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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4

       “나, 나 왔어.”

       

        저녁이 되자 시엔이 돌아왔다. 6시 정각이었다.

        릴리벨은 시엔이 평소 공식적인 업무가 끝나고도 운동이나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한밤중에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했었는데, 예상보다 빠른 퇴근이었다.

        오늘은 내근 업무만 있었는지 구두를 신고 현관 앞에서 쭈뼛거리는 그녀를 팔 벌려 맞이했다.

       

        “어서와요, 시엔.”

        “오, 올 때도 껴안는 거야?”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아니면 제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아니!! 매, 매일 이렇게 했어……!”

       

        나사가 덜 조여진 것처럼 작게 입을 벌린 채 마구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였다.

        저러다 침이라도 한 바가지 떨어지겠군.

        ‘학파 규칙’에 따르면 남녀가 좁은 방에서 단둘이 있을 때 한쪽이 /ㅇ@$ㅐㄱ『2ㅊ5!ㅔ를 흘릴 경우 입으로 직접 받아줘야 했기에 큰일이었다.

       

        잠깐, 이건 같은 학파끼리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니었나?

        마탑에는 여러 학파가 있고 마법사들은 각자 특정 학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무슨 학파였더라?

        해제, 해부, 해돋이 해장국…… 순간 익숙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부유했으나 끝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뭐, 이것도 시엔과 함께 생활하다보면 자연스레 떠오르겠지.

        그녀는 정말로 헌신적인 여자친구처럼 나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열심이었다.

       

        “존댓말은 안 써도 돼, 아침엔 바빠서 말 못 했지만 너는 지금까지도 계속 나한테 반말 했으니까.”

        “정말인가요? 하지만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위계질서가 강하고 특히 시엔은 굉장히 존경받는 마법사잖아요.”

        “사, 상관없어. 오히려 원래 너는 살짝 고압적이었거든. 매번 어조도 퉁명스럽고 지금처럼 가까이 오면 눈도 살짝 내리깔면서…….”

        “그러면…… 알겠어, 시엔.”

        “으, 읏!”

       

        갑자기 현관에서 주저앉아버릴 뻔한 그녀는 내 부축을 받고 겨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루종일 밖에서 일하느라 힘들었나보군.

        현관의 신발을 정리하자 구두에서 따끈따끈한 온기가 올라왔다.

        그 체취를 따라 이동하니 의자에 앉아 스타킹을 벗어던진 시엔의 발이 보였다.

       

        꼼지락거리는 하얀 발가락.

        꽁꽁 싸매고 있던 허물에서 겨우 해방되어 촉촉함을 머금고 있는 발바닥.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한쪽 무릎을 세운 채로, 평소에 잘 신지 않는지 굽 낮은 구두의 탑 라인을 따라 빨갛게 선이 따진 복숭아뼈를 보며, 마치 스트레칭하듯 한 바퀴 돌리자 피어나는 아름다운 원의 궤적.

       

        삶, 예술, 생명의 탄생, 우주의 신비, 세상의 모든 지식.

       

        전지(全知).

       

        피냄새를 맡은 식인고기처럼 온 신경이 그곳으로 향한 내가 나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인 찰나, 시엔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참, 오기 전에 릴리벨한테 보고 받았어. 오후에 관사 밖으로 나갔었다고?”

        “응? 익숙한 장소가 있나 해서 10층까지 내려갔다 왔는데 특별한 건 없더라고.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말을 걸어서 피곤하기만 했어.”

        “번호따기 30회, 식사 권유 7회, 파티 초대 16회…… 고작 반나절 만에? 심지어 우리 부서 놈들도 있네, 이것들이 진짜……!”

        “시엔?”

        “이, 이대로면 진짜…… 혹시 널 아는 것 같은 이상한 여자가 달라붙어도 전부 무시해야 된다? 죄다 이상한 장사치들이야.”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잘해 줬는데?”

        “호의 속에 어떤 추잡한 목적이 있을지도 몰라. 무, 무엇보다 너는 지금 내꺼니까 한눈 파는 건 금지잖아……!”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이 맞다면 맞는 거겠지.

