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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4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때로는 작가 본인조차 헷갈리곤 하는 것이지만….

       

       사실 소설 작가는 이야기꾼과 다를 게 없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인물과 서사를 풀어내는 사람이니까.

       

       글은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매체와도 같은 것. 본질적으로 따지면 말이나 노래, 그림과도 전혀 다를 게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한다.

       

       오래전에 내린 결론을 곱씹으며 내 허벅지에 누운 베니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베니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다음은 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실래요?”

       

       “무, 무슨 짓이야?!”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는 베니.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미궁에서 스펙을 쌓은 고위 모험가인 만큼 근력은 나보다 앞선다.

       

       하지만 내가 단호히 그녀의 이마를 내리누르자, 결국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도 얌전해지는 베니.

       

       “괜찮아요. 이상한 짓 안 할 거니까.”

       

       “그, 그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럼 베니가 이상한 짓만 안 하면 되는 일이네요.”

       

       “어…그렇지?”

       

       “네. 저희가 노팬티 차림이라지만, 아무 일도 없으면 괜찮은 거예요.”

       

       “그게 뭔…읏!”

       

       “속옷 여부는 둘째치고 베니의 드레스는 너무 야한 것 같지만, 아무튼 괜찮아요!”

       

       “나, 나라고 좋아서 이런 옷만 입는 줄 알아?! 이 빈약한 몸매를 봐!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너무 어린애 같단 말이야! 누가 나를 여자로 보겠어!”

       

       “와! 몸매!”

       

       “지금 놀리는 거야?!”

       

       “아뇨 그냥 추임새에요. 하지만 조금 정정할 게 있어서요. 봐봐요 베니.”

       

       “뭐를? …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멈칫한 베니. 그녀의 머리를 꾹꾹 눌러, 내 허벅지에 볼을 비비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어때요? 저나 베니나 외견은 비슷한 나이대인데…베니에겐 제가 남자로 보이지도 않나요?”

       

       “그, 그건….”

       

       “아하?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거군요. 그럼 좀 더 위쪽으로 올라오실래요?”

       

       허벅지의 위쪽. 우린 그걸 사타구니 내지는 고간이라 부른다.

       

       “으힛?!”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기겁하며 바동대는 베니. 그 짧은 팔다리를 차분히 제압하며 작게 속삭였다.

       

       “베니.”

       

       “으응?”

       

       “베니의 몸도 충분히 야해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남자가 그런 말 하면 안 돼!”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나 하는 말은 아니니까요.”

       

       “…정말?”

       

       “네! 기껏해야 엘리, 리디아, 그리고 베니 정도니까요!”

       

       “…….”

       

       거뭇하게 죽은 베니의 안색에 키득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베니가 진정한 것 같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본론이라니. 뭘 말하는 거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기억 안 나요? 이번에는 제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했잖아요?”

       

       “앗.”

       

       진짜로 까먹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베니. 그런 주제에 몸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을 보아 나름의 들을 준비 중인 모양이다.

       

       베니도 들을 생각이 든 모양이니, 슬슬 시작해 보자.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흡혈귀를 사랑하게 된 인간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뭐?”

       

       멍하니 눈만 끔뻑이는 베니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어린아이의 머리맡에서 동화를 읽어주는 것처럼. 혹은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속 풍경처럼.

       

       당시의 내가 느꼈던 편안함을 베니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입을 열었다.

       

       “옛날 옛적. 어느 한 시골 마을에 말만 번지르르한 떠돌이가 찾아왔답니다.”

       

       그렇게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 허구 속의 이야기.

       

       사실 그리 현실성 있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주제에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가장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허풍쟁이가 자신이 반한 흡혈귀 자매를 위해 한껏 늘어놓은 허세를 진실로 바꿔 가는 이야기.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진 게임 속 세상에서 자신을 긍정해 준 하프 엘프를 위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재능 하나 없는 둔재가 강가에서 주운 연인을 위해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한 끝에 기어이 하늘을 베고 산을 갈라내는 이야기.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람과 그런 이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노예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야기.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들을 위해 천 년간 홀로 별을 헤아리는 이야기.

