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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5

    제임스는 세련되고 깔끔하게 정돈된 국제 공항에 들어섰다.

    전용기에서 내려선 제임스를 공항 직원들이 정중한 인사로 환대하고 있었다.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군.”

    제임스에게는 겨우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약간 친숙함마저 들었다.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 정이 들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호수 오브젝트’의 정신 오염이 남은 걸까.

    그런 제임스 뒤에는 잔뜩 긴장한 경호원들이 4명이나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다.

    0호 유물을 하나 더 가지고 간다고 하니, 협회에서 붙여준 전문 인력이었다.

    뭐, 제임스 입장에선 좋은 일이었다.

    저번 오브젝트 테러 사건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 이번에는 든든하게 인력을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협회에서 믿음직한 사람들을 붙여주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자동문을 넘어가며 입국장에 들어서자, 제임스에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 오랜만에 보니까 정말 반갑군!”

    제임스는 푸딩 공장에서 동고동락한 통역사를 보고 포옹을 하면서 반가움을 표현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제임스.”

    하지만 통역사는 별로 반갑지 않은 건지 약간 울적한 표정이었다.

    “음?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이번에야말로 통역사는 필요 없지 않나요?”

    통역사는 약간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게다가 악몽을 꿔서 그래요. 엄청 흉흉한 악몽이라서 그런지, 괜히 불안하네요.”

    “공장 때처럼 사고가 터질까 봐 불안해하는 거로군?”

    제임스는 크게 웃으면서 통역사의 등을 두들겼다.

    “걱정할 필요 없네. 이번에는 경호 인력을 충실하게 데리고 왔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제임스가 뒤를 돌아보면서 4명의 경호원을 바라보자, 경호원들이 무감정한 표정으로 통역사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무심한 표정이면서도 주변에 대한 주의를 계속 기울이는 경호원들의 전문적인 모습에 통역사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연속으로 사건에 휘말릴 리는 없겠죠? 하하.”

    통역사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제임스 일행을 안내했다.

    제임스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한 것은 현재 회색 사신의 위치였다. 

    한국에 푸딩 공장을 세운 것도, 0번 유물을 가지고 나온 것도 전부 회색 사신이 대부분의 목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통역사는 세희 연구소 측에 전화를 걸어 여러 가지를 확인한 뒤 말했다.

    “현재 회색 사신은 ‘트리니티 연구소’로 이송된 상태라고 하네요. 세희 연구소 측으로 돌아오려면 일주일은 지나야 한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한국의 오브젝트 연구소들은 미국과 다르게 오브젝트를 신청만 하면 볼 수 있다고 들었네. 그러면 트리니티 연구소 쪽으로 가지.”

    제임스의 방탄 차량이 고개를 틀어서 트리니티 연구소가 있는 관악구 쪽으로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머리가 박살 난 여자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변한 모습은 온몸이 칼날로 이루어진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팔과 다리는 손가락, 발가락이 없이 길쭉하게 칼날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금속을 녹여서 뒤틀어 놓은 것처럼 생긴 괴물이었다.

    격벽으로 분리된 공간.

    커다란 오브젝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마구잡이로 돋아난 이빨이 찰칵찰칵 부딪치면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도 저런 모습이었으면 사람들 겁주기 편했을 텐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팔 대신 달린 칼날이 고속으로 날아왔다. 

    날카로운 칼날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칼날이지만, 어차피 물리 공격. 

    유령화로 피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하지만 그때, 정체불명의 소음이 나를 가로막았다.

    삐이이이이이익!

    “!!!!”

    유령화를 사용하려고 하자 엄청 커다란 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랐다.

    덕분에 유령화를 쓰지 못하고 칼날에 맞고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혀 버렸다.

    삐이이이익!

    유령화를 하려고 할 때마다 엄청나게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네, 영체에게만 들리는 소리 같은 걸 쏘아 보내고 있는 건가? 

    신기하네.

    한국에서 이런 기술을 만들었다는 점이 조금 의외였다.

    이런 기술은 미국에서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유령화만 믿고 돌아다니는 오브젝트라면 꽤 귀찮을 수도 있을 것 같네.

    아마 황금 사신이는 이 소리가 주변에 깔리면 튼튼하고 귀엽기만 한 샌드백이 되지 않을까?

    다행히 유령화를 억지로 쓰려고 하면 쓸 수는 있을 것 같긴 한데, 시끄러운 소리를 들어가며 굳이 쓸 이유가 없었다.

    물리 면역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저런 칼날 공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칼날 오브젝트의 필사적인 공격이 몇 차례 행해졌을 때, 격벽 내부의 상황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투명한 거품이 사방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가벼워 보이는 외관과 달리, 엄청 무겁고 딱딱한 거품들이었다.

