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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4

        

         진한 눈썹과 그와 대비되게 서글서글한 인상이 눈 앞을 떠돈다.

         

         굳이 표현하자면… 해괴한 머리 모양을 자랑하는 건강 미인이라고 해야 하나? 잔근육과 살결에 흐르는 윤기는 물론, 전체적으로 감도는 활기가 스스로를 마리나라 지칭한 여성의 성격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마리나 세라노… 일단 원작 인물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여기서 자고 일어나는 하루하루가 흐를 때마다 기억이 조금씩 마모되어가긴 해도 아직 그들을 잊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또 내가 아나스타샤가 되고 나서 따로 만난 적이 있냐 하기엔 이렇게 특징적인 사람은 마주친 사실이 없는 것 같은데.

         

         “따로 믿을 구석도 없으면서 저렇게 몸만 달랑 온 인간들에 비하면 역시 아가씨나 저기 있는 도련님처럼 뭐 하나라도 더 준비해오는 게 낫지! 안 그래?”

         

         “…….”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로를 한 번 쭉 훑어본 그녀가 엄지손가락을 까딱여 자신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과연 거기엔 자기 키만한 캐리어 백 뒤에 숨어 이쪽을 훔쳐보는 남자애가 있긴 했으나, 그가 마리나와 관련이 있어 보였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일행처럼 대하는 건 나였지.

         

         – 따로 안면이 있는 분이시라면 경계 수준을 하향 조정하겠습니다만. –

         

         “아니? 진짜 완전 수상한 인간이니까, 절대 긴장 풀지 마.”

         

         그래도 친근함을 호소해오는 면전에다 대고 퍼부을 말은 아니었기에 제로에게 속삭이는 형태를 빌었지만…. 어쨌든 명백한 거부감을 표하자, 그제야 자신이 뭐라 떠들던 여전히 뚱한 내 표정을 직시한 그녀가 삐질삐질 난처함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어라? 엥? 내가 잘못 봤나? 분명히 아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빨리 알아채 주셔서 굉장히 감사하네요.’ 라고 나 또한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방법은 잘 몰라도 임시 전파 청정구역을 만들어주고 이쪽을 포함시켜준 건 감사하지만, 마리나 본인이 그 개념 없는 사이버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면 이제는 비켜줬으면 좋겠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안 되니까.

         

         적어도 그녀가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참 다행….

         

         “이상하다… 틀림없이 그 때 하베스트 플래닛 경찰 본부에서 봤던 것 같은데.”

         

         “잠깐! 누구세요?!”

         

         갸웃하며 돌아서는 그녀의 마지막 혼잣말을 듣고는 이번엔 내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생각보다 엄청 구체적인 장소 지명에, 진실 혹은 거짓의 무게추가 단번에 전자 쪽으로 기울었으니.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내 방랑 내력을 자세히 되새겨본다.

         경찰 본부면 엔지니어 면접장. 흐릿했던 얼굴들은 치워버리고 까먹기 힘든 핵심 정보-헤어스타일-을 대입하니 어렴풋이 망각한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그 뒤꽁무니에 경찰 단 채로 면접장에서 뛰쳐나갔던 사람? 그걸 안 잡히고 무사히 탈출했다고…?”

         

         싱글거리는 그녀에게 긴가민가한 추측을 찔러보니 완전 수긍이 돌아왔다.

         

         “맞아! 그러는 너도 어찌저찌 잘 도망친 모양이네? 분위기 파악 못하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길래 무조건 잡힐 줄 알았는데 말이야!”

         

         “허….”

         

         그럼 옷깃이 스치긴커녕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잖아?! 안 떠오를 만도 하네…!

         

         더군다나 나는 그쪽과 달리 멀쩡히 합격해서 일하다 퇴직했다~는 목구멍까지 넘어온 대답을 간신히 삼켰다.

         

         꽤 오래된 사건인 만큼 복역하다가 나왔거나 벌금형으로 때웠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여기서 기웃거리는 모습이나 태도를 보면 아마 야반도주라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그보다도, 쓸데없이 정확하고 구체적인 마리나의 묘사가 더 신경 쓰이는데….

         

         “내가 기억력이랑 눈치 하나로 먹고 사는 편이라!”

         

         “아, 예….”

         

         이쯤 되니 맥 빠진 말 외에는 건네 줄 게 없었다.

         질문은 고사하고 칭찬조차 없이 노려보기만 했는데도 알아서 부끄럽다는 듯이 해명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없는 인연을 빌미삼아 안면을 트는 경우가 많았나 보다.

         

         무슨 악의라도 느껴졌으면 당장 꺼지라고 욕을 박거나, 다가오지 못하게 쳐냈을 텐데.

         웃는 얼굴에 침 함부로 못 뱉는다고. 마냥 무해함을 강조하고 있으니 매몰차게 대하기도 어려웠다.

         

         ……저 안에 흑심 같은 걸 품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어… 내가 눈치는 좀 모자랄지언정, 아론이라는 구밀복검(口蜜腹劍; 말은 달콤하나 속은 흉흉함) 분야의 선구자와 피치 않게 부대껴본 경험이 있어서…?

