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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4

       기절한 상태로 눈밭을 나뒹구는 공작과 내 앞에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에덴.

         

       그들을 보니 픽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착하게 살았어야지.’

         

       공작과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에덴의 옷깃을 잡아 안쪽으로 옮겼다. 괜히 무리에서 빠진 마수한테 당하면 안 되잖나.

         

       그러던 그 순간.

         

       “진형을 갖추어라!”

         

       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지원군이 도착했다. 얼마나 걸렸지? 한 10분? 15분? 최대한 빠르게 온 거긴 하네.

         

       ‘훑어보니까 병사 없이 기사단과 고위 마법사로 이루어진 정예들이고.’

         

       저 멀리서부터 내 위험성을 깨달은 듯하다.

         

       “우리의 목적은 공작님과 소 공작님의 구출이다! 다들 명심하도록!”

         

       토벌을 입에 담지 않는 걸 보니 주제는 알아서 다행이다. 무작정 덤벼오면 다 죽여야 하니 골치 아팠는데.

         

       휙! 털썩. 나는 양손에 들린 공작과 에덴을 기사단 쪽으로 던졌다.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 나를 바라보는 기사단과 마법사. 그들의 시선에는 의문과 미지. 그리고 공포가 서려 있었다.

         

       ‘할 일 끝났으니 나는 간다.’

         

       철컹…. 등을 돌리자 갑옷에서 음산한 쇳소리가 들려온다. 초월 마법사가 뭔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마는, 이거 내가 들어도 좀 불쾌하다.

         

       “…공격!”

         

       내가 등을 보이자 바로 공격을 하는 기사단과 마법사들. 마력의 흐름이 거세게 도는 걸 보니 단체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

         

       ‘멍청한 놈들.’

         

       그냥 보내주면 될 걸 일을 크게 만드네. 나는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검을 뽑는 동시에 기사단 쪽으로 등을 돌렸다. 

         

       “…!!”

         

       나와 눈이 마주친 기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마법사를 보호하라!”

         

       척. 척. 그래도 할 일은 하는 기사들. 마법사를 지키는 포진을 잡았다.

         

       ‘가볍게 검 몇 번만 휘둘러주면 포기하겠지.’

         

       우웅…! 혈류가 세차게 돌며 새하얀 빛의 오러가 전신을 감싸며 타오른다. 나는 검날을 세운 채 높게 들었다.

         

       “온다!”

         

       콰과과과과──!

         

       한 번의 검격에 눈사태라도 일어난 듯 폭풍이 일었다. 기사단이 방패를 세우고 진형을 만든다. 죽진 않겠다마는, 저거로는 못 막을 텐데.

         

       콰앙──!

         

       “끄아악!”

       “으아아악!”

         

       기사단의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들려오며 진형이 단번에 무너졌다. 뒤에 있는 마법사들도 폭풍의 영향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마력의 흐름 끊겼습니다!”

       “마법을 다시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법사들을 지켜줄 기사단 대부분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 힘 조절은 했으니 중상은 아닐 거다.

         

       나는 다시 등을 돌리곤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공격이 날아오지 않았다. 무엇이 맞는 판단인지 깨달은 거겠지.

         

       ‘이대로 중앙 본대로 간다.’

         

       공작과 에덴이 빠진 중앙 본대. 현재는 공작가의 기사단장이 지휘하고 있을 터.

         

       ‘저 멀리서 오러가 느껴지는 걸 보니 케일도 잘 하고 있고.’

         

       남은 건 데카르트 전선을 후퇴시키는 것뿐이다.

         

       ‘솔직히 기사들도 아니꼽지만…….’

         

       공작과 에덴이면 모를까, 기사들까지 다 죽이는 건 좀 그렇다. 그냥 일자리만 뺏으면 되지.

         

       ‘슬슬 가자.’

         

       파박! 오러를 담은 발길질로 앞으로 쇄도하니 눈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대로 중앙 본대까지 간다.

         

       걸음을 좀 옮기니 무리에서 빠져나온 마수들이 달려든다. 꽤 많은 숫자였지만, 검 한 번 휘두르자 폭음이 발생하며 단번에 정리됐다.

         

       그렇게 다리를 얼마나 움직였을까. 저 멀리서 중앙 본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착실하게 방어만 하고 있군.’

         

       방패병이 전열을 맡고, 뒤에서 작은 틈새로 창을 찌른다. 멀리서는 화살과 마법이 쏟아져 나온다.

         

       ─교대!

       ─다시 옵니다!

         

       더 가까워지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마수 특유의 비릿하고 역겨운 피 냄새가 갑옷 틈새로 들어와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게임에선 아무 생각 안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진짜 끔찍하긴 하네.’

