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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5

       크래프트 후작이 악수를 받아주지 않자 연회장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은행과 회사의 임직원은 조용한 신경전을 숨죽인 채 주시했다.

         

       매케나스 백작은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분홍 눈동자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깔보는 눈길로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철부지의 오만함이라고 생각하기엔 모략으로 하늘섬 권력을 손에 쥔 후작의 행보를 고려하면 그렇게 만만한 상대일 리 없었다.

         

       후작은 백치 상태에서 회복된 이후 바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동안 행보를 조사한 결과 친구로서 캐머롯 영지를 방문했을 뿐 제대로 된 연회와 사교 경험은 부족했다.

         

       그래서 낯선 상황과 공간에서 연장자로서 압력을 가해 본 것인데.

         

       이런 가벼운 수는 통하지 않나.

         

       몰락했다 하여도 크래프트의 피는 여전했다.

         

       아니, 후계자 교육과 혈족 경쟁을 거치지 않고도 이렇게 완숙해져 있다면 오히려 피가 짙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조사하며 알게 된 흉흉한 소문들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 판단해도 될 것이다.

         

       테러를 조장하고 테러를 이유 삼아 하늘섬 행정부를 손본 다음 거슬리는 기사단까지 처리했다. 중앙정계에서 몰락하자 변방에서 차후를 도모하는 행보였다.

         

       어지간한 대상에게 이런 소문이 돈다면 공포심 조장을 하겠다고 직접 소문을 퍼트리다니, 돈 좀 썼겠군 이라는 감상만이 들겠지만…….

         

       이렇게나 크래프트의 모략가 기질을 이어받았다면 정말 테러까지 조장했을 소지가 다분하다.

         

       저잣거리에 소문이 날 만큼 세련되지 못한 거친 일 처리긴 해도 후작의 나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인간미가 있었다.

         

       혹은 인간미 없이 모략가로서 일부러 소문이 도는 걸 방관하거나 조장했거나.

         

       크래프트 가문이 수세에 몰린 상황이다. 건실하다는 걸 선전하기 위해 흉흉한 소문만큼 편리한 건 드물었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예외 상황엔 예외적인 조치가 필요하니.

         

       이번 제국은행과의 밀실 협의 과정에서 흘러들어온 말들에 따르면 대놓고 퍼진 소문 덕분에 황실도 다시 크래프트 가문에 시선을 두고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크래프트의 의도가 적중했다면 적중했다고 할 수 있었다.

         

       황실이 크래프트 가문을 손수 몰락시켰다고는 하나 다른 대귀족들이 공고한 상황에 하늘섬은 엄연히 변방이니 굳이 또 견제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황제의 언질을 받고 황실의 사냥개로서 중앙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현 크래프트 후작은 이대로 성장한다면 배신과 모략조차 사후에 역사가가 분석하고 나서야 들통난 몇몇 크래프트 가주들의 역량까지 닿을 것이다.

         

       그것도 교육 없이 홀로 습득하여서.

         

       태생적인 모략가다.

         

       그런 모략가가 마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철도 부설권에 관심을 가졌다라…….

         

       투표로 총장 대행을 뽑는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사교계에서 말이 나오게 하며 본인이 친마족파라고 대대적으로 광고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매케나스 백작은 악수로 건넸다가 무시당한 손을 유려한 손짓으로 회수했다. 그러며 자연스럽게 가슴팍에 대곤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소. 그 명성대로의 사람이시군.”

         

       백작의 손에 낀 금반지가 샹들리에 빛에 반짝였다.

         

       파스텔은 움찔했다.

         

       으엣.

         

       압도적 부패 레벨에 밀린 나머지 상대를 열심히 훑어보던 눈동자가 멈췄다. 금빛 반짝 패션을 어떻게든 배워보려던 쪼랩의 마음가짐이 뾰로롱~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금색 반짝반짝은 분홍분홍 외형엔 어울리지 않아.