         

         별로 바라지 않았던 경험이라도 이렇게 도움이 되니 참… 감동이다. 응.

         

         “크흠! 그래서 왜? 나한테 따로 볼일이라도 있어?”

         

         뒤늦게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은 꼴이 됐어도 어디까지나 먼저 다가온 건 상대방.

         용건이 있으면 어디 얼른 꺼내 보라는 자세를 취하니, 기다렸다는 듯 마리나의 머리가 내 쪽을 향해 약간 숙여졌다.

         

         “…여기 공기 질이 더럽게 안 좋잖아? 급한대로 가져온 전파 교란기를 키긴 했지만 이 상태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안에서 즉석 팀을 짜는 놈들도 있는 만큼, 나도 좀 승률을 높여야겠다 싶어서.”

         

         “팀을 짜고 있다고?”

         

         우리를 힐끔거리는 인간들에겐 들리지 않을 수준의 음량으로 꺼내진 비밀 얘기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입에는 담지 않았어도 그녀는 나름 괴전파를 분석해봤는지 그 기원에도 분명 짐작이 있는 것 같았고.

         

         비위도 좋다. 나는 소름 끼쳐서 정확하게 분석도 안 하고 바로 차단했는데.

         

         “주머니에 꿍쳐 둔 휴대용 기기들로는 아무래도 메모리 한계가 있으니까! 마켓 측에서 친절하게 장비를 제공해준다 쳐도 조금이나마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면 마음 맞는 놈 찾아서 끼리끼리 뭉치는 거지.”

         

         “흐응….”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살핀다.

         

         말마따나, 불과 사람 열댓 명뿐인 이 지하실에도 안 보이는 선으로 갈라진 그룹 구분이 있는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떠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 같은 자발적 아웃사이더들도 존재했… 그래봐야 나와 마리나, 그리고 아까 본 남자애밖에 없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덧붙여서 굉장히 영악했고.

         

         “나 꽤 유능하다고? 기억력도 눈치도 정말 좋으니까, 속는 셈치고 믿어도 돼!”

         

         “…그래 보이네.”

         

         묘한 눈초리가 허공에서 교차한다. 분명 악의는 없다고 했나? 하지만 딱히 선한 것도 아니다.

         

         아는 척을 하면서 다가오고, 결국 내가 붙잡는 형태가 되었으니 여기서 내가 마리나와 갈라서더라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떤 식으로 보일지 뻔했다.

         

         그렇지만 제로한테 겁먹지 않은 담대함도 그렇고. 해커라 하기엔 상당히 쾌활한 것도, 준비가 철저한 것도 높은 가산점을 줄 만하다.

         

         기억력과 눈치는… 차차 따져봐도 되겠지.

         순수한 신체능력이 아니라 임플란트나 사이버웨어를 이용한 눈속임이라 해도 이렇게 몸소 나를 지목해 보였으니까.

         

         슥 하고 손을 내민다.

         여자치고는 마리나의 키가 훤칠해서 비스듬하게 위를 향하는 형태가 된 게 거슬리지만 어쩌겠나, 이제는 납득-체념-한 불편함 중 하나이다.

         

         그녀가 악수라는 요식 행위에 얼마만큼의 의미를 부여하는 타입인지는 몰라도. 스스로의 장점 중 하나로 눈치를 내세웠으니 적당히 잘 알아들으리라 믿는다.

         

         “아나스타샤라고 불러, 블랙마켓 닉네임은 아이보리고 이쪽 멀대는 제로. 보수 분배 문제는… 시험 통과하고 나서 하는 걸로 알게.”

         

         “그건 우리끼리 정해봐야 별 소용없을 것 같으니까. 좋아!! 잘 부탁해 귀염둥이! 아, 저쪽 부끄럼쟁이는 타케쿠라 켄(武倉 剣)이랬으니. 알아서들 인사 나눠♪”

         

         “……어?”

         “……안녕.”

         

         콧노래 흥얼거리는 익살꾼의 과장된 손짓을 따라 어색하게. 가방 뒤로 머리만 삐죽 내민 꼬마와 눈인사를 나눈다.

         

         왜 갑자기 꼬맹이 쪽 이름을 알려주는 걸까. 답은 존나 간단했다.

         

         …감쪽같이 속았네 이거. 영락없이 듀오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트리오였어? 대단한데.

         

         일단 우리를 영입한 조장님의 교섭 솜씨가 보통이 아님은 알았으니, 향후 앞에 나설 일이 있으면 모조리 마리나에게 떠넘기자고 마음먹은 순간.

         

         장내 편 가르기가 끝나길 기다린 건지, 대기 시간이 다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군상들을 모은 주최 측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이잉…!

         쿠궁!!

         

         “어럽쇼.”

         “……저기로 오는 거였나?”

         

         공동 중앙에 있던 앙상한 폐 엘리베이터 뼈대에 돌연 전력이 공급되자 뻗어 나온 새하얀 불빛이 모두의 이목을 잡아 끈다.

