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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5

       시엔과의 생활은 계속됐다.

        아침, 그녀가 출근하면 나 역시 정보부 건물이나 마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우고.

        그녀가 퇴근하기 전에 관사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함께한다.

       

        가끔 침대에서 뒹굴며 그녀가 말했던 ‘절대 밖에서 남들한테는 말 못하는’ 행위까지.

        덕분에 날이 갈수록 내 영혼은 충만해지고 삶은 그 의미를 되찾았다.

       

        기억은 전혀 돌아오지 않지만 이대로 쭉 지내도 큰 상관은 없지 않을까?

        만족스러운 일상을 향유하던 어느 날이었다.

       

        복구가 한창인 29층의 포털 앞 광장.

        나는 웬 정신 나간 저주술사가 시련을 파괴했다는 현장을 구경 중이었다.

        단순히 안개가 자욱한 산맥이지만 마탑에서는 이런 땅 한 마지기도 소중한 듯 여러 학파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광장 앞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전투 장면이 재생되고, 마법사들은 그걸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즐기고 있다.

       

        저런 거대한 공간을 감싼 결계를 단신으로 부숴 버린 괴물이 아직도 멀쩡히 탑을 돌아다닌다는데 무섭지도 않나?

        듣자 하니 치안부의 모든 권력을 써서도 잡아두려 했으나 그마저 실패했다고 한다.

       

        정보부장의 말처럼 무능하긴 한가보군.

        혀를 차며 마탑의 안보에 대해 한탄하던 중, 공방을 끝마친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포탈로 빠져나왔다.

       

        “오오, 나온다 나온다!”

        “방금 전투에서 이긴 곳이지? 어느 학파야?”

        “미티어인 게 뻔하잖아. 근데 저 사람은 누구지?”

        “산을 완전히 불지옥으로 만들다니…… 최소 상층까진 올라가겠군.”

       

        각지에서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갈채에 나 역시 소극적으로 손뼉을 쳤다.

        원소학파 중에서도 꽤 저명한 불을 다루는 학파라는데 다들 굉장한 실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제일 앞에서 손을 흔드는 마틴이라는 남자가 이번 전투의 일등공신이었다.

       

        귀를 덮는 붉은 머리에 펑퍼짐한 로브.

        남자치고는 키가 작지만 얼굴이 잘생겨 여자 팬들도 많아 보였다.

       

        “마틴 님! 사랑해요!”

        “미티어는 좋겠네, 발디니 가문도 아직 건재한데 저런 인재까지 치고 올라오고.”

        “근데 그 소문 진짜야? 마틴 님이 남색가라는 거.”

        “남자 기숙사에서 속옷을 훔치다 대학원에 간 적도 있대……!”

        “꺅! 뭐야 그게!”

       

        뭐야, 범죄자였잖아.

        그것도 나처럼 깨끗한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평생 엮일 일 없는 대학원 출신이었다.

        부정 타기 전에 빨리 가야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릴리벨을 불러 관사로 돌아가려던 순간, 마틴이라고 하는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앗, 클락 님!”

        “?”

        “뭐야, 서로 아는 사람인가?”

        “어머 어머!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내 품에 안겼다.

        귓가를 스치는 머리카락에서 풋풋한 탄내가 났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 만큼 당황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지만 저쪽은 멋대로 나를 끌고 갔다.

        인파를 피해 어느 골목으로 들어오자 그는 주위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해주학파 라운지가 폐쇄된 뒤로 제가 얼마나 찾았는데요. 왜 기숙사에 안 계셨어요?”

        “네?”

        “제 씨앗 먹튀한 줄 알고 주변에 물어보니까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는 둥 이번에야말로 치안대에 끌려갔다는 둥…… 대신 뒤처리 하느라고 바빴어요. 정수기 코드도 꼽아놓고, 아녜스 님 밥도 챙겨주고.”

        “네???”

       

        내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한쪽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갔다.

        그러자 안쪽에 고정해둔 핀이 똑!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이 촤르르 떨어졌다.