         

       내가 부패 레벨이 부족해 패션에서 밀린 게 아니라 패션 레벨이 높아서 금장식을 착용하지 않은 거야!

         

       사라진 동경심 대신 연장자가 고개 숙이는 하극상 기분이 슬쩍 올라왔다.

         

       턱이 스리슬쩍 오만하게 올라갔다.

         

       에헴.

         

       “보는 눈은 있군요, 백작.”

         

       응응!

         

       솔직히 금반지, 금팔찌, 금목걸이는 촌스럽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리고!

         

       자식뻘인 상대와 누가 연회장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인지 기 싸움 한 것도 완전 철면피 같아요!

         

       제가 기 싸움에서 밀린 게 아니라 백작님이 뻔뻔한 거라 생각해요!

         

       절묘한 타이밍을 보면 근처에 대기하며 부하로 연회장을 관찰시키다가 제가 입장했을 때 뒤따라 들어오신 거잖아요!

         

       속사정을 말하고 보니 완전 민망해!

         

       응응!

         

       게다가! 게다가!

         

       입장 순서로 기 싸움 하는 건 애초에 너무 유치해요!

         

       나도 했지만…….

         

       나는 원래 유치하니까 괜찮아!

         

       뿌뿌!

         

       어쩌라구요!

         

       뿌뿌! 뿌뿌!

         

       유치유치 파스텔은 속마음으로 하극상 발언을 후다닥 내뱉고는 페이스를 되찾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이 사람보다 꿇리는 게 없음.

         

       권력자 파스텔, 키도 나이도 꿇리지만 사실 권력 레벨이 더 중요하다.

         

       매케나스 백작을 슥 훑어봤다.

         

       권력 레벨이 뿜뿜 느껴졌다.

         

       한때 마계를 쥐어흔들고 지금도 영향력이 약하진 않은 상인 연합체의 수장.

         

       밀무역보다 수익률은 낮아도 규모는 월등히 큰 공식 마석 무역을 거의 독점한 자본력과 돈을 쏟아부은 자체 상비군을 휘두를 수 있는 군사권을 소유했다.

         

       지도상에 영토만 없을 뿐 사실상 국가였다.

         

       하늘섬도 사실상 자치 정부지만 제국 입김이 강한 기사단 때문에 권력이 행정과 군사로 양분됐다가 이제야 일원화하고 있으니 아직은 밀리는 감이 있다.

         

       특히 회사가 제국은행과 이미 짜고 친 상황이라 상대 앞마당에서 싸워야 한다는 걸 고려하면 더욱.

         

       뿌우…….

         

       아직 권력 레벨이 꿇려.

         

       파스텔은 오만하게 올린 턱을 슬쩍 내렸다.

         

       “품위 있는 입찰 경쟁을 했으면 좋겠네요. 회사는 손발이 닿는 곳이 넓으니 이런 소소한 사안에 서로 인상 쓸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죠?

         

       “그러도록 합시다.”

         

       매케나스 백작이 약점을 포착한 듯 눈을 빛냈다.

         

       “한데 그리 말하는 걸 보면 후작은 이 매물에 관심이 많나 보오? 현금을 더 모아야 한다는 임직원의 조언을 거절하고 온 참인데 그리 말해주시니 다시 구미가 당기는군. 철도가 사업성이 많나 봅니다?”

       “아하하!”

         

       흔들어 보는 발언에 파스텔은 여유롭게 웃어넘겼다.

         

       비즈니스 모드?

         

       아니 객관적으로 매물에 애가 타는 불리한 상황은 맞으니 이건 모호한 흑막 쪽으로 우회.

         

       분홍 눈동자가 눈웃음쳤다. 샹들리에를 올려보며 눈빛이 깊어졌다.

         

       “관심, 많죠.”

         

       그리고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

         

       관심 많다.

