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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4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져 가고 있을 시간이었기에, 우리는 지체 없이 곧장 본관 안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며칠은 머물 예정이었으니 영지 안을 구경하는 것은 내일로 미뤄도 상관없으리라.

        

       레오와 그레이스 남작은 우리와 떨어져 따로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레이스 남작의 뒤를 따라가는 레오가 우리 쪽을 돌아봤을 때의 표정을 보니, 아마 그냥 말로만 하는 대화는 아닌 듯 했다. 원작에서 보았던 그레이스 가의 가풍으로 볼 때, 아마 아버지와 대련이라도 하겠지.

        

       그리고 그레이스 남작의 무력은 게임 내에서도 상위권인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아들이라고 봐줄 사람도 아니고.

        

       ……레오가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인 것도 이해는 간다. 방학이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카데미에서보다 빡센 수련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나라도 저런 표정을 지어 보였을 테니까.

        

       그리고 동시에 조금 암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도 황실로 돌아가면 황제와 면담하게 될 거 아니야?

        

       사실, 레오가 따로 수련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위에 함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카데미야 어차피 남녀가 섞여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귀족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들 사이에 그렇게 끼어있으면 좋은 인상을 받기 힘들었다.

        

       진짜 완전히 마초적인 분위기의 남성 주변으로 여자들이 구애하기 위해 몰린다면 그건 자랑으로 삼을 만하지만, 레오처럼 미소년 인상의 캐릭터가 여자들 사이에서 하하 호호 떠든다면…… 음.

        

       나는 다시 한번 레오를 동정했다. 나와 앨리스가 여기 있는 동안 레오는 그런 모습을 몇 번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클레어가 언제나 말하던 ‘언니’가 황녀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클레어의 기억을 다소 의심했습니다.”

        

       가문의 여성 대표로서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한 남작 부인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차에 각설탕 하나 넣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잠시 차에 설탕을 넣지 않는 것을 고려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그랬다가는 차를 남기게 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각설탕을 집어넣었다. 딱 하나만.

        

       그런 행동에 신경 쓰는 분위기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

        

       남작 부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일단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시간을 끌다가,

        

       “그러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언니.”

        

       내 말에 클레어가 슬프다는 듯 대답했다가 얼른 입을 닫았다.

        

       그리고 남작 부인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남작 부부가 클레어에게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별 같은 것을 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 그보다는 나한테 ‘언니’라고 부른 것을 신경 쓰는 것이리라.

        

       남작 부부가 비교적 진취적인 사람들이라고는 하나 귀족은 귀족이다. 그리고 귀족에게 있어서 ‘언니’라는 표현은 ‘진짜’ 언니가 아닌 사람에게 쓰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황녀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피가 섞이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 별다른 차별을 하지 않는 그레이스가였기에 그들이 보기에는 나도 확실하게 황실의 일원이었다.

        

       “괜찮습니다.”

        

       남작 부인이 뭐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으니까요.”

        

       내 말에 클레어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앨리스는 나와 클레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앨리스는 나에게 과거에 관해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 서로 그러지 말자고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황제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원작에서 앨리스가 클레어의 과거를 모르고 있던 것도 그 탓이었고.

        

       하지만 이렇게 나의 과거에 대해서 대놓고 알고 있는 사람이 앞에 있으니,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캐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렇습니까…….”

        

       남작 부인은 나를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자기 딸의 기억이 맞는 기억이라고, 황녀가 직접 확인해주었다는 것이 조금은 조심스럽겠지.

        

       “클레어와 저는 같은 고아원 출신이었습니다. 클레어를 여기까지 데려다준 사람도 저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함께 데리다 주셨지요.”

        

       “……그렇습니다.”

        

       부인의 목소리에서 탓하는 것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앞에서 말을 하려고 하니 내가 조금 부끄러운 짓을 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애들을 떠맡긴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레이스 가의 성격을 미리 알고서.

        

       게다가 원래는 나도 함께 의탁할 생각이었고.

        

       내가 여기 의탁했다면 어떻게 자랄 수 있었을지, 종종 상상하곤 했다. 클레어가 레오와 함께 누가 서로 오빠니 누나니 하면서 투덕거렸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자랐을까? 아니면 내가 제일 맏이처럼 자랐을까?

        

       하긴, 나에게는 검술 실력은 없으니 그레이스 가에 입양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때 함께 위탁된 아이 중에서 입양된 아이는 클레어 한 명뿐이기도 하고.

        

       그래도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봤겠지만, 아마 반은 갈렸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랬다면 나와 앨리스는 이런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내가 앨리스를 올려다보는 관계가 되었을지 모른다.

