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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3

       나는 지금 한 가족을 따라 걷고 있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평범한 가족이다.

        

       아니, 사실 ‘평범’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지는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보험 광고에나 나올법한 잘생긴 아버지와 아름다운 어머니, 그리고 아역 배우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딸이라는 조합이 ‘평범’한가 물어본다면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평범하다기보다는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오히려 너무 이상적으로 보여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화목한 가정.

        

       만약 내가 배경지식 없이 저 셋을 봤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으리라.

        

       사라의 친아버지인 예인수. 그리고 친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재혼한 최나경.

        

       두 사람 다 어린 사라를 끔찍하게 위해주고 있었다.

        

       끝도 없이 푸른 초원에서, 사라의 양손을 한 쪽씩 잡고 함께 걷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은 한없이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의 눈길은 오로지 사라를 향해 있을 뿐.

        

       그것이 ‘부자연스럽다’라고 느끼려면, 역시 그 이후의 사라의 모습까지 알고 있어야겠지.

        

       사라의 기억은 행복했던 기억으로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오랫동안 갇혀있던 저택 안, 특히 사라의 방 안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세세하고 정교했지만, 사라가 몇 번 가본 적 없는 장소는 일부가 비어있기도 했고, 아예 현실과는 동떨어진 경우도 많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일수록 더욱 그랬다.

        

       학교 안은 채도가 너무 낮아서 거의 흑백으로 보일 지경이었고, 길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희미해서 이목구비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극히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중 일부를 제외하면 나머지 대화는 모두 노이즈처럼 지직거렸다.

        

       ……뚜렷하게 들리던 극히 일부의 대화는 보통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라는 그만큼 이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과거의 기억이 거의 무채색이었던데 반해, 이 기억은 이만큼이나 화려하게 칠해져 있었으니까.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랗다.

        

       저 멀리까지 탁 트인 평지는 푸른 잔디가 가득 자라있어 푹신했다.

        

       한국에 이런 곳이 있던가?

        

       아마,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만큼 미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광경이리라.

        

       사라는 자신의 하나 남은 가족을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했다.

        

       이 광경을 보니, 확실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에게 남은 것은 정말로 최나경 하나뿐이었으니까.

        

       아름답고, 서글픈 광경이었다.

        

       세 사람의 대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멀리서 웅얼거리듯, 마치 억지로 묵음처리 된 것처럼. 아마 사라도 그때의 대화가 기억나지는 않는 모양이다.

        

       세 사람은 한동안 걷다가, 자리에 멈추어 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그 기억을 따라가던 나도 다리를 멈췄다.

        

       소풍을 왔으니 도시락이라도 먹으려는 것일까. 세 사람 중 아무도 그런 물건을 들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사라의 기억 속에 있으면서 없던 것이 갑자기 생기거나, 있던 것이 갑자기 사라지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다. 사람의 기억은 완벽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시야 바깥에 있는 것은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면 더욱 그랬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멈춰선 채 그대로였다.

        

       여기가 기억의 끝인 걸까?

        

       내가 여기에 온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사라의 기억 속을 끊임없이 역행했다. 내 의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저 쏟아지는 기억에 떠밀려서 계속 걷고 또 걸었을 뿐.

        

       ……그 과정에서, 나는 사라가 그저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사라뿐만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내가 만나는 모두가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 세상이 존재하고, 내가 넘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더라도, 이 세상이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나와 별로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나는 말없이 세 사람의 옆을 크게 돌아서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최나경과 예인수의 얼굴에서는 환하게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라가 유하늘을 믿지 못했던 이유.

        

       얼굴에서 쏟아지는 빛은 일견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착한 사람이라서, 혹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서 쏟아지는 빛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빛은 사라의 개인적인 직감을 시각화시켜준 것뿐이다.

        

       아마도,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사라만의 방식이자 능력이겠지.

        

       ……그리고 두 사람 다, 사라의 인생을 확실하게 바꾸기는 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최나경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이 날이 갈수록 서서히 적어진 것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라의 인생을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 바꾸었지만, 그렇게 ‘바꾼 뒤에’는 쭉 그대로였으니까. 최나경이 본색을 드러낸 뒤로, 사라에게 있어 최나경은 그저 변하지 않는 인물일 뿐이었다. 그대로 두었으면 사라의 인생도 그대로 쭉 나아갔을 테니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본 최나경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지 않았다.

        

       “…….”

        

       더 이상 밀려들어 오는 기억은 없었다. 아무래도 사라의 기억은 여기가 마지막인 모양이었다.

        

       ‘예사라’라는 존재의 원점.

        

       최나경과 예사라의 뒤틀린 관계가 만들어진 근원.

        

       예사라의 기억 안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나는 시선을 내려 어린 사라를 보았다가, 흠칫 놀랐다.

        

       사라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을 뿐이다.