         

       응응.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매케나스 백작이 흑막 연기에 눈빛이 변하더니 생각에 빠졌다. 머릿속 정보들을 조합하며 후작의 발언이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추측해 갔다.

         

       똑똑한 사람.

         

       사실 사기는 본인의 지성에 자신이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잘 당한다던뎅.

         

       바보바보 파스텔은 맹하게 샹들리에를 구경했다.

         

       반짝반짝.

         

       비싸 보여.

         

       생각을 정리한 매케나스 백작이 다소 확신에 찬 얼굴로 변했다.

         

       허억.

         

       나도 모르는 나쁜 짓이 있었나 봐!

         

       백작의 눈길이 와인을 마시는 척 이쪽을 예의주시하던 엘리를 향했다.

         

       그러더니 후작과 백작의 대면에 인파가 살짝 물러난 주변을 살피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총장 대행에 마리우스 교수 대신 호레이스 교수를 민 것도 그렇고, 엘리시타 왕녀와 사이가 좋으신가 보오.”

         

       오잉.

         

       파스텔은 마족 소녀를 돌아봤다.

         

       엘리는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 됐다. 그리고 숨긴 신분을 멋대로 까발려 무례를 범한 백작을 노려봤다. 왕녀 호칭이 맞긴 했다는 보증수표 같은 변화다.

         

       엘리, 왕녀였어?

         

       공주님이야?

         

       으에에?!

         

       어쩐지 완전 시크하더라!

         

       신분 격차에서 나오는 시크함이었어!

         

       그런데 그 왕녀를 서류 작업에 쓰던 나는 뭘까.

         

       파스텔은 다시 슬쩍 턱이 치켜 올라갔다.

         

       바로, 위대한 파스텔 각하.

         

       위대한 파스텔 각하는 눈웃음쳤다.

         

       “친하죠.”

         

       진짜 친함.

         

       사실만 말하는 중.

         

       매케나스 백작이 납득했다. 크래프트 후작이 짜고 친 경매에 왜 불청객으로 난입했는지 파스텔도 모르는 이유를 짐작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요. 예로부터 정치는 황금의 노예였으니.”

         

       언뜻 황실 모독에 가까운 오만한 발언이었다.

         

       “아하하!”

         

       그런데 이게 뭔 맥락인지 모르겠는 파스텔은 그냥 웃었다.

         

       “그럼 저와도 친하겠네요.”

         

       분홍 눈동자가 웃음기를 담고 백작을 바라봤다. 살짝 귀여운 척하는 앙큼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 황금 좋아하거든요.”

         

       반짝반짝.

         

       매케나스 백작이 묘한 눈빛으로 변했다.

         

       생각하곤 주변을 다시 둘러보며 특히 제국은행 측 귀들이 있는지 확인했다. 순식간에 탐욕스러운 미소로 변했다.

         

       “그거 잘됐군. 나도 아주 좋아하던 참이오.”

         

       백작의 손이 보여주듯 들렸다. 금반지가 은은히 빛났다.

         

       “이 근처에 본인의 별장이 있지. 황금 컬렉션을 모아뒀는데 경매 전에 후작을 초대해도 좋겠소이까?”

         

       경매 전에 경쟁자들끼리 밀담.

         

       허억.

         

       그거 완전 나쁜 짓임.

         

       파스텔은 표정이 환해졌다.

         

       완전 나쁜 짓!

         

       배덕감이 뿜뿜!

         

       “우리 마음이 맞네요.”

         

       이래서 뭐든 고레벨을 사귀어야 하나 봐!

         

       이참에 저 멋진 황금황금 패션도 배우고 말겠어!

         

       아까는 자존심상 억지로 부정했지만 파스텔은 백작의 패션이 진짜로 멋져 보였다.

         

       황금 반지! 황금 팔찌! 황금 목걸이!

         

       온몸에 황금 둘둘!

         

       나도 고레벨이 되고 말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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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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