지만, 아무래도 서울, 뉴욕, 도쿄 같은 진짜 메갈로폴리스를 알고 있는 내 기준으로는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튼, 7백만 인구를 가진 도시라고 해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서울보다는 작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한국 내에서도 서울을 제외하면 제도의 인구수에 맞먹는 도시는 없긴 했으니까.

        

       적기조례라고 불리는 골때리는 법안 때문에 제도 내에서는 증기자동차가 사실상 운행이 불가능한 수준이었기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마차뿐이었다. 그러니 시속 10km를 조금 넘는 속도의 교통수단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7백만 인구수의 도시는 체감상 현대의 그 어떤 도시보다 훨씬 커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카데미에서 그레이스 가 영지까지는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았지만.

        

       어릴 때 딱 한 번 이 앞까지만 와본 것이 다였지만, 다시 봐도 인상적인 곳이었다.

        

       하늘로 뿜어내는 매연이 공업화의 상징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기차역에서 기관차가 뿜어내는 증기가 현대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제도 한가운데 당당하게 푸른 잔디밭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촌스럽다거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저 정도로 넓은 땅이 있다면 보통은 다른 용도로 쓸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귀족들이 자기네 앞마당에 공장을 짓지야 않겠지만, 보통은 저런 잔디밭보다는 커다란 정원을 만드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까.

        

       게다가 ‘영지’치고는 그 근처를 지키는 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윈터필드나 노스우드, 크로우필드는 영주 성 근처에 매우 많은 경비가 있었다. 총과 검으로 서슬 퍼렇게 무장한 채 지나가는 이들 하나하나를 노려보는 그 경비병들을 사람들은 멀찍이 돌아서 피해 다녔다.

        

       하지만 이 영지를 지키는 것은 영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두 사람뿐.

        

       그나마 그 두 사람의 무장도 제도 안을 돌아다니는 경찰들의 무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는 것뿐일까.

        

       왼쪽에는 검, 오른쪽에는 권총. 복장 자체는 제도 경관들이 입고 다니는 옷과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20세기 초의 영국 경찰이라고 하면 생각날 법한, 커다란 단추가 1자로 달린 외투와 가느다란 가죽 허리띠, 그리고 정장 바지와 구두. 색은 경관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푸른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다만 그 특유의 모자는 없었다.

        

       사실, 복장의 색이나 무장만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겁먹게 하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무척 편안하고 여유로워서인지 그 무기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솔직히 길 가다가 길 물어볼 사람이 없다면 그 두 사람에게 물어봐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그리고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사실상 형식뿐인 검문을 마치고—정말로 가진 무장이 있냐고 물어보는 정도가 끝이었다—경비원 중 한 사람이 말하자, 클레어는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활짝 웃어 보였다. 클레어의 그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 웃음에 경비원들도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다시 보아도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앞에 조카나 딸을 데려다 놓고 칠칠맞게 웃는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클레어가 오랜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저 경비원들도 단순히 고용되었다기보다는 그레이스 가의 가신에 가까운 사람들일 것이다. 하긴, 가신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동안 잘 지내셨죠?”

        

       클레어를 이어 그녀와 마주 보는 자리에 있어서 같은 방향의 창문을 볼 수 있었던 레오도 그렇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도련님.”

        

       “도련님은 잘 지내셨습니까?”

        

       차기 가주인 레오 앞에서도 별로 긴장하지도 않은 채 경비원들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네, 물론이죠.”

        

       “그렇습니까?”

        

       경비원 중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아저씨 쪽이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었다.

        

       “가주님께서는 도련님께서 ‘너무 잘’ 지내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시더군요.”

        

       “……예?”

        

       “예를 들어서, 근육이 빠지고 살이 붙었다던가…….”

        

       젊은 쪽 경비원이 레오를 구석구석 뜯어보며 말하자, 레오는 기겁해서 외쳤다.

        

       “아뇨,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했는데요!?”

        

       “그건 가주님께서 직접 판단하시지 않겠습니까?”