    갑자기 웬 거품이지?

    ***

    트리니티 연구소의 시설 제어실.

    보안대장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모니터에 회색 사신이 부소장의 일격을 맞고 날아가는 것을 보자,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면서 웃었다.

    “역시 유령화를 못 하는군. 이걸로 회색 사신을 사냥할 가능성이 대폭 상승했다.”

    모니터링 직원도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상황만 보면 회색 사신이 완전히 무력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대로라면 부소장님이 승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 그렇게 되진 않을 것 같군.”

    영상만 보면 마치 강풍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는 회색 사신이었지만, 보안대장은 그렇게 단언했다.

    “지금 바로 거품을 투입한다.”

    평온해 보이는 것을 넘어서 지루해 보이는 회색 사신의 표정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보글보글.

    격벽 내부에 점점 거품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웬만해서는 터지지 않는 오브젝트로 만들어진 거품.

    회색 사신은 튼튼한 거품이 신기한지, 손으로 통통 두들겨 보기까지 했다.

    아귀처럼 특급 위험도를 가진 오브젝트이면서 물리적인 파괴 행위를 반복하는 녀석을 막기 위해 마련된 방어 시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거품은 회색 사신보다는 부소장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거품은 격벽 내부를 가득 채웠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부소장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여닫으며 찰싹거렸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화를 내고 싶은데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부소장은 언어를 말하는 능력마저 잃어버린 것 같군.”

    부소장은 칼날 같은 손발을 마구 휘두르며 발버둥 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반대로 회색 사신은 꽤 여유가 있어 보였다.

    부소장과 다르게, 회색 사신은 편안한 표정으로 볼풀에 들어온 것처럼 팔다리를 흔들흔들 휘저으면서 거품을 만끽하고 있었다.

    회색 사신은 꽤 즐거워 보였지만, 이동이 불편해진 것도 사실.

    거품으로 충분히 이동을 충분히 제한했다고 판단한 보안대장은 지시를 내렸다.

    “회색 사신을 격리한 D-15구역에 파괴 테스트를 시행한다.”

    “그러면 부소장님도 휘말리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보안대장은 별로 아쉬워 보이지도 않는 표정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타격대를 보내서 인질들을 공격해라. 회색 사신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오브젝트들이 지키고 있으니, 최대한 수비적으로.”

    모니터에 비친 격벽 내부는 진화한 아귀도 녹여버리는 고온의 불길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안대장은 고온의 불길 속에서 느긋한 표정을 한 회색 사신을 보면서 생각했다.

    ‘인질을 지키는 것을 보면, 공격하면 뭔가 반응을 보이겠지. 언제까지 그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 있을까?’

    ***

    나는 딸과 놀고 있는 푸른 사신을 보고 있었다.

    딸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면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라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저 구석에는 목이 꺾인 노인이 있고, 우리들은 여전히 위험한 ‘트리니티 연구소’ 내부.

    전화하려고 해도 휴대전화 같은 전자기기는 모두 빼앗긴 상황.

    그야말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아마 원인은 푸른 사신들이겠지.

    인간들을 불안하지 않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탕!

    그때 갑작스러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쓰러진 딸아이. 

    깜짝 놀라서 딸에게 달려가 보니, 다행히 딸은 멀쩡했다.

    하지만 딸아이 대신 총알을 맞은 푸른 사신은 그렇지 못했다.

    “아… 아빠. 사신이가 아파요!”

    몸통 한쪽이 거칠게 뜯겨 나간 푸른 사신이 딸아이의 손바닥에 힘없이 누워있었다.

    불꽃이 핏물처럼 흐르고, 이해할 수 없는 문자열이 흐릿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파요. 엄마….>

    아이들과 놀고 있던 푸른 사신들은 부산스럽게 날아다니며 물방울로 이루어진 방벽을 세웠다.

    <모두를 지켜주세요!>

    <물방울 보호막이 모두를 지킬 거예요!>

    물의 방벽이 세워지기 무섭게, 그 위를 수많은 총탄이 두들겼다.

    <지켜주세요! 엄마 골렘!>

    트램펄린으로 쓰이던 커다란 물 사신도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품에 안고 보호를 시작했다.

    쾅!

    도저히 총알에서 날 수가 없는 굉음이 총탄이 물방울을 때릴 때마다 울려 퍼졌다.

    “아빠, 어떻게 해요?”

    딸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돌아봤다.

    푸른 사신은 힘없이 눈을 감고는 가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엄마….>

    푸른 사신의 어딘가를 향해 쭉 뻗은, 하나 남은 팔이 바닥으로 축 처지는 순간.

    그 순간.

    하늘이 갈라졌다.

    아니, 공간이 찢긴 것처럼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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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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