       

        나는 지금 그녀의 애인이니까.

        그런데 지금이라는 말은 예전에는 아니었다는 뜻 아닌가?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시엔이 침대에 걸터앉은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게 먼저였다.

       

        “클락, 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우, 우린 엄연히 연인 사이거든!?”

        “아니, 알고 있는데…….”

        “몰라!! 내 말은 네 기억에는 없는, 이, 이런 거 저런 거까지 다 했다는 뜻이거든!!?”

        “구체적으로 어떤 걸?”

       

        순수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물음에 작은 맹수를 연상케 하는 연녹색 동공이 깜빡이며 떨려왔다.

        어깨를 짚은 손도 좀처럼 갈피를 찾지 못했다.

        반쯤 열린 입은 마치 구현할 수 있는 데이터가 없어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뻐끔거리기만 반복했다.

       

        “어, 엄청난 거!”

        “엄청난?”

        “그래! 막, 막 벼, 변태 같고 절대 밖에서 남들한테는 말 못 하는, 그런 짓도 했다고!!”

        “내가?”

       

        그러다 겨우 짜낸 말이 이거였다.

       

        “뭐, 그렇다 쳐도 그걸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잖아? 엄밀히 말해 지금 나는 네가 5년 전에 처음 봤을 무렵이랑 다를 바 없는 사람인데…….”

        “그건 오히려 색달라서 좋을지도…….”

        “…….”

        “어, 어쨌든 이것도 어디까지나 네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니까!”

       

        이미 자신도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마구 고개를 끄덕이는 시엔.

        긴장한 듯 무릎 위에 얹은 주먹이 꼭하고 쥐어질 때마다 발가락도 같이 오므라드는 게 제법 귀여웠다.

       

        “난 잘 모르니까 마음대로 만져도 돼……! 어디든 네 마음대로…….”

       

        어디든. 마음대로.

       

        “그럼 다리 좀 들어줄래?”

        “응?”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

       

        시엔은 4층에서 근무 중이었다.

        정보부는 마탑 전체를 아우르는 정보기관인 만큼 고행의 층에 있는 여느 학파의 건물과 비교도 안 되는 크기를 자랑했다.

        마법으로 확장한 사무실 곳곳에서 쉴 새 없이 수정구가 반짝였다.

        하루 종일 이 넓은 곳을 걷다 보면 평소 외부에서 활동을 많이 하는 그녀라도 발에 땀이 차기 마련이었다.

       

        냄새 나면 어떡하지.

        오늘도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클락을 떠올리며 시계를 확인한 시엔은 서류 업무를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그럼 실프 공략대 일은 이 보고서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쪽에도 그렇게 전해둘까요?”

        “이걸로 행정 명령도 제대로 이행 처리 되었다고 해.”

        “알겠습니다 과장님. 참, 점성학파 쪽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다음 정보 2과의 활동과 관련된 사안인가요?”

        “그렇지 뭐. 일손 필요해?”

       

        조사과의 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안판을 가리켰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마법사들이 이따금 눈길을 주는 벽 한쪽에는 마탑의 주요 현안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최근 학기가 다시 시작되며 정보부에 접수되는 사건사고가 많이 생겨났다.

        그 추이가 최근 몇년 동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파르게 증가하는 중이어서 어느 부서를 막론하고 모두가 바빠 보였다.

       

        “서로 다른 학파 사이에 발생한 상해사고가 18건, 구내식당의 위생 신고가 4건, 메릴랜드 관의 얼음 정수기 코드를 뽑아놓던 범인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보고도 들어오고 있어요.”

        “그런 사소한 건 적당히 치안부에 넘겨. 원래 걔네들 업무잖아.”

        “범인이 지난 반 년간 순찰조에 검거당한 적이 없어서 저희 쪽으로 이첩되었나 봐요. 맞다, 그러고 보니 같은 기숙사의 사감의 실종신고도 접수되었어요.”

        “이, 이건 지워도 돼!”

        “네? 벌써 해결하셨나요?”

