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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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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칠게 헛숨을 삼켰다. 그녀는 눈 앞이 하얗게 질린다는 감각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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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이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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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저리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한껏 고양된 기분과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지난날의 감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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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칠게 옷을 벗어 던지다 못해 붕대까지 풀어냈던 기억까지 떠올리자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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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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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였다면 절대 낼 리 없는 억눌린 하이톤의 비명은 그녀가 얼마나 혼란에 빠졌는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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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락, 스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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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의 비명이 방안에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가방에서 새 하얀 책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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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뭐야! 무슨 일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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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에 찔려도 작게 신음만 흘리던 노아가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자, 줄리아나가 화들짝 놀라 가방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노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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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 설마 저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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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아나가 심각한 목소리로 노아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 눈물이 고인 눈동자, 혼란으로 덜덜 떨리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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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줄리아나는 심각한 목소리로 노아를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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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대체 무슨 일이야!? ]
   “나…”
   [ 뭐…? ]
   “나 리안한테…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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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줄리아나가 3초 정도 침묵하다가 ‘설마?’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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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사이에 내가 모르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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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아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능글맞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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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아. ]
   “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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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줄리아나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못하고 어제의 기억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했다. 줄리아나는 그런 노아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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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임은 했지? ]
   “으아앗!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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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버튼을 누른 것처럼 노아가 벌떡 일어나 줄리아나에게 소리쳤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반말까지 튀어나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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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이… 아니야? 진짜? 난 어차피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니까 그냥 말해주면 안 돼? 응? ]
   “아니, 아니에요! 그건 진짜 아니에요! 리안과 전 -… ”
   [ 그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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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입을 벙긋거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머리에 피가 너무 쏠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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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뭘 했는데? 응? 안 알려주면 리안한테 가서 -… ]
   “으아아! 그건 진짜 안 돼요!”
   [ 그럼 어서 어젯밤에 어떤 엉큼한 짓을 했는지 알려줘! 어서! ]
   “어, 엉큼한 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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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제 가슴을 리안의 몸에 밀착시켰던 장면을 떠올리자 입술이 꾹 다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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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뭐야? 왜 말을 못해? 설마 네가 먼저 덮쳤어? ]
   “…!”
   [ 진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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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자 줄리아나의 눈동자에 즐거움이 진해졌다. 그 어떠한 시련도 견딜 수 있는 노아지만 ‘사랑’이라는 시련 앞에선 연약한 병아리나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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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줄리아나…저 어떡, 어떡하죠? 리안에게 너무 큰 실수를… 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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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울먹거리며 항상 자신에게 답을 주었던 줄리아나에게 제 혼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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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아나는 노아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 오, 와아… ]라는 감탄사를 흘리며 반응하다가 끝에 가선 손뼉까지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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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장까지 찍었으면 끝난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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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리안과 입을 맞춘 것 같다고 말했을 땐 줄리아나는 환호를 내질렀다. 그녀의 감정을 한 줄로 설명하자면 “내가 잡은 주식이 떡상했다!”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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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혼식은 언제가 좋겠어? 봄? 여름? 아, 식은 제국에서 여는 거지? ]
   “겨,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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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사과를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노아는 결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리안과 연애하고 결혼해 아이 셋을 낳고 행복하게 살다가 시간이 지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호호 그때 생각나요 여보?”, “그때 참 좋았지.”라고 웃으며 여생을 보내는 장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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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식간에 지나간 장면에 노아는 어버버 거리며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사실에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 깐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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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사실 그때 기억이 애매해요. 닿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그래? 그럼 내가 가서 리안한테 물어볼게. ]
   “아아아!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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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와 줄리아나의 입씨름은 식사를 끝낸 조직원이 노아 몫의 식사를 들고 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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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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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시작된 여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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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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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와 리안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고 단단한 벽이 생겨났다. 두 사람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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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보스랑 싸웠어?”
   “어? 아,아니. 그럴 리가.”
   “그치만 같이 대화도 안 하고 이렇게 딴 데 보고 그러잖아.”
   “으응, 그런 놀이를 하는 중이라 그래.”
   “이상한 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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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리에서 가장 어린 리본이 알아차릴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굉장히 어색해졌다. 친구로만 지내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이성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노아 또한 리안과 리본의 대화를 듣고는 귓가를 붉게 물들였다. 
   
