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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5

     

    “와우.”

     

    라스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감탄했다.

     

    생명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라 여겨지는 7위계의 마법이다.

     

    거대한 일곱 개의 마법진이 회전하며 발광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라스가 소환한 불의 대정령이 거대한 몸집을 뽐내며 업화를 쏘아냈다.

     

    사방으로 불똥이 튄다.

     

    하지만 아셀라는 자신에게 닿은 불꽃에서 온화한 따뜻함을 느꼈다. 아군에게는 관대한 정령의 특성이다.

     

    꼭 라스의 체온 같다.

     

    “공자, 너 이프리트랑 계약했어.”

     

    “그러게요, 이 정도나 바란 건 아니었는데.”

     

    4대 원소를 관장하는 대정령이다.

    불의 기원을 담은 커다란 몸집을 아셀라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정령 마법사셨구나.’

     

    시모어가 평생을 바쳐 연구하던 분야는 바로 정령 마법이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제자들에게 남겨준 작별 선물이지만 7위계는 과해도 너무 과했다.

     

    “――――!!!”

     

    인간의 감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온에 카밀라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소멸해갔다.

     

    고위계의 흑마술이 소환한 촉수도 빨판 하나까지 분해되어 무로 돌아간다.

     

    와중, 카밀라가 사력을 쥐어짜 손톱을 우그러트렸다.

     

    ―화아악!

     

    마법진이 그려지고 마탄이 쏘아진다.

     

    “어딜.”

     

    ―채앵!

     

    아셀라가 즉시 대응해 라스의 앞에 얼음 방패를 세워내 방어했다.

     

    “휴, 손 빠르신데요.”

     

    여유 부리는 말투와 다르게 라스는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빌린 마법진과 마나지만 대정령과의 계약 자체는 라스와 이뤄졌다.

     

    몸에 무리가 가고 있을 게 뻔했다.

     

    ‘라스, 너는 또.’

     

    아셀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의심했던 자신이 잘못했던 걸까.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의심해보게 된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믿어도 되는 상대가 아닐까 여기게 된다.

     

    라스는 언제나 지금처럼 달려와 줬는데.

     

    그 입으로 직접 생각을 들어야만 안심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이기심이 아닐까.

     

    ‘…아니.’

     

    그와 대화를 해 보라는 시모어의 조언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생각을 솔직하게 전하지 않았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라스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있을 건 당연한데.

     

    “후우.”

     

    라스의 팔이 힘겨운 듯 내려간다.

     

    하여튼 허약한 남자다. 겨우 저만한 지팡이가 무거워 휘청이기는.

     

     

    아셀라가 말없이 라스의 옆에 섰다.

     

    그의 팔을 받쳐 든다.

     

    “황녀님, 물러나시죠. 제가 맡겠습니다.”

     

    “괜찮아. 내가 어마마마를 신경 쓸까 봐서 그런 거지?”

     

    “그건…”

     

    아셀라는 마침내, 진심으로 각오를 굳혔다.

     

    지금까지 유일했던, 하지만 더없이 악인인 가족과 결별할 각오.

     

    ‘괜찮아.’

     

    눈앞의 남자가 새 가족이 될 거니까.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어버릴 테야.

     

    그게 나,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의 방식이니까.

     

     

    저장구의 마나가 바닥나간다.

     

    이게 끝나면 7위계 마법은 라스의 마나를 전부 빨아먹을 터.

     

    그 전에 끝낸다.

     

    “이프리트!”

     

    아셀라의 각오에 응답하듯, 불의 정령이 더욱 불길을 매섭게 쏘아냈다.

     

    겹친 두 사람의 손이 창광에 휩싸였다.

     

     

     

    ***

     

     

     

    “끝났군.”

     

    황제가 나지막이 선언했다.

     

    전투는 끝났다. 흑마술사 카밀라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짧은 묵념으로 아내에 대한 예우를 가볍게 표하고는 힘차게 외쳤다.

     

    “토벌전을 종료한다! 철수하라!”

     

    황제의 명령에 기사들이 태세를 정비한다. 치유사들이 부상자를 챙겼다.

     

    주변이 부산한 와중, 아셀라가 라스와 눈을 마주쳤다.

     

    “공자.”

     

    “고생하셨어요, 황녀님.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하지요.”

     

    “응.”

     

    아무리 악인이라지만 친모를 잃은 날이다.

     

    라스는 조금은 아셀라를 배려하고자 이야기를 꺼냈다.

     

    “월광궁으로 돌아가면 막스와 놀까요.”

     

    “막스는 왜?”

     

    “이럴 땐 애니멀 테라피가 좋아요. 프리스비라도 던지면 즐거우실 겁니다.”

     

    “막스는 뚱뚱해서 그것도 잘 못 받아.”

     

    “그래서 웃기잖아요.”

     

    “풋, 그건 그래.”