       

        순식간에 손가락에 마력을 담아 현안판을 그어버린 시엔이었다.

        다행히 릭은 별다른 의심 없이 다른 사안들을 새롭게 적어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보시다시피 전체적으로 원인미상의 소란이나 폭력사태가 증가하고 있어요. 학파나 가문의 원한관계와도 거리가 먼 특이한 케이스에요.”

        “갑자기 늘어난 원인이 뭔데?”

        “아직까지 정확하게 파악된 건 아니지만 한 가지 떠오르는 주장이 있어요. 일련의 사태의 시발점이 갤러리의 관리자가 모습을 감춘 시기와 일치한다는 거에요.”

       

        갤러리?

        시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갤러리의 관리자는 정보부를 비롯한 모든 행정부의 최우선 감시 타겟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헌데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유로 어째서 마법사들이 싸움박질을 벌인단 말인가?

       

        “그게 무슨 상관인데?”

        “과장님은 잘 이해 못 하실 텐데…….”

        “내가 지금 이 건물에서 가장 높이 등반한 사람인데 이해 못 하는 게 어딨어.”

        “요컨대 갤러리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마법사에게 관리자가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딴 녀석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자 주위 파티션의 직원들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릭은 ‘거 봐, 이해 못 할 거라니까-.’라는 표정으로 살짝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갤러리 운영진은 엄연히 수배범이야. 마탑의 행정을 어지럽히는 범죄자라고.”

        “크흠, 그렇긴 하지만 일종의 친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이 일상의 해방구로 이용하는 갤러리가 어지럽혀지지 않도록 중재하는 존재이니 말이죠.”

        “…….”

        “모니터링 업무를 맡은 특파원의 조사에 따르면 갤러리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분탕’들이 본격적으로 설치기 시작하면서 관리자에 대한 지지율이 급등한 상태라고 합니다.”

        “흥, 웃기지도 않네.”

       

        결국 주딱의 부재로 마탑의 마법사들 중 일부가 극심한 우울 증세에 빠져 여러 사건사고가 발생한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릭의 책상 위에도 은발 미소녀 모양의 인형 같은 게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커피나 각성제 따위가 굴러다녔다.

        그자가 자신의 파티션 크기를 축소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 건지.

        과거 정보부의 입지를 대폭 축소시켰던 갤러리 관리자에 대해 떠올릴수록 열불만 나는 시엔이었다.

       

        “잘 들어, 무릇 신비를 추구하는 마법사라면 스스로의 약한 점을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돼.”

        “…….”

        “그 시간에 차라리 심신의 수양이나 마법 연습이나 하란 말이야. 바로 아래 수련의 층에 학파 라운지가 널렸는데 왜 하루종일 위치노트만 붙잡고 있어?”

        “시정하겠습니다…….”

       

        당장은 더 시급한 일 때문에 그를 잡을 방도가 없었으니 주의를 주는 선에서 넘어갔다.

       

        “조사과장님께 훈련장 이용 시간을 늘려달라고 건의할 테니까 퇴근 후에 운동이라도 하도록 해.”

        “구, 굳이 그러실 필요는!”

        “그 관리자란 놈의 눈과 귀가 정보부까지 파고들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라면 하루도 거르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본전도 못 건진 릭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문득, 그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과장님 그 발은 어떻게 된 건가요?”

        “응?”

       

        시엔은 바짓단 밑으로 드러난 발목 양쪽에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멀쩡했던 부위가 유독 빨갛게 달아올라 눈에 띄었다.

        임무에 나설 때는 불편한 구두 같은 건 신지 않는 그녀였기에 상처가 난 모양.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기다리던 릭은 시엔의 반응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건 그냥…… 응, 물렸어.”

        “네? 모기 같은 거에요?”

        “좀 더 집요한 거…….”

        “…….”

        “가, 갈게! 수련은 꼭 해!”

       

        시엔은 얼굴을 복사뼈만큼이나 빨갛게 물들인 채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크흠.”

       

        그 모습을 본 그는 책상 위에 있던 ‘초전도체은발미소녀피규어’를 서랍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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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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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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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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