   
   리안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이유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루한 여행길이 질려 가방 안에만 있던 줄리아나가 허공에 둥둥 뜬 채 음흉하게 웃으며 그런 두사람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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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엽다. 귀여워. 이게 청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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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색하고 간지러운 여정이 이어진 지 일주일 정도 지났다. 리안과 노아는 조금이지만 다시 말을 트게 되었고, 중간에 두 번의 습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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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은 노예 상단이었고, 한번은 용병으로 이루어진 강도들이었다. 모두 리안과 노아 선에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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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 오빠 엄청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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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제대로 싸우는 걸 처음 보게 된 리본은 눈을 반짝거리며 리안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최대한 불길한 느낌이 나지 않도록 마검에게 주의를 준 덕분인지 리본의 눈동자엔 동경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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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훗, 더, 더어 찬양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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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검이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반짝반짝 빛을 내며 소리쳤다. 물론 그 소리는 리안에게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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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오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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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의 종아리에 찰싹 붙어있던 리본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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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랑 결혼하자!”
   “푸흐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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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본의 말에 먼저 반응한 건 리안이 아니라 노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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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흡, 콜록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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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거칠게 사레가 들린 바람에 눈물까지 보이며 기침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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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보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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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깜짝 놀란 리본이 후다닥 노아에게 달려갔다. 리안은 곤란한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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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결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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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 둘에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면서 하하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상상까지 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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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는 물론 리안의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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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 리안 오빠 봤어요? 막! 슝해서 슝하고! 동화에 나오는 기사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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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 안정을 찾은 노아의 곁에서 리본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안은 ‘기사’라는 말에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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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아이리스를 구해줬을 기사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려나? 가능하면 같이 탈출하고 싶었는데… 그건 무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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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슥슥 문지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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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서 아이리스를 공작가까지 데려간 인물이니까.. 잘 살아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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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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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하얀 연구 가운을 입은 두 남자가 고풍스러운 서재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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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응… 한 분쯤은 와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원래 저희 쪽으로 새롭게 사천왕이 되신 분이 오시기로 했었답니다.”
   “정말인가?”
   “예, 다만 위쪽에서 더 급한 임무가 생겼다는 이유로 다른 쪽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젠장… 우리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연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군!”
   “맞는 말입니다.”
   ​“쯧, 침입자만 아니었어도 이런 고민은 굳이 할 필요도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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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콧수염을 가진 연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창문 쪽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엔 새 하얀 연구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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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공간 안에는 검은색 피부를 가진 2m 크기의 여성체 정령이 수십 개의 쇠사슬에 꿰뚫린 채 쓰러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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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가..내 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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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령은 연신 제 아이를 찾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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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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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꺄아아아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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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사슬이 검게 번쩍거리자 정령이 비명을 내질렀다. 남자는 콧수염을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안경을 쓴 연구원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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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입자 녀석은 아직도 입을 열지 않았나?”
   “예, 하지만 알아낸 게 없는 건 아닙니다.”
   “오오..! 뭘 알아냈지?”
   “아무래도 놈은 제국에서 넘어온 기사로 추정됩니다.”
   “기사?”
   “예, 소지품 중에 제국에서나 쓸법한 물건들이 꽤 나오더군요. 거기다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이 딱 봐도 기사의 것이었습니다.”
   “제국의 기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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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하얀 이를 내보이며 활짝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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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쓸만한 실험체가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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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애매하게 끝나서 오후11시 쯤에 한편 더 가져올 생각입니다!
그때 뵈어요 😀

아.. 사실 노아가 리안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장면을 조금 보고 싶었습니다만.. 그러면 너무 늘어질 것 같아서 제가 꿀꺽 했습니다.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노아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칠게 헛숨을 삼켰다. 그녀는 눈 앞이 하얗게 질린다는 감각을 처음 알았다.

“어, 이게? 어..?”

이리저리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한껏 고양된 기분과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지난날의 감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거칠게 옷을 벗어 던지다 못해 붕대까지 풀어냈던 기억까지 떠올리자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평소였다면 절대 낼 리 없는 억눌린 하이톤의 비명은 그녀가 얼마나 혼란에 빠졌는지를 보여주었다.