         

         당연히 빛만 뿜어냈다면 이목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거다.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소음은 사람이 탑승할, 혹은 이미 탑승한 승강기 박스가 이 층으로 접근해오고 있음을 알렸기에. 영양가 없는 잡담을 나누는 이들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끼긱… 끼긱…!

         

         모두가 숨죽인 사이 설치된 강선이 오르내리며 더 깊은 지하로부터 박스를 끌어올린다.

         

         통로 크기로 보건대, 곧 모습을 드러낼 엘리베이터에 여기 있는 인원이 전부 탑승하기는 힘들다는 걸 알아챈 이들은 슬금슬금 승강기 입구가 올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으로 거리를 좁혔다.

         

         그 와중에도 성질머리가 더러워 보이는 새끼들은 은근히 서로의 동선을 견제했고.

         

         반면 마리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팔짱 끼고 뒤에서 구경하느라 바빴다.

         안전이 제일이라는 측면에서 특별한 의견 교환 없이도 이만한 합치를 이룰 수 있다니… 급조된 팀치고는 괜찮은 징조라 여겨졌다.

         

         하지만 어느새 짐 가방을 질질 끌고 다가온 일본계 소년, 켄은 태평하게 기다릴 여유가 없는지 조급한 표정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로 동료를 재촉했다.

         

         “아… 안 가볼 거야? 서… 선착순일지도 모르는데?”

         

         “해커의 스킬을 평가하는데 달리기가 포함된다면 난 대환영이거든!”

         

         “…….”

         

         …거 참 믿음직스럽네. 하긴 웬만한 경찰보다도 발이 빠른 건 확실하니 자신감을 가질 만도 하다.

         

         한데 난 저걸로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됐다고 생각해서 침묵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는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편인지 이번에는 우물쭈물거리면서 나와 제로를 흘끔거렸다.

         

         대강대강 자기소개가 끝나면 과제 얘기라. 진짜 조별 과제인가?

         

         “아니, 뭐…… 평가랍시고 도를 넘게 좆같이 굴면, 때려 치우고 다른 일하러 가면 되니까.”

         

         “아….”

         

         처음부터 대충한다는 인상을 줄 필요는 없었지만. 리스크가 지나치게 큰 건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나도 분명히 했다. 어리숙해 보이는 꼬맹이 씨도 그 말을 듣고는 얌전히 구경꾼 대열에 합류했고.

         

         덜컹!

         

         떠드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먼지 끼고 곳곳에 그래피티와 흠집으로 도배된 공사 현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매끄러운 흑요석 같은 상자가 멈춰 선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거기엔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액정 디스플레이 패널을 두르고, 화면에 유명한 오페라 가면을 팝업 시켜 놓은 괴한이 참가자들을 맞이했다.

         

         “아… 아. 아아… Putain de Merde!! 이 망할 새끼들은 이런 Chien 잡일에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제대로 된 인사조차 없었다.

         목을 가다듬다가 혼자서 잔뜩 화난 가면남이 발을 구르며 쇄골에 걸쳐진 강철 목도리를 매만진다.

         흡사 족쇄나, 어딘가의 데스 게임에서 나오는 역방향 곰 덫처럼 생겨 먹은 물건이 팔의 움직임에 따라 신나게 철컹거린다.

         

         문이 열렸다고 잽싸게 발을 들이밀려던 인간들도 그 기괴함을 보고는 알아서 안전거리를 확보했으니 역시 외형은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니면… 나처럼 저 친구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이 있는 거던가.

         여기까지 와도 낯익은 얼굴이 없길래, 원작 인물이 관련되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블랙마켓 소속 네임드이자 보스 캐릭터 중 하나, 레오나르 경(Sir, Léonard).

         선형 구조 퀘스트 때문에 플레이어와는 무조건적으로 적으로 마주치긴 해도. 단 두 문장만에 시작되는 보스전은 그를 당당하게 싸이코 캐릭터 반열에 올려 놨으니.

         

         ‘……지금 내 종합관제실에 소독도 안 하고 들어온 겐가?’

         ‘T’es con! …어쩔 수 없군. 마침 냉장고에 버러지를 위한 빈 자리가 있긴 했어.’

         

         역겨운 편집증이나 취향은 어쨌든 아무래도 그가 우리의 담당자인 모양인데, 과연 제정신이 아닌 인간답게 다짜고짜 통지서부터 날려 오셨다.

         

         “…끝자리 꼬맹이 둘과 여자, 그리고 중간 눈 째지고 비슷하게 생겨먹은 남자 셋을 제외하고는 당장 꺼져 주시길. 추천제라고 들었거늘, 제대로 된 방화벽조차 구축하지 못하는 Sale Bite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

         

         십여 명 중에 단 여섯. 과반도 넘지 못하는 첫 거름망에 내가 포함되었다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존나 무례하게 ‘꼬맹이’ 집합으로 분류된 점에 거세게 항의해야 할지,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너희는 탈락이다!

    Putain de Merde; ㅆ발 ㅈ같네~
    Chien; 댕댕이
    T’es con; 머저리
    Sale Bite; ㅈ대가리

    또 지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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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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