         

       어제까지만 해도 새하얗던 눈밭은 마수의 사체들이 둥둥 떠다니는 피바다로 바뀌었다.

         

       ‘뭐,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니 넘어가고.’

         

       나는 검을 높게 들어 오러를 흘렸다.

         

       우우웅─!

         

       검 끝이 진동하며 부르르 떨린다. 오러가 담긴 검격을 그대로 휘두른다.

         

       콰과과과──!

         

       쓰나미처럼 몰려가는 오러의 폭풍이 쏘아져 나간다. 목표는 방어선 앞의 마수들.

         

       콰앙─!

         

       내 검격이 지나가자 마치 선을 그은 것처럼 대지에 선이 그였다. 근처 마수들은 전부 소멸되어 사체도 남기지 않았다.

         

       “뭐, 뭐야!”

       “진 바렌베르크가 벌써 온 것인가!”

       “공작님이 안 보이시는데?”

         

       상황을 읽지 못하는 기사들.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사박. 철컹…. 사박. 철컹….

         

       공황으로 인한 정적에 서리가 밟히는 소리와 음산한 쇳소리가 퍼진다. 기사단은 일제히 이쪽을 바라봤다.

         

       “저, 저기…!”

       “새까만 갑옷?”

       “단장님! 이상한 놈이 하나 있습니다!”

         

       드디어 이쪽을 바라봐주는구나. 나는 검날을 세우곤 살기를 흘렸다.

         

       “…!”

       “…!”

         

       단체로 짜 맞춘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바짝 몸이 경직된다.

         

       “다, 단장님!”

       “저, 저건…!”

         

       기사들 뒤에서 보이는 익숙한 얼굴. 데카르트 공작가의 기사단장. 그 옆에는 부단장까지.

         

       ‘프란체를 깔보고 무시했던 것들.’

         

       명망 높은 공작가의 기사이자 귀족이면서도 기사도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들. 저들을 보니 빠득 이가 갈렸다.

         

       ‘참자. 쟤네들을 죽여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정한 계획과 목표에 집중하자. 에덴과 공작만 빈사로 만들면 됐다.

         

       “한기가 서린 살기, 칠흑의 갑주…. 저건 설마…!”

         

       기사단장이 내 존재를 눈치챈 그 순간.

         

       “단장님! 공작님과 소 공작님이…!”

       “뭐?!”

         

       소식이 전해졌나 보다.

         

       “젠장, 다들 방어선을 버려라! 후퇴하며 황실과 페르시아 공작가에 지원 요청을 불러라! 비상사태! 혹한의 망령이다!”

         

       기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구를 놓고 도망치는 기사들. 방어선이 단번에 무너졌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수가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고.’

         

       조금 놀아도 괜찮겠지.

         

       콰앙─! 진각을 밟자 눈이 사방으로 퍼지며 지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흡!”

         

       검에 오러를 실어 휘두른다. 힘 조절은 했다. 적당히 주변만 파괴해야지.

         

       콰과과광─!

         

       검격에 산산이 부서지는 바리케이드. 피해를 받은 기사는 없다.

         

       ‘좋아, 그대로 후퇴해라.’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기사들의 뒷모습에 두려움이 깃들어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끝이겠군.’

         

       나는 검을 몇 번 더 휘둘렀다.

         

       중앙 본대가 지키는 방어선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그저 굉음만이 들려왔다.

         

         

       * * *

         

         

       데카르트 공작가가 맡은 전선의 최후방.

         

       프란체는 새하얀 막사 안에서 홍차를 음미하고 있다. 그 옆에는 케일로 위장한 어쌔신과 라데아가 있었다.

         

       “소식이 늦네요.”

       “최후방이니 전달이 늦겠지.”

         

       지루함에 다리를 동동거리며 입술을 삐죽이는 라데아. 프란체는 조용히 마법서만 읽고 있다.

         

       “케일 아저씨는 잘 하고 있을까요?”

       “혼자 잘 하고 있을 거야.”

         

       케일은 현재 개별 행동으로 측면부터 시작해 마수들을 토벌하는 도중이다.

         

       본대에서 기사단과 마법사를 붙여준다고 하던 걸 케일은 극구 거부했다.

         

       진과 케일의 오러 해방을 직접 본 사람은 없어 구별해서 알아볼 가능성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 주의하겠다는 의견이었다.

         

       “근데 진 오빠도 좀 무서운 사람이네요.”

         

       순간 라데아의 입에서 나온 ‘진 오빠’라는 말에 프란체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아니야. 진은 나밖에 없어.’