        

       선택 하나하나가 미래를 그렇게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내 무표정과 반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남작 부인은 나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아이들 모두 훌륭하게 자랐으니까요. 일부는 저희 가문의 가신으로서 벌써 일하기 시작했고요.”

        

       “그렇습니까?”

        

       음…….

        

       사실, 그 애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클레어에게는 그렇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모양이었지만, 다른 애들한테는…….

        

       솔직히, 얼굴이나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게임에 관한 내용은 열심히 복기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종이에 몇 번이나 베껴 쓰기도 했고, 제도 내에서 내가 다닐 수 있는 한 게임의 배경이 되는 곳을 방문해서 돌아다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기억들은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조금 벅찼으니까.

        

       그래도 그 애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사실,”

        

       남작 부인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조금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들에게는 황녀님의 정체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민감한 사안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퍼져도 상관없지만, 내 진짜 정체에 대한 사실은 퍼지지 않는 쪽이 나을 것이다. 알려진 정보는 적을수록 좋다.

        

       그렇게 따지면 클레어가 나한테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위험하긴 했지만…… 뭐, 클레어는 귀족반 안에서도 조금 별종 취급이었으니까.

        

       게다가 귀족반 애들은 다들 내 뒤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대놓고 엮이려고 하는 애는 별로 없었다. 그러니 클레어 한 명이 나한테 쓰는 호칭이 좀 특이하다고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황녀님께서 원하신다면 다른 아이들도 만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

        

       나는 앨리스와 클레어 쪽을 보았다.

        

       앨리스는 조금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구했다던 아이 중에서 무려 클레어라는 인물이 나왔으니, 다른 애들이 어떤지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클레어의 경우는, 조금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레이스 가에 입양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전에는 그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을 테니까. 나는 잠깐 같이 있었던 것이 전부였지만, 클레어는 분명 어린 시절을 그 아이들과 함께 보냈을 것이다. 말하자면 소꿉친구 같은 관계겠지.

        

       그래서, 나도 조금 흥미가 동했다.

        

       그 애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긴 했지만, 클레어가 그 아이들과 구축한 관계는 어떨지 궁금했으니까.

        

       그레이스 가는 가신들과 서로 터놓고 지내는 분위기였으니, 클레어도 대놓고 말을 놓고 살고 있을지 모르는 게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때 했던 그 일이, 얼마나 의미 있었던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다만.

        

       “하지만 밤이 늦었는데요.”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슬슬 그렇게 할 시간이었다.

        

       평민들이야 하루에 자는 시간이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을 정도로 짧았지만, 귀족은 다르다. 그리고 그레이스 가에서 자기 가신들을 공장 노동하는 평민처럼 굴릴 리도 없었고.

        

       그런데 이 시간에 가문을 쭉 돌겠다고 하면 조금 그렇지 않을까? 게다가 황녀가 돌아다니니 무조건 나와서 인사해야 하잖아.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지만 남작 부인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이 저택 안에서도 일을 배우고 있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오늘은 오후 일을 배우기로 했으니, 찾아가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부인의 말에 앨리스와 클레어가 동시에 내 쪽을 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부인의 친절에 기대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원 감사는 금방 추가하겠습니다!

    =

    호박유리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후원을 제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는 성격이 게을러서 하루정도 쉬어버리면 며칠이고 몇주고 쭉 글쓰는 걸 쉬어버릴 성격이라는 것을 제 스스로도 잘 알고 있어서, 매일같이 글을 써보기로 한 것이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습니다. 연중성녀부터 지금까지 매일 쭉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독자 여러분 덕분입니다. 읽어주실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저도 이렇게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거겠죠. 글이라는 것이 그저 매일 같은 양을 일정하게 쓰다보면 쓰는 속도도 서서히 빨라지는 법이라, 저도 지금처럼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 성장은 모두 독자 여러분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독자 여러분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Ilham Senjaya님, 후원 감사합니다!

    익명으로 후원해주셔서 독자닉네임 기능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오늘도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 쓰는 것이 가끔은 정말 지칠때도 있고, 오늘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넘어갈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만, 매일 같은 시간에 올라올 글을 기다리시는 독자 여러분을 생각하면 오늘도 글을 쓰게 됩니다. 그게 책임감이라는 거겠죠. 제가 1년에 몇 개나 되는 작품을 완결지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독자 여러분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 작품도, 그리고 제가 쓰게 될 다른 작품에서도 독자 여러분과 나란히 걸을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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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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