     

    아셀라는 막스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공자도 같이 하면 할게.”

     

    “제가요? 뛰어다니는 일은 좀…”

     

    이 남자는 눈치가 없는 건지 나를 놀리는 건지.

     

    아셀라가 삐친 기색을 보이니 라스가 난색을 표했다.

     

    “알겠습니다. 같이 해요.”

     

    “응.”

     

    아셀라는 즐거워져서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라스랑 노는 것도 좋지만.’

     

    이번 토벌이 끝나면 같이 외출을 나가기로 했다.

     

    그것도 둘이서만. 누구도 모르게 비밀로 하는 오롯이 둘만의 시간이다.

     

    라스에게는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말하라고 명령해놨었다.

     

    ‘…라스가 언제까지고 우물쭈물하면.’

     

    내가 먼저 말할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가 사… 아니, 좋아해 준다잖아.

     

    기뻐할 게 분명해.

     

    설령 지금 얘가 애매한 기분이라고 해도 분명 당장 격렬한 사랑에 빠질걸.

     

    솔직히 헤이케나 라우가보다 내가 훨씬 아름답잖아.

     

    아름다운 건 중요해.

     

    응. 라스도 생각이 있을 게 분명해.

     

    나랑 벌써 키스…도 했고.

     

    …아닐 리가 없어.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걸 거야.

     

    정말이지, 내가 왜 겨우 라스 때문에 이렇게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담.

     

    …그래도 빨리 가고 싶어졌어.

     

     

    온갖 문장으로 머릿속을 물들이며 아셀라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 자신에게 보폭을 맞춰주는 라스를 보며, 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아셀라였다.

     

     

     

     

    그때였다.

     

    “선생님!!”

     

    타냐가 가장 먼저 반응해 다급히 외쳤다.

     

    아셀라와 라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밑을 바라보았다.

     

    ―퍼억!

     

    하지만 반응할 새도 없이 솟아오른 새까만 기운이 라스를 후려쳐 날려버렸다.

     

    “공자!”

     

    당황한 아셀라의 얼굴을 새카만 기운이 덮어간다.

     

    뜯어지고, 망가지고, 불타 녹아내리고, 처참한 몰골을 뚝뚝 떨어트리며.

     

    ―아셀라아…!

     

    카밀라의 형태를 한 영혼이 그녀의 앞에 일어섰다.

     

    소울워크. 죽은 후에도 악령이 되어 움직일 수 있는 금단의 주술이었다.

     

    ―네가 말만 잘 들었어도…!

     

    아셀라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네가 황제가 되어서 흑마술을 퍼트리면 됐잖아…!

     

    즉시 지팡이를 휘둘러 마법진을 그리려는 그녀지만 콱, 팔을 붙잡히고 만다.

     

    ―돌려받을 수 없다면 부수겠어…!

     

    카밀라가 아셀라의 복부를 향해 파악! 새카만 마나를 쏘아냈다.

     

    “윽…!”

     

    아셀라의 복부에 경고도 없는 재앙처럼 통증이 퍼졌다. 그녀가 짧은 신음과 함께 배를 움켜쥐었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붙잡으며 다리는 무너트리지 않는다.

     

    “이 마녀가!”

     

    그 순간 황제와 타냐의 검이 동시에 카밀라를 꿰뚫었다.

     

    새까만 영혼이 철벅거리며 붕괴하고는, 지면으로 녹아 스며들어 사라졌다.

     

    “황녀님!”

     

    라스가 즉시 아셀라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제야 그녀는 몸의 힘을 빼고 그에게 기댔다.

     

    “…라스.”

     

    “예, 저 여기 있어요.”

     

    “…아픈 것 같아.”

     

    “이번엔 솔직히 말씀하셨군요. 바로 치료해드리겠습니다.”

     

    라스가 가운을 펼쳐 주사기를 꺼냈다.

     

     

     

    ***

     

     

     

    “좀 어떠세요?”

     

    “하나도 안 아파. 대신 멍해.”

     

    침대에 앉은 아셀라는 내가 넘겨준 물잔을 받아 꼴깍꼴깍 마셨다.

     

    “어떻게 됐어?”

     

    “흑마술사 토벌전은 성공입니다. 폐하께서 수술 건, 진범 체포 건과 더불어 월광궁에 큰 상을 내리기로 하셨어요.”

     

    “좋은 소식이네.”

     

    탁, 아셀라가 물잔을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별로 안 기뻐 보이네요.”

     

    “카밀라 때문에 열 받잖아. 공자하고 프리스비 하기로 했는데 왜 이 날씨 좋은 오후에 침대에 있어야 하냐고.”

     

    “어… 프리스비는 막스랑 하는 거였죠?”

     

    “어머, 막스랑 공자 중에 누가 더 잘 물어올지 경쟁시킬 생각이었어.”

     

    “아이고, 그래서 황녀님께서 즐거우시다면야 네발로 뛰어야죠.”