바스락, 스륵!

노아의 비명이 방안에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가방에서 새 하얀 책이 튀어나왔다.

[ 뭐야! 무슨 일이야?! ]

칼에 찔려도 작게 신음만 흘리던 노아가 소리 높여 비명을 지르자, 줄리아나가 화들짝 놀라 가방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노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 설마 저주?! ]

줄리아나가 심각한 목소리로 노아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 눈물이 고인 눈동자, 혼란으로 덜덜 떨리는 시선.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줄리아나는 심각한 목소리로 노아를 다그쳤다.

[ 도대체 무슨 일이야!? ]

“나…”

[ 뭐…? ]

“나 리안한테…으으으..”

노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줄리아나가 3초 정도 침묵하다가 ‘설마?’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밤사이에 내가 모르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건가?’ ]

줄리아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능글맞게 변했다.

[ 노아. ]

“으으..”

노아는 줄리아나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못하고 어제의 기억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했다. 줄리아나는 그런 노아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 ..피임은 했지? ]

“으아앗!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치 버튼을 누른 것처럼 노아가 벌떡 일어나 줄리아나에게 소리쳤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반말까지 튀어나올 정도였다.

[ 에이… 아니야? 진짜? 난 어차피 어디 가서 말도 못 하니까 그냥 말해주면 안 돼? 응? ]

“아니, 아니에요! 그건 진짜 아니에요! 리안과 전 -… ”

[ 그냥? ]

“…”

노아는 입을 벙긋거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머리에 피가 너무 쏠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 뭘 했는데? 응? 안 알려주면 리안한테 가서 -… ]

“으아아! 그건 진짜 안 돼요!”

[ 그럼 어서 어젯밤에 어떤 엉큼한 짓을 했는지 알려줘! 어서! ]

“어, 엉큼한 짓은…”

노아는 제 가슴을 리안의 몸에 밀착시켰던 장면을 떠올리자 입술이 꾹 다물렸다.

[ 뭐야? 왜 말을 못해? 설마 네가 먼저 덮쳤어? ]

“…!”

[ 진짜? ]

노아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자 줄리아나의 눈동자에 즐거움이 진해졌다. 그 어떠한 시련도 견딜 수 있는 노아지만 ‘사랑’이라는 시련 앞에선 연약한 병아리나 다를 바 없었다.

“주,줄리아나…저 어떡, 어떡하죠? 리안에게 너무 큰 실수를… 해버렸어요.”

노아는 울먹거리며 항상 자신에게 답을 주었던 줄리아나에게 제 혼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줄리아나는 노아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 오, 와아… ]라는 감탄사를 흘리며 반응하다가 끝에 가선 손뼉까지 쳤다.

[ 도장까지 찍었으면 끝난 거지! ]

노아가 리안과 입을 맞춘 것 같다고 말했을 땐 줄리아나는 환호를 내질렀다. 그녀의 감정을 한 줄로 설명하자면 “내가 잡은 주식이 떡상했다!”정도일 것이다.

[ 결혼식은 언제가 좋겠어? 봄? 여름? 아, 식은 제국에서 여는 거지? ]

“겨, 결혼?”

사과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사과를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노아는 결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리안과 연애하고 결혼해 아이 셋을 낳고 행복하게 살다가 시간이 지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호호 그때 생각나요 여보?”, “그때 참 좋았지.”라고 웃으며 여생을 보내는 장면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지나간 장면에 노아는 어버버 거리며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사실에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 깐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게… 사실 그때 기억이 애매해요. 닿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그래? 그럼 내가 가서 리안한테 물어볼게. ]

“아아아!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노아와 줄리아나의 입씨름은 식사를 끝낸 조직원이 노아 몫의 식사를 들고 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

다시 시작된 여정의 길.

“…”

“…”

노아와 리안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고 단단한 벽이 생겨났다. 두 사람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오빠 보스랑 싸웠어?”

“어? 아,아니. 그럴 리가.”

“그치만 같이 대화도 안 하고 이렇게 딴 데 보고 그러잖아.”