         

       이번 일이 끝나고 가주가 되면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 인제 와서 다른 여자가 진을 어찌 부르든,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프란체는 고개를 휘젓곤 안경을 벗었다.

         

       “뭐 때문에?”

       “계획이요. 처음 봤을 땐 이렇게 치밀한 사람인 줄 몰랐거든요.”

         

       아 그건가. 그렇긴 하지. 진은 항상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계획을 짜두고, 계단을 올라가듯이 천천히 진행한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의 일이 다 성공한 거겠지.’

         

       수상한 점도 많긴 하지만.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진은 그런 사람이었단다. 내 명령을 착실하게 이행하고, 내 삶을 바꿔준 사람이지.”

         

       라데아는 오, 하면서 “그런가요?”하고 대답했다.

         

       “그래. 진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는커녕 이 세상에 없었을 거란다.”

         

       진에게는 항상 감사함이 마음속에 자리했다. 그 감사함은 점차 호의로 성장하였고, 결국 그 호의는 사랑이라는 꽃으로 피어났다.

       

       ‘오직 나만을 위한 사람.’

         

       그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만을 위해 움직이고, 자신만을 바라본다. 목표가 있다면, 꿈이 있다면 그것을 이뤄준다.

         

       진은 프란체의 유일무이한 최초의 아군이자 구세주였고, 결국엔 진심으로 연모하는 사람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일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이번 겨울의 수확제와 데카르트 공작위 계승. 그 후에는 바렌베르크 해방과 동시에 혼인까지. 기대되는 일이 산더미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응?”

       “진 오빠 얘기하실 때마다 미소를 지으세요.”

         

       그럴 수밖에. 본래 사람이란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웃음은 자연스럽게 입술에 번지는 법이다.

         

       “너도 언젠가 깨달을 거야. 내가 왜 웃음을 짓는지.”

         

       나이는 라데아가 더 많지만, 왠지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프란체였다.

         

       “나이는 제가 더 많은데 항상 배우는 거 같네요.”

       

       라데아는 프란체가 도저히 20살로 보이지 않았다. 진에 관련된 거면 항상 아이처럼 돌변하지만, 평소에는 기품있고 겸손하니까.

         

       그때였다.

         

       펄럭! 별안간 천막의 입구가 갈라지더니 기사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공녀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니?”

         

       두려움이 가득해 얼굴이 창백해진 기사와는 달리 태연한 프란체였다.

         

       “당장 도망치셔야 합니다! 최전방 본대의 전선이 무너졌습니다!”

         

       프란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작이구나.’

         

       역시나 진은 일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피해는 어찌 되니?”

       “인명 피해는 크게 없습니다만…….”

       “없습니다만?”

         

       기사는 떨리는 입술을 꽉 물며 당장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말을 잡았다.

         

       “설화의 마수, 혹한의 망령이 나왔습니다…!”

         

       혹한의 망령. 분명 진이 연기한다고 했던 마수의 이름이다.

         

       ‘그 설화 속의 마수가 진짜 등장할 리가 없잖아? 멍청한 것들.’

         

       혹한의 망령은 북부에 존재하는 마수들의 왕이다. 직접 북쪽의 끝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는 마수라고 진에게 들었다.

         

       턱. 프란체는 픽 웃으며 마법서를 덮었다.

         

       “지금부터 데카르트의 전선은 내가 지휘할 거야.”

         

       기사는 “예…?”하면서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못 들었니? 내가 부대를 지휘하겠다고.”

       “어, 저 그게…….”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온 기사의 목소리. 프란체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굽어봤다.

         

       “설마 나를 단순한 온실 속의 화초로 보는 건 아니겠지?”

         

       사아악- 별안간 주변이 서늘해지더니 프란체의 손 위에 새까만 마력이 춤을 췄다.

         

       “내가 해결할 테니 그리 알고 있으렴.”

         

       프란체의 완고함에 기사는 탄식을 숨기며 “예.”하고 대답했다.

         

       서둘러 천막을 나가는 기사. 이제 프란체가 움직일 시간이다.

         

       “가자, 라데아. 케일이 곧 합류할 거야.”

       “네. 그런데 세 명인데 괜찮을까요?”

       “세 명이 아니야.”

       “네…?”

       “보면 알 거야.”

         

       의기양양한 얼굴로 천막을 나서는 프란체. 기사단과 마법사들의 상태는 그야말로 혼비백산이었다.

         

       “연설부터 시작해야겠구나.”

         

       그간 진에게 배운 것들이 있다.

         

       연출을 만들어줄 상황은 완벽하다. 남은 건 주연이 될 배우가 무대를 완성시키는 것뿐.

         

       프란체는 씩 웃으며 소리쳤다.

         

       “다들 주목!”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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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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