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비아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이젠 숫총각도 아니다 보니, 지금 이 분위기가 어떤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실비아가 허리가 점점 더 강하게 앞뒤로 튕겨오고 있는 가운데,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니, 안 되죠.”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만두었던 높임말도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와 버렸다.
실비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왜?”
“왜는 무슨 왜에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밖에서 앨리스 누나가 기다리고 있다니까.”
“왜 기다려?”
“… 아직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가지 마.”
실비아의 요구는 기본적인 사회적 매너를 완전히 무시한 요구였다.
다른 사람과 만날 일 없는 이 숲속에서 너무나 오래 지낸 탓이리라.
“나를 좋아한다면서, 앨리스가 아니라 나를…”
“저기, 실비아. 앨리스 누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입장인 거 잊었어요?”
“…”
“하… 일단 진정하고,”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리려 했으나, 실비아는 내 가슴팍을 눌러 다시 눕혔다.
그녀의 행동에 살짝 당황했지만,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실비아… 이러면 안 돼요.”
“…”
“…지금은 안 돼요.”
나는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엇나가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나는 실비아가 내게 거부당했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말을 골라 덧붙였다.
“실비아, 앨리스 누나에게 사과하라는 내 말은 단순히 사과하는 시늉만 하라는 게 아니에요.”
“…”
“없는 진심을 만들어낼 순 없겠지만, 최소한 정성이라도 보여야죠.”
“…”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녀였지만, 내 가슴을 누르는 손이 점점 무겁게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살짝 통증도 느껴질 정도였지만,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사나운 맹수를 길들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내 가슴을 짓이길 듯 누르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실비아. 내가 이 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죠?”
“…응,”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알아…”
“그렇죠? 실비아도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잖아요.”
“…”
난 천천히 실비아의 손목을 붙잡아 천천히 떼어냈다.
내 가녀린 손목보다 훨씬 억세고 강인한 팔뚝이었지만, 그녀는 결코 내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앨리스 누나에 대한 죄책감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만큼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에서야 제대로 알게 된 그녀의 맹목적인 사랑은 솔직히 버겁고 무거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버렸고, 앨리스 누나가 당한 일을 보고도 그 감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으니까.
“앨리스 누나가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나도 같이 빌어줄게요. 그래도 안 된다면, 같이 벌 받아줄게요.”
“애쉬.”
“그러니까, 지금은 안 돼요.”
“…”
실비아는 천천히 한쪽 다리를 들어, 내 몸에서 비켜 나왔다.
자연스럽게 내 가슴을 짓누르던 그녀의 억센 팔도 떨어졌다.
그녀는 내 옆에 누워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그녀를 끌어안으며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추었다.
*
나는 앨리스 누나를 찾아 밖으로 나왔다.
실비아에게 같이 나오자 말했으나, 그녀는 진심 어린 사과를 위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 잠시 혼자 있고 싶다며 거절했다.
두 사람 사이에 골은 고작 사과 한 번으로 매워질 만한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노력하는 실비아의 모습을 나쁘게 볼 수 없던 나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한밤중이라 시야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넓은 호숫가였지만, 다행히 나는 앨리스 누나를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팍에서 쉴새 없이 흐르는 빛 덕분이었다.
앨리스 누나는 호숫가 근처의 나뭇가지 위에 올라타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늦었네.”
누나는 내게 얼굴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걸었다.
잔잔한 호숫가의 수면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얼굴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으나, 나는 차가운 날씨 탓이겠거니 생각하며 대답했다.
“왜 또 나무 위에 올라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자 앨리스 누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 애쉬, 기억나?”
“뭐, 어릴 때 나무 타다가 백작 부인께 혼났던 거?”
“하하, 말하지 않아도 아네.”
“누나가 나무 위에 올라간 거 보니까 그냥 떠올랐어.”
앨리스 누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분명 마리아 누나가 먼저 나무에 올랐고, 그걸 본 앨리스 누나가 자기도 할 수 있다며 씩씩대며 나무를 올랐었다.
그리고, 산책 도중 그 광경을 목격한 백작 부인께서 경박하다며 크게 혼냈었고, 나는 두 사람이 혼나는 걸 보며 웃다 앨리스 누나에게 얻어맞았었다.
물론 그다음엔 나도 나무 타는 걸 배워 부인께 셋이 같이 혼났다.
“올라와, 나무 타는 법 잊어버린 건 아니지?”
앨리스 누나의 가벼운 도발에 나는 가볍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누나가 앉은 나뭇가지가 제법 굵고 튼튼해 보였기에, 나는 그녀의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말했다.
“웬 나무야, 갑자기.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
“그렇게 말하는 너도 엄청 능숙하게 올라왔잖아.”
“마물 곰한테 쫒겨본 적 있어?”
나는 거대한 곰에게 쫒겼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 숲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있던 일이다.
물론 아직 일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왠지 벌써 까마득한 옛일 처럼 느껴졌다.
“곰에게 쫒겨서 나무를 올랐다고?”
“나도 될 줄 몰랐는데, 몸이 기억하더라.”
“아니, 곰은 나무 잘 타잖아. 너 바보야?”
“덩치가 엄청나게 커서 날렵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도망쳤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 허, 고생했겠네.”
앨리스 누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웃음소리가 멈추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나도, 누나도 한참을 말없이 나무 위에 앉아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조용하네.”
“응?”
“이 숲 말이야. 애쉬.”