        벌어진 로브 안쪽으로 드러난 몸의 굴곡도 이제 보니 영락없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설마 못 알아보신다곤 안 하겠죠? 저 이자젤이에요.”

        “…….”

        “애초에 이 마틴이라는 사람도 당신이 지목한 대학원생이었으면서…… 왜 하필 이런 놈이에요? 덕분에 이상한 오해만 잔뜩 생겼네.”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기억을 잃어서요.”

       

        원래 알던 사이인 것 같은데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좋겠지.

        나는 이자젤에게 그간 있었던 일과 현재 거취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정보부 바깥에서 본래 나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과 처음으로 만난 것이기에 기억을 되찾을 실마리가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전부 들은 이자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응, 이번에는 그런 컨셉이군요. 뭐, 가끔 연인들 사이에 존댓말로 대화하는 색다른 상황을 좋아해서 이건 이거대로 좋네요.”

        “컨셉이요?”

        “근데 갤러리는 관리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진짜 난리 났던데요 살짝 보니까.”

        “갤러리…… 제가 위치 노트가 없어서요.”

        “네? 그래서 연락이 안 된 거였어요? 따로 메시지도 보냈었는데…… 여기, 클락 님이 쓰던 거에요. 지금 저는 미티어에서 받은 게 있거든요.”

       

        품 안을 뒤적거리자 갈색 노트 한 권이 나왔다.

        표지 아랫부분에 ‘자젤이꺼’, 라고 예쁘장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왠지 모를 향수에 저절로 손이 나가던 차에, 갑자기 노트가 휙! 하고 멀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초롬한 눈매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근데 진짜로 기억이 없어요? 농담하는 거 아니고요?”

        “그렇다니까요.”

        “그럼 저에 대해서도 하나도 모르겠네요? 어떻게 만났는지, 같이 뭘 했는지, 무슨 사이었는지, 헤어질 때 기분이 어땠는지.”

        “죄송합니다.”

        “사과할 정도는 아니긴 한데…… 맞다! 사실 저희 서로 미래를 약속한 사이거든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대체 무슨 약속을 했던 거지?

        나는 즉각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는 걸요.”

        “흐응, 그건 벌써 누가 채갔구나. 하긴 경쟁이 좀 빡쎄야지…… 그러면 이걸로 할까.”

       

        노트를 하나 더 꺼내서 자신의 연락처를 추가한 이자젤은 어딘가 야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불륜관계였어요.”

       

       

       

        *

       

        “클락? 너 괜찮아?”

        “응.”

        “릴리벨한테 들었는데 오후에 잠깐 사라졌었다면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퇴근 후 침대에 맥없이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한 시엔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차마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던 나는 이불을 끌어올리며 더욱 안으로 파고들었다.

       

        불륜이라니, 세상에.

        백가의 귀족 중에는 첩을 여럿 거느리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자아성찰, 그리고 복사뼈에 대한 고찰.

        지금의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는 무기질적 쓰레기에 불과…….

       

        “저, 정 기운 없으면 발이라도 만질래? 오늘은 그,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스타킹, 한 번도 안 벗은…… 꺄아아악!?”

       

        했지만 일단 사막의 재앙이라 불리는 데스웜처럼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바닥을 기어 당황하는 시엔의 다리를 촉수처럼 휘감았다.

        무사히 스타킹을 얻어낸 뒤, 그 냄새를 음미하며 침대로 복귀하자 드디어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더 늦기 전에 기억을 되찾고 내가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정보부 직원들은 나와 마주치면 피하기 바쁘고, 릴리벨조차 최근에는 같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홀려 버린다’며 거리를 두는 추세인데.

        스타킹을 가지고 놀며 고민하던 중 이자젤이 주고 간 위치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맞다, 갤러리가 있었지.

        마법사들이 모인 커뮤니티인 만큼 지금 내 상황을 공유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노트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

        [주딱은…… 죽은 거지!?!?]

       

        갤 관리는 커녕 접속도 끊긴 지 오래인데 이제 놔줘야 되는 거야?

       

        이러지 말아다오

       

        — 그립도치, 슬픈도치…….

