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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5

       

       “궁중 시녀라는 건 꽤 높은 직책이에요. 메이드나 집사도 검증된 가문의 자제만이 하는 것이니까요. 못해도 남작이나 자작 정도 되는 대우는 받을 수 있답니다?”

       

        평범한 귀족이라면 누구나가 할 법한 제안이다. 그러나 이면을 숨긴 채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으려는 로즈마리의 의중을 고려하자면 이러한 말조차도 가시 돋친 것처럼 느껴진다.

       

        클리온이라면 모를까, 로즈마리를 상대하려면 머리를 조금 많이 굴려야 한다.

       

        “어차피 여기 졸업하면 그 정도 작위는 받잖아. 굳이 황궁에 가서 살고 싶지는 않아.”

       

        그래도 대한민국이라는 한 사회의 부품으로 구르며 눈칫밥 먹은 지 오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그때그때 할 말을 고르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군요.”

       

        내 변론이 먹힌 걸까.

       

        로즈마리는 일단은 물러나겠다는 태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바로 내 뒷자리에 앉았다. 왠지 모르게 뒤통수가 따갑다. 버멜이 이 광경을 봤더라면 온몸으로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이 새끼는 왜 코빼기도 안 보여?

       

        “자, 얘들아! 오랜만이야!”

       

        커다란 마도서를 한 손으로 끼고 들어온 헤를라인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벼운 아침 인사를 건넸다. 하스펠트 교수가 북방 전선에서 실종된 이후로 그녀가 2학기까지 우리 담임을 맡기로 한 모양이다.

       

        “2학기 첫날이라 별다른 공지사항은 없을 거야. 아, 그렇지. 카우렐리아에 있는 일리야드 아카데미랑 이번에 반 학기 정도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거든? 혹시 중간고사 이후에 엘프 나라로 가서 학점을 채우고 싶은 학생 있으면 조례 끝나고 나에게 얘기하렴!”

       

        한 학기도 아니고, 반 학기 교환학생이라니.

       

       이렇게 근본 없는 교환학생 제도는 또 처음 본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러면 성적 처리는 어떻게 해요?”

        “좋은 질문이야. 그쪽에 가서도 정확히 똑같은 과목을 듣도록 조치해줄 거고, 기말고사는 다시 이곳으로 와서 볼 거란다. 이번에 시험적으로 운용하는 거니까 웬만하면 성적 처리가 쉬운 1학년 위주로 지원자를 받으려 하고 있어.”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공계를 제외한 원소마도를 전부 익히기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하다. 그때까지 카우렐리아로 향하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겠지.

       

        “또 다른 질문 없니?”

       

        헤를라인 선생님의 물음에 교실이 잠잠해진다.

       

        아, 그러면…….

       

        …잠깐의 생각 끝에, 나는 들려고 했던 손을 다시 책상 아래로 내려놓았다.

       

        버멜이 어디 있는지는 묻지 말자. 안젤리카에게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오해를 살 만한 일을 하면 뜬소문만 더 생긴다.

       

        동향 사람인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무시하고 지내는 걸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생님, 호르데가 오늘 왜 안 나왔는지 아시나요?”

       

        나 말고도 의문을 품은 아이는 있으니 말이다.

       

        반에서 반장을 맏고 있는 ‘메이릴’이라는 소녀였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머리를 뒤로 땋아 내린 탓에 수수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학급에 한 명쯤은 있는 범생이 이미지다.

       

       그런 메이릴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로테 못지않게 반 아이들을 많이 챙겨준다는 점이다.

       

        “어, 그러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양호실에 있는 거 아닐까요?”

        “선생님이 따로 찾아보기로 할게. 너희들은 1교시 수업 준비하고 있으렴.” 

       

        때마침 바깥에서 종이 치는 소리가 들리며 조례시간이 끝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헤를라인 선생님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머, 무슨 일이니? 혹시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관심이라도 있는 거니?”