        

       최나경을 올려다보거나, 예인수를 올려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가장 행복했을 순간의 기억인데도, 사라는 그 어린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띠고 있지 않았다.

        

       “…….”

        

       잠시간의 침묵 뒤에,

        

       “……어디까지 봤어?”

        

       사라가 그렇게 물어왔다.

        

       *

        

       “대체, 어떻게?”

        

       ‘그 사람’이 확연하게 당황한 채 물었다.

        

       참, 다른 사람 몸 안에 들어왔던 사람이 저런 반응을 보이면 나는 어쩌라고.

        

       그것도 그냥 다른 사람의 몸이 아니라, 나의 몸이었다. 여기는 내 기억 안이었고.

        

       그것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부끄럽다.

        

       나는 아홉 살 이후로 거의 항상 그 저택 안에서만 살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서 살았던 것은 아니니까. 나도 사람이었고, 당연히 그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뭔가 할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혼자 망상하기도 하고, 그 망상을 노트에 적기도 했다.

        

       새장에 갇힌 공주를, 또 다른 박해받는 이인 흡혈귀가 와서 구해주는 이야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았다.

        

       배경도, 내용도, 그냥 내 망상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것이었으니까. 사실 처음 적기 시작할 때는 완성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그때그때 떠오르는, 나 나름대로 멋지다고 생각한 말을 나열해놓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이 시간이었다.

        

       망상은 이내 줄거리가 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이야기를 완성하고 말았다.

        

       한 번 다시 읽어보고 서랍 안에 넣어두었을 뿐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적어도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무도 나를 구해주러 오지 않아.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신경 쓰는 사람도 없어.

        

       그랬기에, 나는 그 이야기를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다시는 읽지 않았었다.

        

       ……이 사람은 그 이야기를 읽었을까?

        

       “…….”

        

       나는, 나보다 한참 키가 큰 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그곳에 있었다.

        

       나에게 쏟아지는 눈 부신 빛.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

        

       내가 지금껏 살아온 어떤 사람도, 저 정도의 빛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바꾸고도, 더 바꿀 것이 남아있다는 뜻일까.

        

       사실 그 생각은 논리적인 이성에서 뻗어 나온 것이 아닌, 지극히 감정적인 직감이었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를 구해주고자 하는 사람을 만났다.

        

       나와 똑같이 무시당하고 없는 것 취급당하면서도, 그렇기에 나에게 공감하고 나의 새장을 부숴준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보고 나면, 어디로 가려고 했어?”

        

       그렇기에 나는 물었다.

        

       이 기억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

        

       어머님과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

        

       만약 이 사람이 내 기억의 끝에서부터 걸어왔다면, 더는 갈 곳이 없다.

        

       만약 여기서 더 가게 된다면—

        

       사실 아는 것은 없다. 나는 사람의 뇌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중인격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내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그저 기억을 잃었던 ‘내’가 아니라고.

        

       누가 본다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아마 어머님이 알았다면 정신병원에 가둘 이유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어디로 사라지려고 했어?”

        

       “……나는.”

        

       그 빛덩어리가 잠시 망설였다.

        

       “그 몸은 너의 거니까—”

        

       그리고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려 했다.

        

       “그 몸은 나의 것이 맞지만, 그건 내 인생이 아니었잖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안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느끼고 있는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사람 앞에서 아무 망설임 없이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아니, 이것도 모두 이 사람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내 직감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내 인생을 고작 3개월간 대신 살면서, 내가 바꾸지 못했던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 사람.

        

       ……내가 원하던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버린 사람.

        

       나와 같은 상황에서도,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돌진해버린 사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나를 위해, 포기해준 사람.

        

       나를 구해준 유일한 사람.

        

       나는 어머님과 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한 손을 그 사람— 그 빛을 향해 뻗었다.

        

       “내 인생을 대신 살았으니, 확실하게 마무리 지어줘.”

        

       이제야 만났는데, 벌써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나의 억지였다.

        

       자신이 할 일을 모두 마쳤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듣기에는 그저 떼쓰는 어린아이의 말처럼 들렸겠지만.

        

       “……한 번 책임을 졌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란 말야.”

        

       나는 한없이 진심이었다.

        

       “…….”

        

       그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쏟아지는 빛 때문에 표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 말에 어이없어하고 있을까?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까?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꼈건, 결국 나의 말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빛 덩어리에서, 빛줄기 하나가 흘러나왔다. 마치 사람이 손을 뻗는 듯.

        

       그 빛줄기는 이내 내 손에 닿았다.

        

       따스한 온기가 내 손에서부터 심장까지 천천히 올라왔다.

        

       ……다행이다.

        

       고마워, 나의 억지를 들어줘서.

        

       나는 쏟아지는 빛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썼던 이야기에서도 마지막은 이런 장면으로 끝났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천천히 읽어보기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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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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