“…숲이 원래 조용하지.”
“풀벌레 소리도, 새소리도 안 나는 건 이상한 일이야. 애쉬.”
“… 아, 그렇네.”
확실히 이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땐 밤이 시끄럽다 느껴질 만큼 벌레 우는 소리가 요란했는데, 지금은 입을 다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정적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기 때문이지?”
“그래.”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녹색의 여인이 말해준 마왕의 건재.
몇 시간 전 강가로 직접 나가본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마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다.
마왕이 점점 회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누나를 앨리스 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실비아씨가… 누나에게 사과할 거야.”
“…”
“용서해 줄 수 있어?”
누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하… 걔가 사과한다고?”
“내가 설득했어.”
“하,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대체? 그년이 남의 말을 듣는다니,”
“마왕에게 동료들을 다 잃고, 그 뒤로 쭉 숲에 혼자 살아서 조금 이상해진 거지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예전에도 그다지 친근한 성격은 아니었어.”
“어… 그래?”
솔직히 조금 놀랐다.
뭐 나야 실비아씨가 예전에 어떤 성격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를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 짐작건대 분명 장난기가 많고 털털한 성격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앨리스 누나의 말을 들어보면 실비아는 예전에도 차가운 성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동료에게 보여주는 면과 그 외의 사람에게 보여주는 면이 철저하게 분리되어있거나.
“애쉬.”
“응.”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
“너라면 자신을 고문한 상대가 네 약혼자를 옆구리에 끼고 ‘미안 날 용서해’ 라고 말하면 어떨 것 같아?”
“누나…”
“조금…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그건…”
나는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던 변명을 꾹 삼키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누나는 오직 내 부탁으로 실비아를 향한 분노를 억누르는 중이었다.
한데, 이번엔 그녀에게 용서까지 해달라 요구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짓이긴 했다.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누나 말이 맞아. 내가 미안해.”
“…”
“내가 누나 입장이었다면… 언젠가는 용서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당장 나를 고문하던 상대를 그 당일에 용서하지는 못했을 거야. 그런 요구를 받았다면 더더욱 화가 치밀었을 것이고.”
“… 똑부러지게 말하네.”
“아무래도 누나가 멀쩡하게 회복해서 좀 더 내가 쉽게 생각했던 걸지도 몰라. 그렇다고 안 아픈 건 아닐 텐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정말로 미안해.”
나는 사과의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앨리스 누나는 그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던 누나는 천천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해버리면 내가 뭐라 따지지도 못하잖아.”
“누나가 착해서야.”
“… 하,”
“왜 웃어?”
누나는 작게 키득거리며 말했다.
“착하다는 말, 적어도 몇년간은 못 들어본 것 같아서.”
“…여신교 교황직속 이단심문관이 선한 사람이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그건 애쉬가 내 악명을 못 들어봐서 그래”
“악명?”
악명이라는 말에 나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몇겹을 겹쳐 입었지만, 여전히 새어 나오는 밝은 빛.
귀를 기울이면 누나의 가슴에 달린 기계가 돌아가는 작게 들려왔다.
아까 보았던 그 끔찍한 광경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쉴 새 없이 녹아내리다 아물기를 반복하는 살갗.
그 흉측한 기계는 여전히 저 헌 옷 아래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구태여 캐묻지 않았지만, 분명 누나의 경이로운 회복력이나 신성력은 그 기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 화를 못 참아.”
“음?”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그녀는 자기 가슴팍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 기계를 달고 난 이후부터, 화가 나면 참을 수 없더라.”
“그게…”
“화가 나면 기계가 더 세게 돌아가, 그러면 가슴이 막 뜨거워지고, 머리도 뜨거워지고, 화가 더 많이 나는 거야. 화가 더 많이 나니까 기계도 더욱더 세게 돌고, 더욱더 더 뜨거워지고… 완전 악순환이 따로 없어.”
“…”
“하, 신성력을 뿜어내는 기계니까 선순환이라고 해야 하나.”
누나는 천천히 내 어깨에서 머리를 떼어내며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노한 이단심문관. 그게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너는 모를 거야.”
“…처형 같은 거라도 했어?”
“많이.”
누나의 짧은 대답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그렇지만, 누나 역시 많은 게 변해버렸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서로의 얼굴에 이젠 얼마 남지 않은 어린 시절의 흔적이 이제 그 평화로웠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또다시 잔인하게 통보하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누나는 천천히 감은 눈을 뜨며 말했다.
“근데 참 희한하게도, 지금은 괜찮아.”
“…어?”
“애쉬. 너를 보면 모든 화가 다 풀어져 버려.”
“누나…”
“살아있어줘서. 그게 너무 감사해서… 화가 나야 하는데 도저히 화가 나질 않아.”
잔잔하게 빛나는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해 굴렀다.
나는 저주받은 붉은 눈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원래 누나의 눈 색깔이 뭐였더라.
내 눈이 원래 붉은색이 아니었듯, 그녀의 눈 색 역시 원래 이런 황금빛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리려 해봐도 도저히 떠오르질 않았다.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누나의 흔들리는 시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누나도 똑같이 내 원래 눈동자 색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앨리스 누나의 눈에서 커다란 물방울이 방울지다 천천히 그녀의 뺨 위로 굴러떨어졌다.
“…애쉬.”
“응.”
“우리… 돌아가자…”
“…”
“돌아가자… 예전처럼…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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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요참치캔 님 50 코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