        “아니요, 그건 아니고….”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붙인 뒤 그대로 스몰 토크를 시작했다. 대충 여름 방학에 어떻게 하고 지냈는지 위주로 과장을 섞어 말했다.

       

        헤를라인 선생님은 교정에선 학생들을 아끼는 좋은 선생님이셨지만, 황실을 상대로는 로베스피에르 이사장 등과 함께 모반을 꿈꾸고 있는 개혁파의 일원이다. 방학 직후에 이들과는 한 배를 타 버리고 말았다. 

       

       예의상 근황 정도는 보고해야겠지. 어쨌거나 나라 경제가 개판난 상황 속에서 일개 평민인 내 등록금을 대신 내준 게 이쪽 개혁파 사람들이니까.

       

        “으음, 방학을 알차게 보냈네.”

       

        헤를라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둘은 남모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이러고 있었으니 날 직접 감시하기 시작한 마수가 냄새를 맡고 달려오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 나누세요?”

       

        로즈마리는 서양식으로 디자인된 흑우선을 살랑살랑 흔들며 나와 헤를라인 교수의 틈으로 끼어들었다.

       

        “그냥 오랜만에 만났으니 인사드리고 있었지.”

        “흐응, 그런가요.”

       

        그래, 너 마침 잘 왔다.

       

        “그나저나 선생님께서는 방학 동안에 북방으로 출장 가신다고 하셨었죠. 잘 다녀오셨나요?”

        “아, 그거 말이니? 못 갔어.”

       

        헤를라인 선생님이 여기 계시는 걸 보면 버멜이 못 가게 막아주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버멜의 말대로라면 헤를라인이 하스펠트 교수를 찾으러 원정을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막은 거겠지.

       

        이렇게 뻔히 알 수 있는 일을 구태여 선생님에게 물어보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래야 눈앞의 마수를 기만할 수 있을 테니까.

       

        로즈마리는 절멸급이다. 절멸급을 완벽하게 기만할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절멸급뿐이다.

       

        내가 이 녀석과 ‘동류’인지는 확신이 안 서지만, 점점 그 가능성에 가까워지고 있다. 버멜 녀석, 이런 것도 좀 상세히 알려주었으면 얼마나 좋아. 이러다가 혼자 힘으로 깨우치게 생겼네.

       

        어쨌건.

       

        “아….”

       

       나는 폐부에서 최대한 숨을 끌어내어 내뱉었다.

       

       탄식을 토해내는 것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인간다운 반응이었으며, 내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반응이기도 하였다. 

       

        “…….”

       

        로즈마리의 표정이 복잡미묘하게 변했다. 어떻게든 무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미묘하게 입꼬리가 뒤틀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 모양이다.

       

       로즈마리를 떠보는 건 원양에서 조각배 하나 몰고 낚싯대를 드리우는 일과도 같다. 더구나 낚아야 하는 물고기는 상어 정도 되는 녀석이니 말 다했지. 여하튼 방금 반응으로 모든 걸 결정하기에는 이를 것이다.

       

        “그럼, 선생님은 호르데 군 찾으러 가 볼게. 얼른 들어가서 수업 준비하렴.”

       

        나와 로즈마리는 고개를 숙이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로즈마리가 내 등을 콕콕 찔렀다.

       

        “언니, 정말 저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그래, 어디서 본 것 같긴 하다.”

        “정말요?”

        “옐로케이크 카페에서.”

        “……그냥 뻥이라고 말하세요.”

       

        어깨를 으쓱이며 책이나 꺼냈다.

       

        1교시는…. 어디 보자. 

       

       마수가 제일 싫어하는 정령마도학 시간이군.

       

       

        **

       

       

        메리가 헤를라인이 북방 전선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았던 건 버멜이라는 엘프였다.

       

       에테르가 수도에서 잠시 떠난 직후 태도를 바꾸었던 버멜을 스코프로 관찰하던 로즈마리는 크게 한 방 먹었다고 생각했다. 개강 후 돌이켜 보니 그때 헤를라인을 북방으로 보내서 죽여버려야 옳았던 것이다.