       

       300년의 복수를 끝마치고 자유로워진 스승을 붙잡는 제자와 그런 그를 위해 기꺼이 스스로의 목에 목줄을 거는 스승의 이야기.

       

       모두에게 부정당한 하프 드워프가 자신을 인정해 준 단 한 사람을 위해 기적을 연성해 내는 이야기.

       

       자기 보물에만 집착하던 탐욕스러운 드래곤이 수많은 상실 끝에 어느새 세상 전체를 자신의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이야기.

       

       무너지는 성벽을 보며 신에게 기도하는 성녀와 그런 자신의 사도를 위해 공허한 기도를 이어 나가는 신에게 대신 답해주는 이야기.

       

       세상 모든 것에 배신당한 끝에 세상을 미워하던 이가 최후에는 사랑을 입에 담으며 스러지는 이야기.

       

       아직 준비되지 않은 시련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해피 엔딩을 움켜쥐는 이야기.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 써왔던 이야기들.

       

       다른 이야기도 있고, 같은 이야기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만큼은 하나다.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무거운 현실이 어깨를 짓누르고, 그 무게를 버티는 나는 개미처럼 보잘것없으며, 눈앞의 시련은 태산처럼 드높아도.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사람이라면,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 또한 사람이리라.

       

       설령 당신이 아무리 망가진 사람이라도,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라도 괜찮다.

       

       내가 당신의 구원이고, 당신이 나의 구원이다.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저는 구원 서사가 좋아요.”

       

       “…….”

       

       베니는 샤도우를 자신의 족쇄라 하였다. 미래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영겁토록 과거의 악몽에 얽매이도록 하는 족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샤도우는 베니의 구원이었다. 덕분에 실험실을 탈출할 수 있었고, 광신도에게 복수를 행할 수 있었으며, 연약해진 정신을 다잡아 모험가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마 반대도 마찬가지였겠지. 막 태어나 아무것도 없는 샤도우에게 베니는 훌륭한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테니까.

       

       누가 나설 것도 없이 베니와 샤도우는 서로를 구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가 지금을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렇다면…내가 조금 정도는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베니를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에요.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죠. 애초에 마음이라는 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녀석이니까요.”

       

       “나, 난….”

       

       동요하는 베니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쭈욱 늘어나는 볼살이 말랑말랑하기 그지없네.

       

       “베니. 베니는 어른이 되고 싶은 거죠?”

       

       “……응.”

       

       “그럼 저랑 같이 어른이 되어보실래요?”

       

       “……응?”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하트 문양이 박힌 눈을 크게 뜨는 베니.

       

       머리를 바짝 숙여 베니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서로의 눈동자가 가까워지고, 이마가 맞붙을 것처럼 달라붙는다.

       

       “엘리에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어차피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몰라요.”

       

       “으어어? 흐에?”

       

       인간의 언어를 상실한 베니. 그녀가 어버버거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감상한 뒤에야 머리를 떨어뜨렸다.

       

       “짜잔! 농담이었답니다~”

       

       “…아잇! 뭐 이런 농담을 자꾸 해?!”

       

       “그야 베니가 자꾸 혼난 사람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니까죠. 아까 말했잖아요? 샤도우를 보면 힘들어서 떼어놓고 싶은 마음 자체는 이해한다고요.”

       

       “그전에는 내가 샤도우 덕분에 살아난 주제에 너무 샤도우를 미워하는 거 아니냐고 질책했으면서.”

       

       “그러니까 조금 전의 이야기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었다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베니가 말했잖아요. 마법은 기적이라고. 실제로 베니는 이미 기적을 일으켰어요. 아무리 샤도우가 있었다지만, 기초 마법 하나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꼬마가 어떻게 황혼을 삼키는 자의 간부를 쓰러뜨렸겠어요.”

       

       “……서큐버스의 마력적 재능은 이어받았으니까.”

       

       “아직 갈고 닦지 않은 재능은 별 의미 없다는 거 잘 알고 계시죠?”

       

       “…….”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베니. 그녀의 입가를 살살 문질러 풀어주며 말했다.

       

       “한번 일으킨 거 두 번은 못 하겠어요?”