        

       어째 클레어를 대할 때와 분위기가 조금 다른데.

        

       어쩌면 클레어는 여자고, 레오는 남자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의 성 관념으로 생각하면 남자가 여자와 싸우거나 시비를 거는 것 자체가 신사답지 못한 일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게다가 레오는 차기 가주였다. 늙어 죽을 때까지 이 가문의 일원으로서 가문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라는 소리다.

        

       반면에 클레어는…… 언젠가 다른 귀족 가문 남자와 결혼하게 되겠지. 그래도 ‘그레이스가’의 일원‘이었다는’ 연결고리는 남아있겠지만, 결국 성이 남편 성을 따라 바뀌면서 그레이스가 아닌 다른 가문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클레어 쪽을 조금 더 자유롭게 풀어두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만 지킬 줄 알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렇게 한동안 티격태격하다가, 정문에 달린 스피커 비슷하게 생긴 곳에서 따르릉, 벨 소리가 울렸다.

        

       더 젊은 쪽의 경비가 그쪽으로 가서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잠깐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온 경비원이 우리 쪽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두 황녀님께서 방문하셔서 영광이라고 그레이스 남작 부부께서 전하십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멋지게 검을 뽑아서 척, 하고 검례를 표했다. 검을 꼿꼿이 얼굴 앞에 세워서 들고 한 손을 뒷짐을 지는 그 자세는, 게임 패키지에 그려져도 될 만큼 멋진 자세였다.

        

       “황실을 대표하여 감사를 표합니다.”

        

       앨리스가 마차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예를 갖춰서 그렇게 말하자, 두 사람은 검례를 풀었다.

        

       “그럼 그레이스 영지에서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단출하다는 말 안에 언제나 빈곤해 보인다는 말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귀족의 영지는 화려하게 치장되는 법이다. 온갖 꽃이 색색이 피어있는 정원, 화려한 분수. 가끔은 아예 미로를 만들어두는 곳도 있었고.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레이스 영지는 그렇게 화려하게 꾸며진 곳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잔디밭을 이렇게 말끔하게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어느 잔디 하나 위로 튀어나온 것이 없었고, 구멍이 파이거나 노랗게 시들어있는 곳도 없었다.

        

       지어진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최신 공법으로 지어진 것 같은 그레이스 가의 건물들은 다른 영지의 건물들처럼 예스러워 보이는 화려한 장식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양식으로 보면 유럽의 성이라기보다는 20세기 뉴욕이 떠올랐다.

        

       너무 번잡하지 않게 절제된 방식으로 지어진 그 건물들 때문에 여기가 ‘영지’라기보다는 ‘어떤 시설’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어쩔 수 없었다. 말하자면 역사 깊은 대학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황녀님들께서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가주인 에드워드 그레이스 남작이 본관 정문 앞에 미리 나와 있었다.

        

       10년 전에 보았던 그 얼굴과 크게 달라진 구석은 모르겠다. 사실 멀리서 짧게 보았기에 명확하게 떠올리기 어렵기도 했지만.

        

       그래도 얼굴의 어느 부분은 레오와 닮았다. 푸른 머리카락이라던가, 눈동자라던가. 클레어가 피가 섞이지 않았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이 가문에 녹아들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이 사람의 이 머리색과 푸른 눈동자 덕분이리라. 배경을 알지 못하면 분명 피가 섞였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어쩌면 먼 친척일지도 모르고. 클레어의 부모에 대해서는 내가 플레이한 부분까지는 밝혀진 바가 없었으니까.

        

       남작이 허리를 숙여 귀족의 예를 갖추자, 조금 뒤쪽에 서 있던 남작 부인도 허리와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이쪽도 역시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만 남편처럼 선명한 푸른 빛은 아니고, 빛에 따라서 에메랄드색이 조금 섞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클레어와 레오의 친구로서 방문한 것이니,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앨리스가 차분하게 말하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고개나 허리를 숙이지는 않았지만.

        

       신분이라는 게 사람 관계를 참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다니까.

       

    다음화 보기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