        — 뭔 일 생긴건 빼박이지

        — 사람은 원래 죽어

         ㄴ 주딱은 사람이 아니에요~

         ㄴ 하루에 20시간 갤질하던 새끼가 일주일째 접속 안하면 그게 숨 멎은 거지 뭐 ㅋㅋㅋㅋ

        — 또 어디서 가면 쓰고 숨어 있는 거 아님?

         ㄴ 사실 지금 이 글도 보고 있을지 모름

         ㄴ 뭣

         ㄴ 뭐엇!

        ====

        ====

        [야 너네 갤러리 망했다며?]

       

        지금부터 여기는 <제국 마법사 협회 커뮤니티>다

        긴말 안 한다 

       

        방 빼

       

        — 뭔 커뮤니티여

        — 거기 아직도 서버 안 닫았음? 

        — 하다하다 별 망령들이 다 튀어나오네 ㅋㅋㅋㅋ

        — 주딱이 살아계실 적엔 이런 일이 없었거늘……!

        ====

        ====

        [기어코 스스로를 찌르고 말았느냐]

       

        너무 날카로운 칼은 자기 자신마저도 베어버리는 법

       

        그럼 지금까지 가면쓰고 벌였던 악행도 전부

       

        모든 분탕은 결국 소멸해야 한다는 걸 알리기 위한 큰 그림이었던 거냐

       

        — 그런 깊은 뜻이???

        — ??? : 일단 찌르고!

         ㄴ 찔렀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듯 ㅋㅋㅋ

        — 큰 그림 치곤 도화지가 좀 많이 찢어졌거든요

        — 흠, 그 정돈가?

         ㄴ 숨어있던 분탕들 다 튀어나와서 난리 났다고 호들갑인데 사실 주딱이 가면쓰고 활동할 때보다 갤 클린함

         ㄴ 헉 ㅋㅋㅋ

         ㄴ ㄹㅇ ㅋㅋㅋㅋ

         ㄴ 정작 문제는 지들끼리 터지고 있다는 거임 고닉들 중에 상태 이상한 애들 좀 보이지 않음?

         ㄴ 천문대묘지기 : 주딱이 안보여요. 죽은 건 아닌데 아무래도 다른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벌써 파리가 둘이나 꼬였네요. 큰일이에요.

         ㄴ 이 새끼처럼 ㅇㅇ

         ㄴ 진짜 고장났네 뭐가 있긴 한가봄

        ====

        ====

        [일단 파딱 한둘만 매달아 보죠?]

       

        아무래도 피가 부족한 거 같은데 바치면 부활할지도 모름

       

        — 흠,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해볼까요

        — 개추에요

        — 주딱이 죽으면 원래 파딱도 같이 묻어야 되는 거임 ㅇㅇ

         ㄴ 나 이거 제국 역사 교과서에서 봤다

        ====

        ====

        프리나나나아님

        [일단 주위에 수소문해 보고 있기는 하거든?]

       

        마지막에 봤다던 친구도 입을 안 열고 평소 자주 가던 곳에도 얼굴을 안 비춰서 대체 어딨는지 모르겠음

       

        그래도 추적 중이니 잠깐 기다려 보셈

       

        — 헉 프리나나나나님

        — 1군 고닉 등판 ㄷㄷ

        — 핵심 측근 증언 떴다!!!!

        — 평소 자주 가던 곳이라고!?

         ㄴ 응 구라일 게 뻔해

         ㄴ 구라핑인지 아닌지 어케 아는데

         ㄴ 그치만 프리나나 님 유부녀고

         ㄴ 비처녀의 입은 거짓밖에 안 옮기거든요~

        — 닉네임의 뜻은 프리나나가 자신이 아니라는 언어유희인 건가요? 재밌네요~

        ====

       

        그곳에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관계를 맺는 화합의 장.

        잘 차려진 신선한 뷔페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그리운 고향에 돌아온 기분.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본능적으로 글쓰기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 44층에갖혀있어요살 : 주ㄷ닥

        — 44층에갖혀있어요살 : 휴ㄱㅏ는 잘 즐겼ㅇㅓ?

       

        허리춤의 검이 떨림과 동시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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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

[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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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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