       

       “지금까지는 안 됐잖아.”

       

       “안 되면 뭐 어때요. 그때는 제가 베니를 어른으로 만들어 주면 그만인데.”

       

       “뭐?”

       

       눈을 크게 뜬 베니를 향해 실실 웃어 보였다.

       

       “아, 이건 진심이에요. 엘리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요.”

       

       “……!”

       

       창백해진 베니의 안색.

       

       물론, 요즘 NTR취향이 생긴 엘리가 그렇게 극단적인 태도로 나올 것 같진 않으나…베니는 이 사실을 모른다.

       

       “베니. 누구에게나 구원은 찾아와요. 어쩌면 제가 베니의 구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아! 살려줘! 엘리 언니에게 맞아 죽고 싶지는 않다고…!”

       

       “흐흐.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몸은 솔직하시네요. 아까부터 은근슬쩍 제 다리에 몸을 비벼오시는 걸 보니 말이에요.”

       

       “드, 들켰어?”

       

       “넹. 진작에 들켰죠.”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해진 지금의 베니가 과연 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요? 아, 참고로 전 유니콘 뿔로 만든 단검이 있어서 그걸로 항상 동정 여부를 체크할 수 있답니다.”

       

       “대체 왜 그런 무기를…!”

       

       이를 가는 와중에도 자꾸 허벅지 위쪽…그러니까 고간 쪽의 냄새를 맡는 베니. 제정신이라면 절대 못 했을 짓이긴 하네.

       

       “자! 선택하세요! 예전에 그러했듯 샤도우와 힘을 합쳐 다시 한번 도전해 보던가, 예비 성자인 제가 주는 구원을 받아들이던가! 어느 쪽이 좋으신가요?”

       

       “선택지가 왜 그 모양이야?!”

       

       울상을 지은 베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알았어! 여기서 나가면 한번 샤도우랑 그때처럼 동화해 볼 테니까! 더는 무서워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해 볼 테니까!”

       

       음음. 바람직한 태도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몸 상태가 너무 안 좋네요…살려주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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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4

EP.114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때로는 작가 본인조차 헷갈리곤 하는 것이지만….


       


       사실 소설 작가는 이야기꾼과 다를 게 없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인물과 서사를 풀어내는 사람이니까.


       


       글은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매체와도 같은 것. 본질적으로 따지면 말이나 노래, 그림과도 전혀 다를 게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한다.


       


       오래전에 내린 결론을 곱씹으며 내 허벅지에 누운 베니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베니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다음은 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실래요?”


       


       “무, 무슨 짓이야?!”


       


       발버둥 치며 일어나려는 베니.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미궁에서 스펙을 쌓은 고위 모험가인 만큼 근력은 나보다 앞선다.


       


       하지만 내가 단호히 그녀의 이마를 내리누르자, 결국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도 얌전해지는 베니.


       


       “괜찮아요. 이상한 짓 안 할 거니까.”


       


       “그, 그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럼 베니가 이상한 짓만 안 하면 되는 일이네요.”


       


       “어…그렇지?”


       


       “네. 저희가 노팬티 차림이라지만, 아무 일도 없으면 괜찮은 거예요.”


       


       “그게 뭔…읏!”


       


       “속옷 여부는 둘째치고 베니의 드레스는 너무 야한 것 같지만, 아무튼 괜찮아요!”


       


       “나, 나라고 좋아서 이런 옷만 입는 줄 알아?! 이 빈약한 몸매를 봐!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너무 어린애 같단 말이야! 누가 나를 여자로 보겠어!”


       


       “와! 몸매!”


       


       “지금 놀리는 거야?!”


       


       “아뇨 그냥 추임새에요. 하지만 조금 정정할 게 있어서요. 봐봐요 베니.”


       


       “뭐를? …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멈칫한 베니. 그녀의 머리를 꾹꾹 눌러, 내 허벅지에 볼을 비비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어때요? 저나 베니나 외견은 비슷한 나이대인데…베니에겐 제가 남자로 보이지도 않나요?”


       


       “그, 그건….”


       


       “아하?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거군요. 그럼 좀 더 위쪽으로 올라오실래요?”