“으응, 그런 놀이를 하는 중이라 그래.”

“이상한 놀이네.”

무리에서 가장 어린 리본이 알아차릴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굉장히 어색해졌다. 친구로만 지내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이성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노아 또한 리안과 리본의 대화를 듣고는 귓가를 붉게 물들였다.

리안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하는 이유를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루한 여행길이 질려 가방 안에만 있던 줄리아나가 허공에 둥둥 뜬 채 음흉하게 웃으며 그런 두사람을 구경했다.

[ 귀엽다. 귀여워. 이게 청춘이지. ]

어색하고 간지러운 여정이 이어진 지 일주일 정도 지났다. 리안과 노아는 조금이지만 다시 말을 트게 되었고, 중간에 두 번의 습격을 받았다.

한번은 노예 상단이었고, 한번은 용병으로 이루어진 강도들이었다. 모두 리안과 노아 선에서 정리되었다.

“우와… 오빠 엄청 멋있다!”

리안이 제대로 싸우는 걸 처음 보게 된 리본은 눈을 반짝거리며 리안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최대한 불길한 느낌이 나지 않도록 마검에게 주의를 준 덕분인지 리본의 눈동자엔 동경만이 가득했다.

[ 후훗, 더, 더어 찬양해라! ]

마검이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반짝반짝 빛을 내며 소리쳤다. 물론 그 소리는 리안에게만 들렸다.

“오빠! 오빠!”

“응?”

리안의 종아리에 찰싹 붙어있던 리본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나랑 결혼하자!”

“푸흐흡!”

리본의 말에 먼저 반응한 건 리안이 아니라 노아였다.

“커흡, 콜록콜록!”

그녀는 거칠게 사레가 들린 바람에 눈물까지 보이며 기침을 쏟아냈다.

“응? 보스 괜찮아요?”

깜짝 놀란 리본이 후다닥 노아에게 달려갔다. 리안은 곤란한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결혼이라…’

리안은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 둘에 강아지 한 마리 키우면서 하하호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상상까지 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노아는 물론 리안의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스 리안 오빠 봤어요? 막! 슝해서 슝하고! 동화에 나오는 기사 같았어요!”

어느새 안정을 찾은 노아의 곁에서 리본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안은 ‘기사’라는 말에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아이리스를 구해줬을 기사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려나? 가능하면 같이 탈출하고 싶었는데… 그건 무리려나.’

리안은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슥슥 문지르며 생각했다.

‘혼자서 아이리스를 공작가까지 데려간 인물이니까.. 잘 살아있겠지.’

***

새 하얀 연구 가운을 입은 두 남자가 고풍스러운 서재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끄응… 한 분쯤은 와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원래 저희 쪽으로 새롭게 사천왕이 되신 분이 오시기로 했었답니다.”

“정말인가?”

“예, 다만 위쪽에서 더 급한 임무가 생겼다는 이유로 다른 쪽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젠장… 우리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연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군!”

“맞는 말입니다.”

​“쯧, 침입자만 아니었어도 이런 고민은 굳이 할 필요도 없었는데!”

콧수염을 가진 연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창문 쪽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엔 새 하얀 연구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구 공간 안에는 검은색 피부를 가진 2m 크기의 여성체 정령이 수십 개의 쇠사슬에 꿰뚫린 채 쓰러져있었다.

[ 아가..내 아가.. ]

정령은 연신 제 아이를 찾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파지직!

[ 꺄아아아악! ]

쇠사슬이 검게 번쩍거리자 정령이 비명을 내질렀다. 남자는 콧수염을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리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안경을 쓴 연구원에게 말했다.

“침입자 녀석은 아직도 입을 열지 않았나?”

“예, 하지만 알아낸 게 없는 건 아닙니다.”

“오오..! 뭘 알아냈지?”

“아무래도 놈은 제국에서 넘어온 기사로 추정됩니다.”

“기사?”

“예, 소지품 중에 제국에서나 쓸법한 물건들이 꽤 나오더군요. 거기다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이 딱 봐도 기사의 것이었습니다.”

“제국의 기사라…”

남자가 하얀 이를 내보이며 활짝 웃음 지었다.

“꽤 쓸만한 실험체가 되겠군.”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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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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