     

    아셀라는 내 대답에 기분이 나아져서는 조그맣게 쿡쿡 웃었다.

     

     

    [No. 101 : 마력폭주 11% → 13%]

     

     

    그런 아셀라의 태도와는 별개로 마력폭주 확률이 스멀스멀 증가했다.

     

    아셀라가 별다른 위험에 처한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녀의 디버프가 폭주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밀라가 마지막에 부린 술수 때문이다.

     

    ‘정밀검사는 끝냈어.’

     

    아셀라의 뱃속 저주의 상태가 변화한 걸 MRI로 확인한 참이었다.

     

    새까만 부위는 지금까지 직경 가로 7.2cm, 세로 3.8cm이었다.

     

    그것이 약 0.2cm씩 팽창한 걸 확인했다. 덧붙여 노이즈의 범위도 확대됐다.

     

    ‘카밀라는 아셀라를 죽이려 했을 거야.’

     

    어차피 망한 거 깽판이나 치고 가자는 생각이었겠지. 하여간 흑마술사란.

     

    환부의 팽창은 아주 안 좋은 신호다. 더욱이 지금처럼 특수한 케이스라 검사가 제대로 안 되면 더욱 그렇다.

     

    ‘검사를 계속해서 변화를 기록해야 해.’

     

    가장 좋은 건 당장에라도 아셀라를 째는 거지만.

     

    ‘리스크가 너무 커.’

     

    황제를 수술한 경험 덕에 자신은 있다.

     

    하지만 그때도 저주가 날뛰는 바람에 간 일부를 절제해야만 했다.

     

    그 정도였어서 다행이지, 만약 저주가 장기 전체에 튀어버리면?

     

    더 손도 못 쓰고 아셀라는 죽는다.

     

    아셀라가 죽으면, 제도도 폭발해 멸망한다.

     

    더욱이 본래 역사에서 그 카밀라를 죽인 적 있는 저주라고 알고 나니 더욱 꺼려진다.

     

    치유주문은 원래 아셀라에게 안 통한다.

    저주에 신성력을 무효화하는 성질이 있다는 소리겠지.

     

    의사로서,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는 건 보고 싶지도 않고.

     

    ‘아니, 그것보다도.’

     

    어쩐지 지금의 나는 아셀라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아셀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물었다.

     

    나는 침대 앞에 앉은 채로,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황녀님, 언젠가 제가 약속했었죠.”

     

    “어떤 건지 모르겠네. 우리, 했던 약속이 굉장히 많아.”

     

    “하하, 그걸 일일이 다 기억하고 계셨나요. 한두 개는 잊어버리셔도 좋은데요.”

     

    “공자에게서 받을 대가는 전부 기억해.”

     

    그건 좀 무섭네.

     

    “혹시 같이 나가자는 약속 말이니? 모레라도 가도 좋아.”

     

    “그건 조금 미루죠. 당분간은 절대 안정을 취하시면서 상태를 봐야 합니다.”

     

    “…알았어.”

     

    아셀라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황녀님을 반드시 고쳐드린다고 했던 약속이요.”

     

    “응.”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다시 한 번 입에 담았다.

     

    “반드시 이룰 겁니다. 그것도 조만간.”

     

    “물론 그래야지.”

     

    아셀라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는 듯, 눈꼬리를 길게 찢으며 미소를 흘렸다.

     

    “넌 제국의 황제가 될 내 주치의잖아.”

     

    농담도, 겉치레도 아닌 진심이었다.

     

    뭐, 주치의로 뽑아준 게 은혜까진 아니어도.

     

    아셀라가 나를 확실하게 실력 있는 의사로 신뢰해주고 있다는 점은 꽤 기분 좋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기운이 있을 테니 낮잠 주무세요. 통증이 생기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 그대로 밤까지 주무셔도 됩니다.”

     

    훅, 촛불을 끄고 나가려는데 아셀라가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공자.”

     

    “네.”

     

    “…지금, 은.”

     

    “응? 뭐가요?”

     

    돌아보니 아셀라가 이불을 입가까지 끌어올린 채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내 식단을 채용해서 영양 밸런스가 좋아진 그녀는 성장기를 맞아 최근 금방 성숙해진 편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냐면, 어쩐지 볼을 붉힌 아셀라가 소녀보다는 여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은 같이 자도 돼.”

     

    사춘기 여자아이 같은 아셀라의 모습은 난생처음 봤다.

     

    조금은 충격이었지만 금방 벗어났다.

     

    “하하, 나중에 자서전에 쓰고 싶네요. 제국의 7대 황제가 애착인형을 달고 살았다고 말이죠. 언제 졸업하실래요?”

     

    “시끄러어.”

     

    아셀라는 자기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면서도 나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오랜만이라 재밌네.

     

    나는 침대로 들어가 그녀가 잠들 때까지 등을 두드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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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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