       


       허벅지의 위쪽. 우린 그걸 사타구니 내지는 고간이라 부른다.


       


       “으힛?!”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기겁하며 바동대는 베니. 그 짧은 팔다리를 차분히 제압하며 작게 속삭였다.


       


       “베니.”


       


       “으응?”


       


       “베니의 몸도 충분히 야해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남자가 그런 말 하면 안 돼!”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나 하는 말은 아니니까요.”


       


       “…정말?”


       


       “네! 기껏해야 엘리, 리디아, 그리고 베니 정도니까요!”


       


       “…….”


       


       거뭇하게 죽은 베니의 안색에 키득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베니가 진정한 것 같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본론이라니. 뭘 말하는 거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기억 안 나요? 이번에는 제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했잖아요?”


       


       “앗.”


       


       진짜로 까먹고 있었다는 것처럼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베니. 그런 주제에 몸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을 보아 나름의 들을 준비 중인 모양이다.


       


       베니도 들을 생각이 든 모양이니, 슬슬 시작해 보자.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흡혈귀를 사랑하게 된 인간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뭐?”


       


       멍하니 눈만 끔뻑이는 베니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어린아이의 머리맡에서 동화를 읽어주는 것처럼. 혹은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속 풍경처럼.


       


       당시의 내가 느꼈던 편안함을 베니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입을 열었다.


       


       “옛날 옛적. 어느 한 시골 마을에 말만 번지르르한 떠돌이가 찾아왔답니다.”


       


       그렇게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 허구 속의 이야기.


       


       사실 그리 현실성 있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주제에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가장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허풍쟁이가 자신이 반한 흡혈귀 자매를 위해 한껏 늘어놓은 허세를 진실로 바꿔 가는 이야기.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진 게임 속 세상에서 자신을 긍정해 준 하프 엘프를 위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재능 하나 없는 둔재가 강가에서 주운 연인을 위해 몇 번이고 죽음을 반복한 끝에 기어이 하늘을 베고 산을 갈라내는 이야기.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람과 그런 이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노예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야기.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들을 위해 천 년간 홀로 별을 헤아리는 이야기.


       


       300년의 복수를 끝마치고 자유로워진 스승을 붙잡는 제자와 그런 그를 위해 기꺼이 스스로의 목에 목줄을 거는 스승의 이야기.


       


       모두에게 부정당한 하프 드워프가 자신을 인정해 준 단 한 사람을 위해 기적을 연성해 내는 이야기.


       


       자기 보물에만 집착하던 탐욕스러운 드래곤이 수많은 상실 끝에 어느새 세상 전체를 자신의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이야기.


       


       무너지는 성벽을 보며 신에게 기도하는 성녀와 그런 자신의 사도를 위해 공허한 기도를 이어 나가는 신에게 대신 답해주는 이야기.


       


       세상 모든 것에 배신당한 끝에 세상을 미워하던 이가 최후에는 사랑을 입에 담으며 스러지는 이야기.


       


       아직 준비되지 않은 시련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해피 엔딩을 움켜쥐는 이야기.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 써왔던 이야기들.


       


       다른 이야기도 있고, 같은 이야기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만큼은 하나다.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무거운 현실이 어깨를 짓누르고, 그 무게를 버티는 나는 개미처럼 보잘것없으며, 눈앞의 시련은 태산처럼 드높아도.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사람이라면,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 또한 사람이리라.


       


       설령 당신이 아무리 망가진 사람이라도,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라도 괜찮다.


       


       내가 당신의 구원이고, 당신이 나의 구원이다.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저는 구원 서사가 좋아요.”


       


       “…….”


       


       베니는 샤도우를 자신의 족쇄라 하였다. 미래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영겁토록 과거의 악몽에 얽매이도록 하는 족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샤도우는 베니의 구원이었다. 덕분에 실험실을 탈출할 수 있었고, 광신도에게 복수를 행할 수 있었으며, 연약해진 정신을 다잡아 모험가로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마 반대도 마찬가지였겠지. 막 태어나 아무것도 없는 샤도우에게 베니는 훌륭한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테니까.