       

        ‘그 엘프…. 눈에 띄기만 해 봐라.’

       

        그런 자신의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모양인지 버멜은 잠적해버리고 말았다. 그 점까지 통틀어서 마음에 안 들었다.

       

        “언니, 언니네 반에 엘프 남학생 분이 있다면서요. 오늘 안 나오신 거 맞죠?”

        “뭐 그렇지. 왜?”

        “저 엘프 보는 건 처음이라서요. 한 번 궁금해서 만나뵈고 싶었죠.”

        “알아서 돌아오겠지. 그때까지 참아.”

       

        에테르는 무심한 듯 필통에서 필기구를 꺼내 새로 산 교재에 낙서를 끄적였다. 어지간히 심심한 모양이었는지, 자와 컴퍼스까지 꺼내서 정십칠각형을 작도하는 중이었다. 

       

        ‘뭐야. 왜 이리 태연하지?’

       

        뭔가 이상하다.

       

        로즈마리가 가정한 바에 따르면, 현재 에테르에게 가능한 상태는 총 두 가지뿐이었다.

       

        아직 기억을 잃은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

       

        기억이 돌아왔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경계하거나 우호적으로 대해야 한다. 그도 그럴게, 둘은 오랜 기간 친자매처럼 지내왔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편이 남아있다면 표정이든 어조든 조금이라도 흐트러져야 정상이었다.

       

        그런 것 없이 완전히 무감각한 얼굴이다. 마치 그동안의 일을 깨끗이 털어버린 사람처럼 평온하다.

       

        “언니, 저 정말로 어디서 안 본 것 같아요?”

        “오늘 개강총회에서 봤어. 연설 잘하더라?”

       

        계속 물어봐도 이런 대답만 연거푸 받을 뿐이다.

       

        ‘정말 나를 기억 못 하는 건가……?’

       

        큰 언니의 성격상 남에게 거짓말을 잘 못 한다. 시치미를 떼려고 하면 꼭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조금 전 헤를라인과 대화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엘프와 큰 언니가 편을 먹었더라면 헤를라인 교수에게 구태여 ‘북방에 잘 다녀오셨나요’라고 안부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수도에 남아 있던 엘프와 진작 대화를 주고받았서 알고 있었을 테니까.

       

        ‘아리송해. 조금만 더 지켜봐야지.’

       

        그걸 위해 직접 이 학급에 들어온 것 아니겠는가.

       

        아직 시간은 많다. 그동안 큰 언니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증거가 보이면 곧바로 계획을 실행하여 아카데미를 작살내놓을 생각이고,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기억을 되찾게 만들어야지.’

       

        로즈마리에게는 그럴 능력과 자본이 있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잠깐 교실에서 나온 로즈마리는 화장실 문을 걸어잠그고 변기 위에 걸터앉았다. 남몰래 마도를 사용하려면 마력초부터 태워야 했기 때문이다.

       

        [최상급 고유마도 ─ 스코프(Scope)] 

        [하급 고유마도 ─ 오토 매핑(Auto Mapping)]

       

        스코프의 기능에는 타인의 염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로즈마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축척을 변경했다. 틸레트 상공을 비추던 스코프가 아카데미 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확대된다.

       

        “위치는…. 여기쯤이면 되겠지.”

       

        [던전 생성 ─ ‘빛을 뜯어먹는 동굴’] 

        [아이템 배치 ─ ‘내면의 거울’]

       

        특정한 장소에 마굴을 건설하는 건 보통 작업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능력인 ‘위령’을 사용한다면 한밤중에 다 끝내고도 남는다.

       

        “이 아이템은 조금 비싼 거지만…. 뭐 어때.”

       

        아렌스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다. 이 정도 지출은 개새끼 껌값만도 못해.

       

        로즈마리는 키득키득 웃으며 스코프를 끄고 나왔다. 어느덧 1교시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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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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