       


       누가 나설 것도 없이 베니와 샤도우는 서로를 구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가 지금을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렇다면…내가 조금 정도는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베니를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에요.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죠. 애초에 마음이라는 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녀석이니까요.”


       


       “나, 난….”


       


       동요하는 베니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쭈욱 늘어나는 볼살이 말랑말랑하기 그지없네.


       


       “베니. 베니는 어른이 되고 싶은 거죠?”


       


       “……응.”


       


       “그럼 저랑 같이 어른이 되어보실래요?”


       


       “……응?”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하트 문양이 박힌 눈을 크게 뜨는 베니.


       


       머리를 바짝 숙여 베니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서로의 눈동자가 가까워지고, 이마가 맞붙을 것처럼 달라붙는다.


       


       “엘리에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어차피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몰라요.”


       


       “으어어? 흐에?”


       


       인간의 언어를 상실한 베니. 그녀가 어버버거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감상한 뒤에야 머리를 떨어뜨렸다.


       


       “짜잔! 농담이었답니다~”


       


       “…아잇! 뭐 이런 농담을 자꾸 해?!”


       


       “그야 베니가 자꾸 혼난 사람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니까죠. 아까 말했잖아요? 샤도우를 보면 힘들어서 떼어놓고 싶은 마음 자체는 이해한다고요.”


       


       “그전에는 내가 샤도우 덕분에 살아난 주제에 너무 샤도우를 미워하는 거 아니냐고 질책했으면서.”


       


       “그러니까 조금 전의 이야기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었다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베니가 말했잖아요. 마법은 기적이라고. 실제로 베니는 이미 기적을 일으켰어요. 아무리 샤도우가 있었다지만, 기초 마법 하나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꼬마가 어떻게 황혼을 삼키는 자의 간부를 쓰러뜨렸겠어요.”


       


       “……서큐버스의 마력적 재능은 이어받았으니까.”


       


       “아직 갈고 닦지 않은 재능은 별 의미 없다는 거 잘 알고 계시죠?”


       


       “…….”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베니. 그녀의 입가를 살살 문질러 풀어주며 말했다.


       


       “한번 일으킨 거 두 번은 못 하겠어요?”


       


       “지금까지는 안 됐잖아.”


       


       “안 되면 뭐 어때요. 그때는 제가 베니를 어른으로 만들어 주면 그만인데.”


       


       “뭐?”


       


       눈을 크게 뜬 베니를 향해 실실 웃어 보였다.


       


       “아, 이건 진심이에요. 엘리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요.”


       


       “……!”


       


       창백해진 베니의 안색.


       


       물론, 요즘 NTR취향이 생긴 엘리가 그렇게 극단적인 태도로 나올 것 같진 않으나…베니는 이 사실을 모른다.


       


       “베니. 누구에게나 구원은 찾아와요. 어쩌면 제가 베니의 구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아! 살려줘! 엘리 언니에게 맞아 죽고 싶지는 않다고…!”


       


       “흐흐.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몸은 솔직하시네요. 아까부터 은근슬쩍 제 다리에 몸을 비벼오시는 걸 보니 말이에요.”


       


       “드, 들켰어?”


       


       “넹. 진작에 들켰죠.”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해진 지금의 베니가 과연 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요? 아, 참고로 전 유니콘 뿔로 만든 단검이 있어서 그걸로 항상 동정 여부를 체크할 수 있답니다.”


       


       “대체 왜 그런 무기를…!”


       


       이를 가는 와중에도 자꾸 허벅지 위쪽…그러니까 고간 쪽의 냄새를 맡는 베니. 제정신이라면 절대 못 했을 짓이긴 하네.


       


       “자! 선택하세요! 예전에 그러했듯 샤도우와 힘을 합쳐 다시 한번 도전해 보던가, 예비 성자인 제가 주는 구원을 받아들이던가! 어느 쪽이 좋으신가요?”


       


       “선택지가 왜 그 모양이야?!”


       


       울상을 지은 베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알았어! 여기서 나가면 한번 샤도우랑 그때처럼 동화해 볼 테니까! 더는 무서워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해 볼 테니까!”


       


       음음. 바람직한 태도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몸 상태가 너무 안 좋네요...살려주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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